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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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눔 전투
영어: Battle of Sentinum
시기
기원전 295년
장소
센티눔[1]
원인
제3차 삼니움 전쟁의 일부
교전 세력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파일:faction_emblem_samnites_256.png 삼니움
파일:faction_emblem_senones_256.png 세노네스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파일:faction_emblem_samnites_256.png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
병력
4개 군단병, 동맹군 20,000명, 캄파니아 기병 1,000명을 포함한 수천 기병대. 총합 38,000명 추정
총합 40,000명 추정
피해
8,700명 전사
25,000명 전사, 8,000명 생포
결과
로마군의 승리
영향
로마 공화국의 제3차 삼니움 전쟁의 승기 확보
1. 개요
2. 배경
3. 전투 경과
4. 결과



1. 개요[편집]



제3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295년, 로마군삼니움-세노네스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로마 공화국이 중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배경[편집]


기원전 296년,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와 전직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삼니움으로 쳐들어가서 여러 마을과 농지를 황폐화시켯다. 이에 삼니움 장군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는 다른 장군들에게 오로지 요새에 틀어박혀 수비에 전념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특별히 차출된 정예병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이동해 로마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제의했다.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이 로마군의 기세를 두려워해 동맹 제의를 거절하자, 에그나티우스는 직접 에트루리아 의회에 참석해 에트루리아와 삼니움이 힘을 합쳐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삼니움 스스로 로마를 이길 수 없지만, 강인한 삼니움인과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에트루리아인이 힘을 합친다면 주변 국가들을 학대하는 호전적인 로마인들을 응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변에 설득된 거의 모든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이 에그나티우스를 지원하기로 했고, 로마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던 움브리아인 역시 그를 돕기로 했다. 에그나티우스는 여기에 더해 켈트인을 설득해 용병으로 끌어들였다.

기원전 296년 말, 삼니움-에트루리아-움브리아인들이 대군을 편성했고 켈트계 종족인 세노네스족까지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는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네 개 종족 연합군과 맞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마인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가장 뛰어난 군사령관으로 인정받고 있던 룰리아누스를 기원전 295년도 집정관에 재선임하고, 이례적으로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낙점했다. 여기에 비올렌스를 집정관에 재선시켜서 룰리아누스와 함께 하도록 했다. 하지만 룰리아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한 동지인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헀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비올렌스의 임페리움을 1년 연장해 삼니움에서 작전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한편, 총독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는 각기 군단을 이끌고 로마와 에트루리아 사이의 국경 지대를 지켰다.

그러나 룰리아누스가 로마에 가 있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카메리눔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이 세노네스족의 습격으로 궤멸되었다.(카메리눔 전투)[2] 룰리아누스는 생존병들을 수습한 뒤 무스의 군단과 합세한 뒤 센티눔에 주둔하고 있는 적군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던 중 적진에서 탈영한 3명의 병사가 룰리아누스를 찾아와서 연합군의 계획을 보고했다. 삼니움족과 세노네스족이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는 동안,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은 로마군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는 동시에 로마 진영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룰리아누스는 그 계획이 실행된다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켄투말루스와 메겔루스에게 전령을 보내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하라고 지시했다. 두 장군이 이에 따르자, 에트루리아인들은 자국의 시민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움브리아인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향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에 대해 "센티눔의 삼니움과 세노네스족의 규모는 로마군과 대등했으며, 전장을 떠난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의 숫자 역시 이와 동등했다. 만약 그들이 떠나지 않았다면, 로마인에게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윽고 센티눔 평원에서 마주친 양군은 언덕에 숙영지를 세우고 대치했다. 삼니움 지휘관 에그나티우스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세노네스족 지휘관은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이 돌아올 때까지 전투를 미루려 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승부를 보고 싶었던 로마군이 기병대를 지속적으로 보내 도발하자, 삼니움과 세노네스족은 당장 전투를 벌이자고 강권했다. 결국 지휘관들은 로마군과 대치한 지 사흘째 되었을 때 언덕에서 내려와 전투 대형을 형성했고, 룰리아누스와 무스의 로마군 역시 전투 대형을 갖췄다. 이리하여 중부 이탈리아의 패권이 걸린 대규모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편집]


전투가 개시되기 전, 세노네스족은 우측에, 삼니움족은 좌측에 배치되었다. 이에 맞서는 로마군에서는 룰리아누스가 우측을, 무스가 좌측을 지휘했다. 이에 따라, 룰리아누스는 삼니움족을 대적하고 무스는 세노네스족과 대적하게 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전투가 개시되기 직전에 산에서 늑대와 늑대에게 쫓기는 암사슴 한 마리가 양 군대의 사이의 평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러다가 암사슴은 세노네스족을 향해 달렸고, 늑대는 로마인들에게 향했다. 세노네스족은 암사슴을 사냥했지만,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레무스 형제에게 젖을 먹인 늑대를 신성시한 로마인들은 늑대에게 길을 열어줬다. 로마 군영 내의 예언자가 이것은 로마군이 승리할 징조라고 선언하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고 한다.

삼니움족과 오랜 세월 전쟁을 벌인 경험이 있던 룰리아누스는 삼니움족이 전투 초반에는 적을 상대로 거세게 몰아붙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장병들에게 자신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방어에 전념하라고 지시했고, 후방에 상당 규모의 보병 및 기병 예비대를 배치했다. 특히 탁월한 승마술을 갖춘 캄파니아 기병 1,000명은 자신과 함께 있게 하면서, 적절한 상황이 왔을 때 그들을 투입하기로 했다. 반면 공격적인 성향이 강했던 무스는 병사들에게 단숨에 적 대형을 파고들어 승부를 내라고 주문했다.

이윽고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이 양쪽에서 울려퍼지자, 양군이 함성을 지르며 진격했다. 룰리아누스의 로마군은 진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전진하다가 매섭게 달려드는 삼니움인들이 휘두르는 검을 방패로 막아내고 수비에 전념했다. 반면 무스의 로마군은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세노네스족을 향해 똑같이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다. 무스는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세노네스 기병을 향해 두 차례 돌격해 거의 압도할 뻔했다. 그러나 세노네스 족의 후방에 배치되었던 전차가 측면으로 이동한 뒤 로마 기병대를 요격하자, 생소한 전차에 겁을 집어먹은 말들이 날뛰면서 로마 기병들은 순식간에 압도되었다. 그들은 사방으로 도주했고, 일부는 보병 대열로 달려들어 전열을 흐트러놓았다.

세노네스족 기병대와 전차들은 로마 기병들을 격파한 기세를 이어가 로마 보병대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다. 무스가 적군을 가능한 한 빨리 압도하기 위해 예비 병력까지 최전선에 보냈기 때문에, 이 공격에 대처할 병력이 없었다. 많은 군단병들이 겁을 먹고 전장을 이탈했고, 세노네스 족은 승기를 잡자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며 적병들을 닥치는 대로 쳐죽였다. 무스는 도주하는 병사들을 수습하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자, 기원전 340년 아버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라틴 전쟁 당시 아군이 무너지려 하자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병사들의 전의를 끌어올려 승리했던 것처럼 자신 역시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신이 로마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를 서원하는 데보티오(Devotio)를 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폰티펙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덴테르를 불러 자신의 뜻을 전한 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외쳤다.

"야누스, 유피테르, 마르스, 퀴리누스, 벨로나, 라레스, 노벤실레스(Novensiles), 인디게테스(Indigetes), 그외의 모든 신들이여! 부디 로마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그들이 승리를 거둬서 널리 번창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로마인의 적들에게 공포와 경악과 죽음을 안겨주소서. 저는 공화국, 로마인, 군단, 동맹군, 그리고 퀴리테스를 위해 적의 군단과 지원군을 나 자신과 함께 조상의 영혼과 대지에 바칩니다. 저는 적의 군기와 깃발과 갑옷을 공포와 도주, 살육과 피, 천상과 지옥의 신들의 진노로 물들게 할 것이며, 제가 이 땅에서 멸망하듯이 갈리아인과 삼니움 역시 이 땅에서 멸망하게 할 것입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로마 군단병들을 뚫고 적군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적진을 향해 말을 몰았다. 얼마 후, 그는 적 병사들에게 에워싸여 살해되었다. 덴테르가 무스가 데보티오를 행했다고 선언하자, 금방이라도 도망치려 했던 병사들은 마음을 다잡고 적군에 대항했고 뿔뿔이 흩어지던 장병들 역시 자기들 때문에 지휘관이 희생되었다는 죄책감과 책임의식을 느끼고 전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여기에 무스의 로마군이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눈치챈 룰리아누스가 일부 예비 병력을 파견했고, 세노네스족은 적의 반격에 주춤하다가 물러나서 전투 대형을 재편성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투가 무르익을 무렵, 그 때까지 쉬지 않고 로마군을 공격하던 삼니움족이 탈진한 기색을 내비쳤다. 룰리아누스는 즉각 휘하 장병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고, 수비만 하면서 체력을 비축한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적을 몰아붙였다. 여기에 룰리아누스의 예비군이 추가로 최전선에 투입되어 삼니움군의 대열을 뚫기 시작하자, 삼니움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다. 룰리아누스는 다른 병사들은 도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하게 하면서도 일부 병력에게 방향을 틀어 삼니움인들이 도주하면서 측면이 비게 된 세노네스족을 공격하게 했다. 여기에 지금까지 자신 주변에 있던 캄파니아 기병 1,000명에게 전장을 돌아가서 세노네스족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세노네스 족은 테스투도를 형성하며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로마군 앞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로마군은 도주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적진을 함락했다. 그 후 동료 집정관 무스가 데보티오를 행하다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것을 알게 된 룰리아누스는 시신을 로마에 보내 이 사실을 알렸고, 일부 전리품을 불태우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4. 결과[편집]


삼니움-세노네스 연합군은 센티눔 전투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25,000명이 전사하고 8,000명이 생포되었으며, 삼니움 지휘관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 역시 전사했다. 반면 로마군은 8,700명이 전사했는데, 룰리아누스의 군대에선 1,700명만 전사했지만 무스의 군대에선 7,000명이 전사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5,000명의 삼니움인들은 피센테스족의 영역을 통해 본국으로 돌아가려다가 현지인들의 공격을 받고 1,000명이 전사했다.

이후 룰리아누스는 페루시아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3,000명을 죽인 뒤 로마로 귀환했다. 한편 센티눔을 떠나 본국을 지키려 했던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들은 켄투말루스와 메겔루스에게 패배해 수천 명을 잃었다. 또한 무스를 대신해 새 지휘관으로 부임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는 삼니움 전선으로 내려간 뒤 비올렌스와 함께 리리스 강 유역을 침공한 삼니움인들을 상대로 카푸아 인근의 칼라티아에서 격파해 수천 명을 사살하고 많은 병사들을 생포했다.

로마에 대항해 삼니움과 동맹을 맺었던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세노네스족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장에서 이탈했고, 삼니움인들은 이제 홀로 로마의 공세에 직면해야 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5년 더 항전했지만 기원전 290년에 항복했고,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 대부분과 이탈리아 남부 일부의 패권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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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이탈리아 마르케 주 사소페라토 인근[2] 리비우스의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카메리눔의 식량 채집원들이 움브리아족의 습격을 받아 패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