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하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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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의 부군으로, 율리아나 여왕의 아버지이자, 베아트릭스 여왕의 외할아버지이다.
2. 생애[편집]
1876년 4월 19일, 하인리히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의 마리 공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들 중에서 이복 형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는 니콜라이 1세의 손녀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고[1] , 또 다른 이복 누나 마리는 알렉산드르 2세의 삼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예비치 대공과 결혼했다. 누나 올덴부르크 대공비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리네는 훗날 니콜라우스 폰 올덴부르크의 어머니가 된다.
1883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가 세상을 떠나자 하인리히는 드레스덴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학교를 졸업한 후 그리스, 영국령 인도, 실론을 여행하여 지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후 군 경력을 쌓으면서 포츠담 전투기 경비 대대 중위 직급을 얻었다.
1901년 2월 6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빌헬미나 여왕과 결혼했다.[2] 하인리히는 네덜란드식 이름 헨드릭으로 개명하여 국서가 되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의 관계는 성격 차이로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엄격하고 충실한 빌헬미나 여왕과 달리 헨드릭은 소박한 유머를 지닌 선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헨드릭은 결혼 기간 동안 연간 총액 10만 길더를 받았는데, 네덜란드 정부 재무부로부터 어떠한 수당도 받지 못했다.[3] 또한 부분적으로 돈의 원천을 이용하려는 시도로 인해 연루된 스캔들은 결혼 생활을 악화시켰다.
3. 말년[편집]
말년에 헨드릭 공은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류머티즘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뚱뚱해졌고, 1929년에 처음으로 심장마비를 겪었다. 하지만 1934년 6월 28일에 두 번째 심장마비가 이어졌고, 7월 2일에 매우 가벼운 심낭염을 앓고 있다고 발표되었는데 법원에 따르면 이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다음날 7월 3일 오후 2시 30분에 그의 건강은 갑자기 악화되었고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아내 빌헬미나 여왕과 외동딸 율리아나 왕세녀가 거기에 없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4.2. 자녀[편집]
5. 여담[편집]
- 여러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는 소문이 수년 동안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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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녀 알렉산드리네는 덴마크의 왕비가 되었고, 차녀 체칠리에는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되었다.[2] 하인리히와 빌헬미나는 7촌 관계였다. 하인리히는 파벨 1세의 차녀 옐레나 여대공의 증손자였고, 빌헬미나는 옐레나의 여동생 안나 왕비의 친손녀였다.[3] 그의 취미 생활은 새로 설립된 자선 단체에 가장 먼저 돈을 기부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독일에 살고 있는 가난한 가족에게 돈을 제공했다. 1918년 11월 혁명 이후 연간 약 2만 7,000길더에 달하는 수당이 사라지자 재정 상황은 악화되었고, 아내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부동산을 구입했지만, 여전히 여왕에게 돈을 갚아야 했다.[4] 베아트릭스 여왕 등.[5] 상속 재산 정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종적으로는 46만 4932길더에 달했는데, 헨드릭의 부동산의 플러스 잔액은 30만 4,624 길더에 불과했다. 1940년 1월 19일 법원 판결 이후 15명의 채권자에게 65%가 상환되었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증권이 등장하여 채권자들에게 분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