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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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베아트릭스 여왕의 국서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
Prins Claus van Nederlan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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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독일어
클라우스게오르크 빌헬름 오토 프리드리히 게르트 폰 암스베르크
(Klaus-Georg Wilhelm Otto Friedrich Gerd von Amsberg)
네덜란드어
클라우스 조지 빌럼 오토 프레데릭 게르트
(Claus George Willem Otto Frederik Geert)
출생
1926년 9월 6일
바이마르 공화국 히차커
사망
2002년 10월 6일 (향년 76세)
네덜란드 베일메르메이르
배우자
베아트릭스 여왕 (1966년 결혼)
자녀
빌럼알렉산더르, 요한 프리소, 콘스탄테인
아버지
클라우스 펠릭스 폰 암스베르크
어머니
괴스타 폰 뎀 부셰하덴하우젠 여남작
형제
지그리트, 릭사, 마르기트, 바르바라, 테다, 크리스티나
종교
루터교회네덜란드 개혁교회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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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청년기
2.3. 이후의 삶
3. 가족관계
3.1. 자녀



1. 개요[편집]


네덜란드 여왕 베아트릭스 여왕의 남편으로 빌럼알렉산더르, 요한 프리소 왕자, 콘스탄테인 왕자[1]의 아버지이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탕가니카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몰락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사업을 도우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고등교육도 탕가니카의 독일인 학교를 나왔다.

이후 1930년대 독일로 귀환하였는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독일로 돌아오자마자 히틀러유겐트 활동을 하며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흑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나치가 독일 내의 모든 청소년 단체를 해산시키고 히틀러 소년단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벌어진 일이라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대전이 격화되면서 히틀러유겐트의 주 목표는 예비 전력 및 후방에서 전선에 나간 성인 남성들을 대신하는 근로봉사로 바뀐지 오래였다.

참전 역시 병력이 모자라 후방근로를 하던 청소년 인원들까지 전쟁터에 내몬 것이라 이 경력이 크게 논란거리로 지적받지는 않았다. 그가 장가간 네덜란드는 빼고.

클라우스는 대전말 기갑척탄병으로 징집되어 이탈리아에 주둔하던 90 기갑 척탄병 사단에서 복무했으나 전투 중 미국에 항복하면서 포로가 되었다. 이후 단순 가담자로 분류되어 석방된 후에는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


2.2. 청년기[편집]


대학을 졸업하고 법률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클라우스는 독일 외교부의 외교관 공채에 합격해 도미니카 공화국, 코트디부아르에서 근무하면서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62년 베아트릭스 공주를 만나면서 인생이 뒤바뀌게 되었는데 만남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1965년 이 사실이 파파라치에 의해 까발려지면서 네덜란드 사회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클라우스가 공주와의 연애를 발표함과 동시에 독일 외교부를 퇴직하고 네덜란드 시민권을 취득했지만 네덜란드의 주된 여론은 "사귀는건 좋은데 왜 하필 독일놈이냐?"는 내용이었다. 2차세계대전을 겪은 지 20여년밖에 되지 않았고 전쟁 세대 당사자들이 훤히 눈 뜨고 살아 사회의 중추를 담당했던 60년대였으니 시민들이 분노한 건 당연했다.

당시 시민들이 얼마나 분노했나면 결혼 마차에 돌멩이와 죽은 닭을 던지며 클라우스 꺼져라(Claus, 'raus), 독일의 점령지 수탈을 비꼬는 내 자전거 내놔라(Mijn fiets terug)라고 소리치고 일부 좌파단체는 연막탄까지 터뜨렸다. 오죽했으면 네덜란드 경찰 8천명이 증원되어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경비를 섰을까.

이런 여론은 쭉 이어지다 베아트릭스 공주가 빌럼 알렉산더르를 낳으며 겨우 진화되었다.

이후 클라우스는 학술단체나 네덜란드 공공기관의 명예직을 맡으며 줄곧 얼굴마담 역할을 이어나갔다.[2]


2.3. 이후의 삶[편집]


1980년 아내 베아트릭스가 여왕에 즉위한 이후로는 여왕을 대리해 해외를 순방하고, 각종 학술단체 또는 자선단체의 후원자를 맡는 등 여느 국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에서의 얼굴 마담 역할을 했다.

말년의 클라우스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과거 전력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자신이 어떤 짓을 해도 국민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으로 깊게 남았다는 주장이 있다.

네덜란드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가장 인기있는 왕실 구성원을 꼽는 여론조사에서 클라우스가 늘 1위를 차지했지만 우울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후 전립선암파킨슨병이 겹치면서 2002년 클라우스는 76세를 일기로 장인 베른하르트 공과 장모 율리아나 여왕보다 앞서 눈을 감았다.


3. 가족관계[편집]



3.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빌럼알렉산더르
(Willem-Alexander)
1967년 4월 27일

막시마 소레기에타 세루티
슬하 3녀[3]
2남
오라녀나사우의 프리소 공자[4]
(Prince Friso of Orange-Nassau)
1968년 9월 25일
2013년 8월 12일
마벨 비서 스밋
슬하 2녀
3남
콘스탄테인 왕자
(Prince Constantijn)
1969년 10월 11일

페트라 라우렌틴 브링크호르스트
슬하 1남 2녀

슬하에 딸 없이 삼 형제를 두어 네덜란드에서 123년만에 국왕을 탄생하게 했지만, 국왕인 장남은 딸 셋이라 다시 여왕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다. 이 외에 일찍 죽은 둘째는 딸 둘이며, 그나마 삼 형제 중 일찍 결혼한 막내는 1남 2녀를 두었다. 네덜란드 왕위가 아들, 딸 구분 없이 장자 상속제로 바뀌긴 했지만, 부분적으로 살리카법이 아직 있다면 가문의 수장은 막내 아들 쪽으로 갈 확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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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콘스탄테인의 장녀 엘로이즈는 클라우스가 생전에 본 첫 손주이자, 유일한 손녀이기도 하다.[2] 이때 취재진에게 "제 임무는 누구보다 멋지게 테이프커팅을 하는 일이죠"라고 농담을 던졌다고.[3] 오라녀 여공 카타리나아말리아[4] 2004년에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결혼을 해 네덜란드의 왕자라는 직함과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