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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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09년(융희 3년)에 대한협회에서 창간한 신문.
2. 역사[편집]
1907년(융희 원년) 8월에 통감부에서 애국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약 3개월 뒤에 남궁억 등이 대한자강회를 계승을 표방한 대한협회를 세웠다.
대한협회에서는 1908년(융희 2년)부터 월간으로 《대한협회회보》를 발행했다. 그러다 1909년(융희 3년)에 《대한협회회보》를 종간하고 같은 해 6월 2일부터 《대한민보》를 창간하여 발행했다. 《대한협회회보》와는 달리 《대한민보》는 일간이었다. 글은 국한문 혼용체로 썼다. 타블로이드 판 4면마다 1단에 45행 씩 6단을 사용했으나 나중에 7단으로 바꾸었다.
신문의 목표는 민족 단결과 지식 보급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하고, 일진회가 발표한 〈한일병합성명서〉에 대해 비판하는 등 친일단체와 맞서면서 항일운동에 힘썼다.
한국 최초로 시사만평을 게재한 신문이기도 했다. 《대한민보》 창간호에 화가 이도영이 그린 만평이 실렸다. 이는 최초의 만평일 뿐 아니라 만화 그 자체로서도 한국에서 처음이었다. 다만 인쇄를 목판화로 했기 때문에 그림 자체는 흐릿하게 나왔다. 만평은 《대한민보》가 폐간당하기 전까지 계속 게재되었으며 내용은 주로 일제 침략 규탄 및 친일파들을 성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가 세운 통감부의 검열에 자주 걸려 삭제당하기도 부지기수였다. 만평의 위치는 신문 제1면 가운데여서 눈에 확 띄었는데, 검열로 만평을 싣지 못할 때에는 1면 가운데를 아예 새까맣게 먹칠하여 발행했다. 그리고 신문에 연재하는 단편소설에도 그림을 넣었다. 즉, 한국 신문 삽화의 선구자적인 신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910년(융희 4년) 6월에는 연재 소설《금수재판》을 실었는데 이 소설의 내용 역시 반일 풍자적이었다. 같은해 8월 29일에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다음날 8월 30일부터는 '대한(大韓)' 두 글자를 떼고 《민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인해 불과 그 하루 뒤인 8월 31일에 폐간당했다. 마지막 호수는 357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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