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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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世
1935년 음력 8월 28일[1] ~ (88세)

1. 개요
2. 생애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직 언론인, 기업인이다. 본관은 창원(昌原)[2], 자는 명유(鳴有), 아호는 월송(月松), 현암(玄岩).


2. 생애[편집]


1935년 음력 8월 28일 경기도 장단군 진남면(現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112번지에서 아버지 박교준(朴敎駿, ? ~ 1959. 4)과 어머니 임강 이씨(臨江 李氏) 이금순(李金順)[3]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박종국(朴鍾國), 박종억(朴鍾億), 박종원(朴鍾元) 등 형 3명과 아래로 박정순(朴丁順), 박경순(朴庚順) 등 여동생 2명과 막내 남동생 박종방(朴鍾邦, 1945 ~ 1950)이 있었다.

아버지 박교준[4]은 일찍이 조부 박항묵(朴恒默)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임진강에 철교를 놓기 위해 장단군에 파견와있던 일본인 측량기사들을 찾아가 일본어와 측량기술을 배웠다. 이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탁지부에서 임시재원조사국 양지과 기수(臨時財源調査局量地課技手), 임시재산정리국 측량과 기수(臨時財産整理局測量課技手) 겸 재무서 한성재무감독국 임시국유지조사소장 기수(財務署漢城財務監督局臨時國有地調査所場技手) 등으로 근무했고, 경술국치 후에는 조선총독부 직속 임시토지조사국에서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측량과 기수, 1914년부터 1915년까지 기술과 기수,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측지과 기수 등으로 근무했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함경남도청 내무부 토목과에서 토목기수로 근무했고[5],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강계영림서에서 삼림주사로 근무했다.[6] 8.15 광복을 전후해 개성세무서에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말년에는 도라산리 이장을 지냈다.

출생 이후 연천군 전곡면에 잠시 살기도 했으며, 이후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219-3번지에 본적을 두었다. 1948년 2월 장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경복중학교에 입학했고, 3학년 되던 1950년 6.25 전쟁을 맞기도 했다. 경복중학교 졸업 후 경복고등학교(30회)에 입학해 1955년 2월 졸업했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7] 교육학과(55학번)에 입학해 1959년 2월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56년 12월, 한국방송공사의 전신 서울중앙방송국에 입사하여 아나운서로 근무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8].

1964년 4월 서울중앙방송국을 퇴사하고, 동양방송이 개국하자 같은 해 7월 동양방송으로 이직해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에서 아나운서 실장(부장급), 방송위원(부국장), 방송주간(국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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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 31일 내가 본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땡전뉴스성 방송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언론통폐합으로 동양방송 고별방송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를 진행했고, 1980년 12월 다시 한국방송공사로 자리를 옮겨 1981년 11월까지 1년간 방송위원실 주간을 맡았다.

이후 해태기획 대표이사에 취임했고, 1983년 7월 1일 주식회사 KORAD[9]로 상호를 바꾼 뒤 1994년 12월까지 대표이사 사장 및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1982년 초대 해태 타이거즈 단장을 지냈다.

1987년 8월에는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 전공으로 행정학 석사 학위[10]를 취득했다. 1995년 1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광고회사인 아시아컴 회장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제13대 경복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

그 밖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대한역도연맹 부회장, 청운로터리클럽 회장, 한국게이트볼협회 수석부회장, 형애장학회 이사, 삼육재활원 이사,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이사,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이사, 세방학원 이사, 교육방송 시청자위원회 부위원장, 농민신문 편집위원, 이북5도청 행정자문위원, 장단군민회 고문, 미수복 경기도중앙회 부회장, 경기도민회 부회장, 경기도 장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3. 관련 문서[편집]


[줌업] '영원한 현역' 박종세(朴鍾世) 아나운서의 방송과 야구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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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력 9월 25일. #[2] #. 병마사공파(兵馬使公派)-장단파(長湍派) 종중 21세 종(鍾) 항렬.[3] 개성시 출신으로, 2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4] 조모는 해주 오씨이고 아버지는 이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작은아버지 박교덕(朴敎德)이 있었다.[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4대 국방부장관이 되는 신태영과 친했다고 하는데, 이후 박종세 또한 신태영의 장남 신응균과 친분을 이어나가게 된다.[6] 당시 압록강 뗏목 도둑을 단속하는 일도 맡았는데, 뗏목 도둑이 주로 중국인 또는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잡혀 온 뗏목 도둑의 우두머리가 똑똑하고 잘생긴 한국인인지라, 고민 끝에 몰래 빼내어 방면해주었다. 이후 6.25 전쟁 때 다른 가족들을 서울특별시로 피난 보내고,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한 조모와 장단군 본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별안간 조선인민군 대좌 한 사람이 사병 몇을 데리고 나타나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찾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대좌는 과거 강계군에서 잡혔다가 풀려났던 그 뗏목 도둑의 우두머리였고, 당시 아버지께 은혜를 입고 매우 감사히 여겨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장단군이 고향인 아무개씨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전쟁이 일어나 남하하던 길에 장단군을 지나며 이곳에 들르게 되었다면서, 쌀과 북어, 미역을 주며 다시 출전했다고.#[7] 12회 출신이라고 한다. 김종필은 2회 출신.[8] 그는 당직근무 중이었는데 총소리가 나자 책상 밑에 숨어있다가 방송국에 진입한 쿠데타군에게 발견되어 혁명공약을 방송으로 낭독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는 진입한 군의 실체에 대해 몰랐기에 망설였지만, 박정희에게서 혁명의 취지를 이야기 듣고는 적어도 그들이 북한군은 아님을 알고는 방송에서 혁명공약을 읽어나갔다고 한다[9] 한국원자력환경공단과는 별개의 단체이다.[10] 석사 학위 논문 : 한국 방송광고의 규제에 관한 연구(198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