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피츠앨런(제10대 아룬델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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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리처드 피츠앨런
Richard FitzAlan
생몰년도
1313년경 ~ 1376년 1월 2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서식스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 서식스 아룬델 성
아버지
에드먼드 피츠앨런
어머니
엘리스 드 워렌
형제자매
에드먼드, 메리, 에이린, 앨리스, 캐서린, 엘레노어, 엘리자베스
아내
이사벨 드 디스펜서, 랭커스터의 엘레노어
자녀
에드먼드, 리처드, 엘레노어, 조앤, 엘리스, , 토머스
직위
아룬델 백작, 서리 백작, 서부 해안 제독, 잉글랜드의 최고 수호자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스코틀랜드 왕국프랑스 왕국을 상대했다.


2. 생애[편집]


잉글랜드 왕국 서식스에서 제9대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과 서리 자작 윌리엄 드 워렌의 딸인 앨리스 드 워렌의 장남이다. 형제자매로 에드먼드[1], 마이클[2], 메리[3], 에이린[4], 엘리스[5], 캐서린[6], 엘리노어[7], 엘리자베스[8]가 있었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결혼했을 때 7살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1313년경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14/1315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인 휴 디스펜서의 장남인 휴 디스펜서의 딸 이사벨과 약혼했으며, 1321년 2월 9일 런던 해버링의 왕실 사유지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는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피츠앨런과 휴 디스펜서간의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7살이었고, 신부 이사벨은 8살이었다. 그러나 1326년, 에드워드 2세는 왕비 프랑스의 이자벨과 이자벨의 애인 로저 모티머의 정변으로 폐위되었다. 아버지 에드먼드 피츠앨런은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그의 재산과 영지는 압류되었다. 그는 수년간 해외를 떠나 있어야 했다.

1330년 10월 로저 모티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정변으로 체포된 뒤 처형된 후, 리처드는 조국으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3세에게 가족의 영지와 직위를 돌려달라고 청원했다. 1331년 2월 8일 의회에서, 에드워드 3세는 리처드를 제3대 아룬델 백작에 선임했으며, 아룬델 성을 포함한 많은 영지를 돌려줬다. 그 대신, 에드워드 3세는 아버지를 체포하고 처형하는 데 기여했던 제1대 셜튼 남작 존 셜튼을 사적으로 죽이면 처형하겠다며 화해를 종용했다. 리처드와 존 셜튼간의 갈등은 이후에도 이어지다가 1343년 존 셜튼이 에드먼드 백작을 기리기 위해 호몬드 수도원을 짓기로 약속하면서 마침내 해결되었다.

리처드는 에드워드 3세와 거의 동갑이었고, 그의 장군이자 고문, 대금업자로서 활약했다. 그는 군 사령관으로서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언제나 동행했다. 1338년 제1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던바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342년 헌딩턴 백작 윌리엄 드 클린턴과 함께 스코틀랜드 국경의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1338년 백년전쟁이 발발한 후 재정난에 시달리는 왕에게 자금 지원을 적극적으로 했으며, 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과 1340년 7월 23일 ~ 9월 25일 투르네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1342년 10월, 리처드는 에드워드 3세와 함께 브르타뉴로 진군했다. 에드워드 3세는 반 공방전을 수행하다가 그에게 반을 계속 포위하게 하고, 본인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대치했다. 그러다가 1343년 1월 19일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이 체결되자, 그는 반 공방전을 중단했다. 1346년 에드워드 3세의 노르망디 원정에 동행했고, 그해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 3개 사단 중 2번째 사단을 맡아 아군의 대승에 일조했다. 이후 1차 칼레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350년 에드워드 3세와 함께 윈첼시 해전에 참여해 프랑스를 돕는 카스티야 함대를 격파했다.

한편, 리처드는 외교 및 행정 방면에서도 활약했다. 1343년 6월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청으로 파견되어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344년 3월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함께 아키텐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어 아키텐에서 정부를 재조직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후 카스티야, 포르투갈, 아라곤 국왕들과의 협상을 맡았으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순례했다. 1350년 아비뇽 특사로 파견되었고, 1353년 칼레로 파견되어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1354년 초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함께 아비뇽으로 재차 파견되어 프랑스 대표단과 평화 협상을 벌였고, 1353년, 1354년, 1357년에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몸값에 관해 스코틀랜드 대표단과 협상했다.

1358년 룩셈부르크 공작 벤첼 1세의 궁정에 사절로 파견되었고, 1359년 8월 칼레에서 프랑스와 협상해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석방하는 데 동의했으며, 1360년 11월 브레티니 평화 협약에 서명했다. 1362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종식하고자 중재를 맡았으며, 1365년 스코틀랜드 왕국과 평화 협상을 주도했다.

리처드는 잉글랜드에서 다양한 고위 직책을 역임했다. 1334년 노스 웨일즈의 판사, 카나번셔의 보안관, 카나본 성주로 임명되었으며, 에드워드 3세의 후계자인 흑태자 에드워드 휘하의 의원을 맡았다. 1338년부터 1340년까지 국왕이 없는 동안 잉글랜드 왕국의 수호자를 맡았으며, 1340년 7월 재무원장 윌리엄 드 라 폴이 재정을 횡령한 혐의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 국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해 12월 에드워드 3세가 갑자기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장관들이 왕을 지원하는 의무를 태만히 한 혐의를 조사했다. 1340년 서부 제독을 맡았으며, 1345년부터 1347년까지 서부 해안 제독을 재차 맡았다. 1355년 7월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를 떠나는 동안 왕국의 섭정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

이렇듯 에드워드 3세를 위해 여러 임무를 수행한 리처드는 풍부한 보상을 받았다. 1336년 에드워드 3세로부터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세습권을 부여받았으며, 북 웨일스 수입 1,000마르크를 연간 지급받을 권리를 받았다. 1338년 서식스에서 자신에게 속한 수백 장의 영장과 보안관 토너먼트를 회수하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1345년에는 슈롭셔의 보안관으로 임명되었다. 1347년 삼촌인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사망한 후 그의 재산 대부분을 상속받을 권리를 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는 존 드 워렌의 미망인인 조앤 드 바르가 남편의 영지에 그대로 사는 것을 허용하는 대가로 900 파운드의 임대료를 받았다. 1361년 조앤 드 바르가 사망한 뒤 서리 백작의 칭호를 받았다. 또한 1365년에 흑태자 에드워드로부터 채스터의 토지 임대료로 400파운드를 받았다.

그는 대대로 축적한 재산에 왕실의 이같은 지원에 힘입어 막강한 부를 누렸고, 왕실에 돈을 지원했다. 1370년 한 해에만 2만 파운드를 빌려줬다고 하며, 그가 1338년부터 1374년까지 왕실에 빌려준 금액은 총합 7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흑태자 에드워드와 에드워드 3세의 3남 곤트의 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지가 있는 서식스와 쇼프셔에 있는 개인 및 신디케이트에게 대출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그의 재산은 언제나 부유해, 1376년 사망했을 무렵 현금만 6만 파운드에 달했고, 그 중 절반은 아룬델 성의 높은 탑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그의 수입은 서식스와 쇼프셔의 대규모 영지에서 생산된 양모를 해외에 판매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1376년 1월 24일 아룬델 성에서 사망했고, 아내 랭커스터의 엘레노어가 묻혀 있던 루이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장남 리처드 피츠앨런이 아버지의 직위와 영지를 계승했다.


3. 가족[편집]


  • 이사벨 르 디스펜서(1312 ~ 1375년 이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인 휴 디스펜서의 장남 휴 디스펜서 영거의 딸. 1344년, 리처드는 최근 미망인이 된 에드워드 3세의 가까운 친척인 랭커스터의 엘리노어를 아내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교황청에 자신이 결혼에 동의한 적이 없으며, 사춘기 때 이사벨과 함께 결혼 서약을 포기했지만, 어서 결합하라는 주위의 강요에 의해 아들이 태어나 버렸다며 결혼 무효를 선고해 달라고 청했고, 에드워드 3세 역시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그해 12월 이사벨과 리처드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했다. 이사벨은 보상으로 에섹스의 5개 영지를 받았다.
    • 에드먼드 드 아룬델(1329 ~ 1381/1382): 본래 아버지의 영지를 계승받을 후계자였지만, 1344년 12월 리처드와 이사벨의 결혼이 무효로 처리되면서 졸지에 사생아로 격하되었다. 1352년 23세에 기사 작위를 받은 뒤 퐁발랭 전투를 포함한 프랑스에서 벌어진 여러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137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이복형제 리처드의 백작위 계승 및 토지 소유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1377년 런던 타워에 투옥되기도 했으나 처남 존 드 몬타구의 중재로 풀려났다. 이후에도 아룬델 백작위 및 영지 계승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381년 가스코뉴로 파견된 잉글랜드군에 관여했다가 1381년 또는 1832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세 딸 엘리자베스(또는 앨리스), 필리파, 캐서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룬델 백작위를 요구했다.
  • 랭커스터의 엘레노어(1318 ~ 1372): 랭커스터 3대 백작 헨리의 딸.
    • 리처드 피츠앨런(1346 ~ 1397): 제11대 아룬델 백작.
    • 존 피츠앨런(1348 ~ 1379): 초대 아룬델 남작, 영국 원수, 해군 제독.
    • 토머스 아룬델(1353 ~ 1414): 캔터베리 대주교.
    • 조앤 피츠앨런(1347 ~ 1419): 제7대 헤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의 부인.
    • 앨리스 피츠앨런(1350 ~ 1416): 리처드 2세의 이부 형제인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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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1349, 이름만 언급됨[2] ? ~ ?, 이름만 언급됨[3] ? ~ 1396, 블랙미어의 4대 스트레인지 남작 존 르 스트레인지의 부인[4] ? ~ 1386, 노킨의 스트레인지 남작 로저 르 스트레인지의 부인[5] ? ~ 1326, 헤리퍼드 백작 존 드 보훈의 부인[6] ? ~ 1375/1376, 제2대 허시 남작 헨리 허시와 초혼, 기사 앤드류 피브렐과 재혼[7] ? ~ ?, 제1대 리슬 자작 제러드 드 리슬의 부인[8] ? ~ ?, 제4대 라티메르 남작 윌리엄 라티메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