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르날리아(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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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원과 변화
3. 종교 의례
4. 축제
5. 후대의 영향


1. 개요[편집]



Saturnalia

매년 12월 17일에 개최되어 12월 23일까지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를 기리기 위해 일주일간 진행된 고대 로마축제. 로마 농신제(農神祭)로도 일컬어지는 이 축제는 고대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명절로 손꼽혔다.


2. 기원과 변화[편집]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인간이 별다른 죄악을 저지르지 않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노동 없이 대지에서 자라나는 열매와 곡식을 즐긴 시대인 '황금시대'에 세계를 다스리면서 인류에게 중요한 농업 기술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며, 대다수의 시민이 농민이었던 로마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신으로 간주되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사투르누스가 로마가 건국되기 이전에 토착 이탈리아인들의 왕이었으며, 누구도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모든 이가 동등하게 대우받으며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모두에게 공유되게 했다고 주장했다. 사투르날리아는 이렇듯 인간에게 많은 것을 베푼 사투르누스 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가 실시했던 정책을 현세에서 일시적이나마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고대 로마 초창기에는 특정한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고, 단지 '모든 농작물을 수확한 날'에 하룻동안 거행되었으며, 오로지 사투르누스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제사만 치러졌기에 매우 엄숙하고 경건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2월 17일이 사투르날리아 축제 시작일로 정해졌다. 12월 17일은 점성학에서 사투르누스 신의 이름을 딴 행성인 토성염소자리와 처음 접촉하는 날로 간주되었다. 이 날짜가 언제 정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로마 전승에는 로물루스누마 폼필리우스가 제정했다고 전해지나,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497년 로마의 마지막 국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건설했다고 전해지는 사투르누스 신전이 봉헌된 것을 기념한 날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러다가 로마 공화국 후기에 이르러 하루에서 일주일로 확대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사흘로 줄였고 칼리굴라는 5일로 정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규제에 신경쓰지 않고 일주일 동안 축제를 즐겼다. 또한 본래 사투르누스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제사만 치러졌기에 매우 엄숙하고 경건했지만, 로마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지중해 전역에 세력을 뻗치면서 고대 그리스 문화가 로마에 대거 유입되면서 사투르날리아 행사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농경의 신 크로노스가 로마의 신 사투르누스와 동일한 신으로 간주되면서, 사투르날리아 행사 역시 크로노스 제의를 따라갔다. 대 카토는 이러한 현상을 못마땅하게 여겨 고대의 엄숙하고 경건했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다. 여기에 행사를 주관하는 조영관들이 향후 고위 행정관 선거에 출마했을 때 시민들이 자신을 선택하게 하려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여기고 시민들에게 각종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규모를 가능한 한 확장하면서, 사투르날리아 축제는 기존의 경건한 종교 의례에서 문자 그대로의 '축제'로 탈바꿈했다.


3. 종교 의례[편집]


매년 12월 17일, 로마인들은 사투르누스 신전 앞 광장에 집결했다. 이때 귀족, 평민, 노예 등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이가 신전에 모이는 것이 권장되었고, 모두가 평소에 입던 토가 대신 투니가를 입고 머리에는 해방노예가 전통적으로 쓰는 필레우스 모자를 써야 했다. 이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필두로 베일로 머리를 가린 사제들이 릭토르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많은 황소를 제단 앞으로 끌고 간 뒤, 사투르누스의 동상 발에 묶인 양털을 풀고 희생제를 거행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사투르누스 사원에 있는 사투르누스의 동상은 옆으로 누운 상태였고 속은 올리브 기름으로 채워졌으며 발은 양털로 묶여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 관련 이야기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크로노스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 자신을 해치고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아내 레아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삼켰다. 이에 레아는 제우스를 낳은 뒤 다른 곳에 숨겨두고 돌을 강보에 싸서 모습을 감춘 뒤 크로노스가 그 돌을 아기라 착각하고 삼키도록 유도했다. 그 후 성장한 제우스는 크로노스를 제압하고 크로노스가 삼켰던 형제 자매들을 구출했다. 이때 자신 대신 삼켜졌던 돌을 델포이 신전에 세우고 끊임없이 기름을 바르고 그 위에 양모 가닥을 놓았다고 한다. 사투르누스 동상의 발에 묶인 양털을 푼 행위는 농경을 주관하는 업무에 얶매인 신이 일시적이나마 해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제가 끝난 뒤, 사투르누스의 흉상은 부드러운 쿠션이 깔린 호화로운 소파 위에 눕혀졌다. 이는 갓 태어난 신생아들이 소파에 눕혀지는 것을 흉내낸 것으로, 사투르누스 신이 새롭게 거듭나서 로마인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 또한 사투르누스의 배우자인 루아(Lua) 여신을 기리기 위해 전쟁에서 죽은 적의 무기를 한 곳에 모아놓고 불태웠다. 희생제가 치러지는 동안 어떤 형태의 일도 해서는 안 됐다. 모든 학교는 문을 닫았고 원로원과 법원 역시 열리지 않았으며, 전쟁을 벌이는 것 역시 금지되었다. 다만 사투르누스와 루아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검투사 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들은 사투르누스 신전에서의 종교 의례가 끝난 후에도 각자의 집에서 돼지를 희생동물로 삼은 희생제를 드렸다.


4. 축제[편집]


사투르누스 신전에서의 종교 의례가 마무리된 뒤, 시민들은 본격적으로 축제를 시작했다. 그들은 한 해 동안 수확한 모든 농작물로 차린 풍요로운 식사를 즐겼다. 이때 모든 이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투르누스 시대를 본따 '신분의 역전'을 허용했다. 아이는 축제 기간 동안 부모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고, 아내는 남편에게 집안일을 시킬 수 있었다. 또한 노예들은 주인의 연회에 동석했다. 1세기의 로마 정치가이자 철학자 세네카에 따르면, 주인과 노예가 한 자리에서 어깨를 나란히하며 식사했다고 한다. 반면 5세기 초의 로마 학자 미크로비우스의 <사투르날리아>에 따르면, 주인들이 노예를 위해 음식을 차린 뒤 노예들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자신을 위한 식사를 다시 차렸다고 한다. 그리고 노예들은 주인을 대놓고 비꼬거나 조롱할 수 있었으며, 주인들이 이를 처벌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평소 가정에 얽매여 지내야 했던 여자들 역시 이 축제 만큼은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남자들과 어울렸고, 여성 무용수들은 모든 남성 모임에 참석했다. 또한 국법에 의해 엄하게 금지되거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규탄받던 도박과 주사위 놀이는 사투르날리아 축제 기간 만큼은 허용되었다. 단, 동전과 견과류 만을 판돈으로 걸 수 있었다. 로마 서예가이자 삽화가인 필로카우루스는 <354년 달력>에서 사투르날리아가 열리는 날에 주사위가 있는 테이블과 모피 옷을 입은 남자를 그린 뒤 다음 문구를 옆에 적었다.

"노예여, 이제 주인과 겨룰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소."


사투르날리아 축제 기간 동안 조직된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사투르날리키우스 프린켑스(Saturnalicius princeps: 사투르날리아의 통치자)를 추첨으로 선출했다. 주로 신분이 비천한 노예나 어린 아이 등 집안의 하급자가 이 역할에 뽑혔다. 이들은 '신민'들에게 "춤을 춰라", "노래를 불러라", "차가운 물에 빠져라" 등 장난기가 가미된 명령을 내렸고, 그를 선출한 이들은 기꺼이 모든 명령에 복종했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에 대해 "12월의 자유"라고 칭했다.

대다수 로마인들은 이런 상황을 유쾌하게 즐겼지만, 일부 인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사모사타의 루키아누스는 이 시기에 진지하게 일할 기회가 박탈당한 것에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나는 심각하고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단지 술을 마시고, 떠들고, 농담하고,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잔치 왕을 선출하고, 노예를 즐겁게 하고, 알몸으로 노래하고 차가운 우물에 빠져야 한다."


세네카는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평소 방식대로 저녁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으며, 소 플리니우스는 <서한집(Epistulae)>에서 자신이 라우렌툼의 한적한 별장에서 지내면서 느낀 행복을 나열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특히 집 바깥이 축제 분위기의 외침으로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사투르날리아 기간 동안, 나는 여기에 지내면서 사람들의 게임에 방해를 주지 않고, 그들은 내 일이나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사투르날리아 축제 기간인 12월 19일은 선물을 주는 날이었다. 가치 있는 선물은 모든 이의 평등을 강조한 사투르누스의 정신에 반하여 사회적 지위를 상징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날에 주는 선물은 큰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다. 마르티알리스는 이쑤시개, 빗, 숟가락, 공, 볼품 없는 조각상, 모자 등 지금까지 건네받은 선물 목록을 나열하면서, 가치가 낮은 선물은 서로간의 우정이 두텁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받은 선물 중에는 "역대 최악의 시인"의 나쁜 시집도 있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장난성 선물을 측근들에게 건네고 그들이 당황하는 것을 즐길 정도로 이 날을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사투르날리아 축제 기간 동안, 로마 시내 거리엔 불 피운 양초가 잔뜩 세워져서 한밤중에도 한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양초를 생명과 빛을 상징한다고 여겼고, 새 생명을 불어넣고 풍부한 수확물이 제배되게 해준 사투르누스를 기리는 것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밤거리를 뛰어다니며 축제 분위기를 즐겼으며, 서로 만날 때마다 "Io, Saturnalia!"라고 외쳤다. 'io'는 라틴어에서 극도의 행복감을 표현하는 감탄사 용어로, "사투르날리아 만세!"라고 의역할 수 있다.


5. 후대의 영향[편집]


로마의 종교 축제들은 로마 시의 특정 장소에 국한되었지만, 사투르날리아는 어디에서나 열릴 수 있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이래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각지에서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열렸으며, 가장 인기있는 축제로 손꼽혔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로마 다신교가 몰락하면서 사투르누스 신에게 경배드리는 축제 역시 공식적으로는 배제되었지만, 사투르날리아와 비슷한 축제는 수 세기 동안 계속 벌어졌다.

일각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사투르날리아를 대체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추정한다. 이 가설의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세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사투르날리아와 비슷한 날짜인 크리스마스를 지낼 때 음주, 도박, 과식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년이 '거룩하고 무고한 이들의 축일'인 12월 28일에 '하루 동안의 주교'로 선출되어 저녁 예배 때까지 임기를 수행했는데, 이는 사투르날리아 축제 때 선출된 사투르날리쿠스 프린켑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12월 19일에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 역시 크리스마스에서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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