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커스 비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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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커스 비즐리의 기타 정보





미국의 前 축구선수


파일:Beasley_National_2.jpg

이름
다마커스 비즐리
DaMarcus Beasley
본명
다마커스 라몬트 비즐리
DaMarcus Lamont Beasley
출생
1982년 5월 24일 (41세)
미국 인디애나주 포트웨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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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축구선수(윙어, 윙백 / 은퇴)
신체
173cm, 66kg
주발
왼발
소속
유스
IMG 아카데미 (1998~1999)
프로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1999)
MLS Pro-40 (1999 / 임대)
시카고 파이어 (2000~2004)
MLS Pro-40 (2000 / 임대)
PSV 에인트호번 (2004~2007)
맨체스터 시티 FC (2006~2007 / 임대)
레인저스 FC (2007~2010)
하노버 96 (2010~2011)
푸에블라 FC (2011~2014)
휴스턴 다이너모 FC (2014~2019)
국가대표
126경기 17골 (미국 / 2001~2017)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수상 경력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개인




1. 개요[편집]



파일:Beasley_Dynamo_1.jpg


미국 국적의 前 축구선수.

2000년대 미국 대표팀의 좌측면을 책임졌던 선수로 랜던 도노번과 함께 미국 축구의 신성으로 등장하여 초기에는 유럽 무대에서 활동했고 이후 자국으로 복귀해 휴스턴 다이너모에서 나이를 잊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오랜기간동안 선수생활을 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경력 초기[편집]


미국 인디애나주에 위치한 포트 웨인에서 태어난 비즐리는 플로리다에 있는 미국 축구 연맹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IMG 아카데미에서 축구 실력을 쌓았다. 1999년, 뉴질랜드에서 개최된 FIFA U-17 월드컵에 출전한 그는 대회기간 놀라운 활약으로 팀의 4강 진출을 이끌었고 랜던 도노번에 이어 실버볼을 수상하면서 떠오르는 유망주로 급부상한다.

1999년 3월 16일, 비즐리는 메이저리그 사커LA 갤럭시와 계약을 채결했으나 단 한 경기 출전에 그치며 냉혹한 프로의 세계를 뼈져리게 실감해야 했다. 결국 팀에서 자리를 못잡은 17살의 어린 선수는 시카고 파이어로 트레이드 된다.

시카고로 이적한 뒤 그는 물만난 물고기처럼 발군의 활약을 펼쳤고 4시즌 반 동안 리그에서 14골을 넣고 20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2003년에는 리그 베스트 XI에 선정되며 자국의 축구영건 다운 행보를 보여준다. 2004년에는 잉글랜드의 사우샘프턴 FC로 이적할 뻔했지만 무산되기도 했다.

2.2. PSV 에인트호번[편집]


자국리그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비즐리는 유럽진출을 갈망했고 여러 유럽구단의 오퍼끝에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휘하는 PSV 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PSV에는 대한민국의 박지성이영표가 활약하고 있었다. 첼시 FC로 떠난 아르연 로벤의 대체자로 영입된 그는 로벤의 등번호였던 11번을 물려받았고 팬들은 그의 공백을 잘 매워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즐리는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맹활약하며 팀의 18번째 에레디비시 우승과 KNVB 컵 4강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와의 경기에서 패색이 짙던 후반 44분에 얻은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만들었고 이후 승부차기에서 팀이 2:4로 승리하게 되면서 결승행에 큰 공을 세운다. 이후 결승에서 빌럼 II을 만나 4:0으로 대파하며 리그컵 타이틀을 추가한다. UEFA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도 비즐리는 12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고 팀의 역사적인 준결승 진출에 있어 중요한 선수로 활약한다.[1] 비록 팀은 4강에서 AC 밀란을 만나 아깝게 패했지만 비즐리는 4강으로 가는 과정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음 시즌에도 비즐리는 여전히 팀의 레귤러 멤버로 활약했지만 첫 시즌만큼의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게다가 2006년 1월 16일,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벌금형과 함께 3개월 면허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와중에 팀은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19번째 에레디비시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그에게는 썩 달갑지는 않았던 시즌이었다.


2.3. 맨체스터 시티 FC[편집]


2006년 8월 31일, 이적시장 마감을 하루 남겨두고 그는 잉글랜드에서 뛰고자 하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맨체스터 시티로 임대이적 한다. 꿈에 그리던 프리미어리그 무대를 밟았지만 얼마안가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임대기간 내내 제한된 출전기회를 받아야만 했다.


2.4. 레인저스 FC[편집]


2007년 6월, 비즐리는 스코티시 프리미어리그의 명문팀인 레인저스 FC로 약 7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통해 이적했다. 자국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선배인 클라우디오 레이나에 이은 클럽 역사상 2번째 미국 출신 선수이다.

레인저스로 합류한 비즐리는 2007년 8월 7일, 몬테네그로의 FK 제타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예선경기에서 레인저스에서의 1호골을 신고했다.[2] 그러나 경기진행 과정에서 제타팬들에게 인종차별성 조롱을 듣으며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는 UEFA와 FIFA에 조치를 취하도록 촉구했고 이에 따라 관중들을 단속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같은 달 25일에는 킬마녹 FC전에서 리그 첫 골을 넣으며 팀의 1:2 승리를 이끌며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정기적인 출전 기회를 가져가던 그는 11월 27일,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 5차전에서 후반 3분, 상대 골키퍼인 라파엘 샤퍼와 크게 충돌하며 큰 부상 입고 바로 교체되고 만다. 이후 생각보다 부상의 경도가 심각했고 결국 시즌이 끝나가는 2008년 5월 19일, 세인트 미렌과의 경기에서 교체출전으로 약 6개월이 돼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 부상에서 완벽히 회복 후 2008-09시즌을 맞았지만 이제는 부상과 관계없이 아예 주전경쟁에서 밀렸고 시즌 12경기 출전에 그친다.

다음 시즌에도 그의 입지는 여전했고 12월전까지 리그 1경기 출전에 불과했다. 이에 뿔난 비즐리는 곧 있을 월드컵 참가를 위해 다가오는 1월 이적시장에서 클럽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선언 이후, 12월 들어서는 다시 기회를 받으며 세인트 존스톤전에서 2어시를 포함하여 던디 유나이티드. 머더웰전에서도 각각 1골 1어시로 맹활약한 비즐리는 경기 후 레인저스에 남아 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머더웰전 이후 무슨 이유인지 감독은 또 다시 그를 외면했고 시즌 종료때까지 4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다. 심지어 팀은 리그 타이틀을 따냈지만 비즐리는 리그 출전 횟수 기준 25% 미만인 9경기에 출전하여 챔피언십 메달을 받지도 못했다.


2.5. 하노버 96[편집]


월드컵 이후 비즐리는 이미 진작부터 팀에서는 더이상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8월 30일, 분데스리가하노버 96으로 재빨리 이적한다.새 팀에서는 달라진 입지를 원했으나 오히려 레인저스 시절때보다 더 적은 기회를 받았고 후반기에는 아예 서브명단에조차 포함되지 못하며 사이버 선수로 전락한다.


2.6. 푸에블라 FC[편집]


2011년 6월 22일, 상처뿐이었던 독일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멕시코 리가 MX의 푸에블라 FC로 팀을 옮기며 7년만에 북아메리카로 돌아간다. 푸에블라에서는 3시즌동안 주전으로 나서며 벤치에도 못들었던 설움을 날려버리는데 성공했다.


2.7. 휴스턴 다이너모 FC[편집]


멕시코에서 3시즌을 보낸 비즐리는 2014년 7월 23일, 휴스턴 다이너모 FC와 계약을 채결하면서 장장 10년만에 자국으로 복귀하게 된다. 8월 3일 DC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경기에서 레프트백으로 첫 경기를 치렀고 1:0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10월 12일, 햄스트링 부상으로 시즌을 조기에 마감한다.

2015년부터 풀타임 시즌을 소화하며 뛰어난 활약으로 생애 4번째 MLS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다이너모 올해의 수비수에도 선정되며 최고의 시즌을 보낸다. 이후에도 5시즌동안 팀의 주장이자 주전 레프트백으로 활약하며 팀을 이끌었고 2018년에는 비록 플레이오프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US 오픈컵을 거머쥐는데 작게나마 일조한다. 2019시즌이 시작되고 만 37살의 노장인 비즐리는 5월 20일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고 잔여 경기동안 팀을 위해 헌신한다. 그리고 10월 6일, 홈에서 열린 자신의 친정팀이었던 LA 갤럭시를 상대로 마지막 경기를 가졌고 후반 44분에 교체되면서 홈팬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으며 퇴장했고 구단 측에서는 5년간 헌신한 그를 위해 은퇴식을 치러주며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남겨주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Beasley_National_1.jpg


1999년, FIFA U-17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랜던 도노번과 함께 자국의 라이징 스타로 주목받은 비즐리는 2001년 1월 27일 중국과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약관의 나이에 2002 FIFA 월드컵 최종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생애 첫 월드컵 무대에 참가하게 된다. 본선에서는 쟁쟁한 선배들을 따돌리고 32강 조별리그 3경기 중 2경기를 선발로 출전하며 자국의 토너먼트 진출을 도운다. 이후에는 팀이 다르게 전술을 가져가면서 16강, 8강전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이만한 기회를 받은 것만 해도 충분히 성공적인 대회를 치렀다고 할 수 있다.(8강 8위)

2006 FIFA 월드컵[3]에서는 소속팀에서의 부진한 활약이 대회까지 이어지면서 도노번과 함께 자국민들과 대표팀 감독 브루스 어리나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전히 그의 입지는 변함이 없었고 정기적인 출전을 했다.

또한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남아공월드컵 지역예선 4라운드에서 처음으로 레프트백으로 출전한 비즐리는 이후 국가대표를 은퇴할때까지 계속해서 레프트백으로 기용된다.

2008-09시즌이 끝나고 소속팀에서 부상과 출전감각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출전한 200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4] 2차전 브라질전에서 짧은 코너킥 상황에 볼을 빼앗겨 브라질의 역습을 만들어주었고 결국 득점으로 이어지며 실점의 원흉이 된다. 결국 비즐리는 곧 교체되었고 토너먼트의 나머지 기간 동안 출전하지 못한다.

대회가 마무리된 후 소속팀에서 입지는 크게 좁아졌으나 여전히 대표팀의 레귤러 멤버로 활약했고 2010년 5월, 대표팀 감독인 밥 브래들리에 의해 2010 FIFA 월드컵[5] 최종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몰론 알제리와의 2차전 경기가 그의 유일한 출전 경기였다. 이후 2년 반동안 4번의 대표팀 출전에 그친 후 2013년 3월부터 브라질 월드컵 지역예선전에 부름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당해에 열린 CONCACAF 골드컵에서는 주장으로 참가하여 레프트백으로 6경기를 출전, 팀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후 위르겐 클린스만 체제 하에서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고 2014 FIFA 월드컵 최종명단에도 포함되면서 케이시 켈러, 클라우디오 레이나와 함께 4번의 월드컵을 출전한 미국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16강전 벨기에와의 경기를 포함하여 본선 4경기를 모두 뛰며 2연속 토너먼트 진출에 기여했다.(16강 15위)

2014년 12월 15일, 비즐리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으나 클린스만 감독의 요청으로 2015년 골드컵 명단에 포함되었다. 본선에서는 파나마와의 3위 결정전에서 대회 첫 경기를 출전하였으나 승부차기에 마지막 키커로 나서 실축하며 3위 수성에 실패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많은 나이에도 러시아 월드컵 지역예선까지 대표팀에 소집되며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다가 대표팀이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최종전에서 패하며 충격적인 월드컵 본선[6] 진출 실패를 겪자 16년간 입었던 대표팀 유니폼을 내려놓게 됐다.


4. 수상 경력[편집]



4.1. 클럽[편집]







4.2. 국가대표[편집]




4.3. 개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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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무대를 밟은 미국 선수로 기록됐다.[2] 챔스 무대에서 뛰는 두 클럽에서 모두 득점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3] 32개국 본선[4] 월드컵 우승국, 각 대륙 우승국, 개최국이 진출한 8개국 본선 대회[5] 32개국 본선[6] 32개국 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