김학진(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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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朝鮮貴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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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오등작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金鶴鎭, 1838~1917
조선 말의 문신으로, 경술국치 이후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본관은 안동. 이칭은 성천(聖天), 자는 후몽(後夢).

2. 생애[편집]


1871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로 근무했다.

1894년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냈고, 같은 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문현[1]의 후임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2] 농민들의 원성을 듣고 있던 김문현을 대신하여 농민군에게 유화 정책을 써서 '폐정개혁 12개 조항'에 합의하고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게 했다. 이후 농민군의 집강소 활동을 공인하고 자신의 감사 집무실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뒤 청일전쟁을 일으켜 전봉준이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김학진은 농민군에게 군량과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3] 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전라도 관찰사 자리를 이도재에게 내주었다.

1897년 다시 등용되어 중추원 의관을 지냈고 1899년 홍문관 학사·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구금되고 만다. 나중에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자고 제안했으나, 거부하고 만다. 이후에는 일제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1906년 홍문관 태학사를 역임하였다. 1907년에는 70살이 넘은 정2품 이상의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인 기사에 들어갔다.[4]

1909년 10월에 공자교회[5]의 장이 되었다.[6]

1909년 11월 한국과 일본 황제의 사진 봉안 및 송덕비 창건을 위한 ‘송성건의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0년 6월 합병추진단체인 ‘대한평화협회’ 찬성장에 선임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에는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로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2년 12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7년 사망했고 아들 김덕한이 작위를 승계한다.

3. 여담[편집]


대마도에 있는 수선사의 현판을 썼다고 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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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갑신정변 때 급진개화파 내각에서 병조참의의 관직을 얻은 그 김문현 맞다.[2] 그는 세도가 안동 김씨에 속한 인물이기는 했으나, 대중적 명망을 얻고 있었다. 더욱이 이름난 척화파이자 정치가인 김상헌, 김수항의 직계 후손으로 깨끗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3] 전주에 있는 회룡총 4백 자루, 크루프포 등 대포 3문과 탄알과 식량을 제공하였고 농민군의 운량관(運糧官)이 되기도 했다.[4] 종1품으로 승진하여 규장각 대제학을 지냈고 문학에 대한 식견이 탁월하였다고 한다.[5] 그 이전에는 대동학회였다.[6] 본래는 이용직이 그 역할을 맡았으나, 학부대신으로 전임되어서 김학진이 그 역할을 맡은 것.[7] 이 곳에서 최익현이 순국했는데, 남작 작위를 받은 김학진이 현판을 썼다는 것은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