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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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제6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노리
足利義敎

파일:아시카가 요시노리2.jpg
생몰년도
1394년 ~ 1441년
재임기간
제6대 정이대장군
1428년 ~ 1441년

1. 개요
2. 생애
2.1. 어릴 적
2.2. 쇼군 취임 전야
2.3. 제비뽑기 쇼군의 탄생
2.4. 막부 권위 강화와 전제 정치
2.5. 최후



1. 개요[편집]


足利義敎. 무로마치 막부의 6대 쇼군. 사실상 아시카가 가문 최후의 전제 통치자로 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그를 마지막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권력은 있으되 의욕과 능력이 떨어지거나, 의욕과 능력은 있으되 권력이 약했다고 평가받는 쇼군들만이 즉위했기 때문.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3남이자 아시카가 요시모치, 아시카가 요시츠구의 동생이다. 어떻게 보면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마지막 쇼군이었다 볼 수 있다.[1]


2. 생애[편집]



2.1. 어릴 적[편집]


오에이 원년(1394년) 6월 14일,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오에이 10년(1403년), 아시카가 막부 쇼군 가독 상속자 이외의 자식으로서, 관례대로 불문에 들어가 기엔이라는 법명을 받고 쇼렌인(靑蓮院)의 문적이 되었다. 오에이 26년(1419년) 11월에는 153대 천태종 좌주(天台座主)가 되어 '천태종 개벽 이래의 일재(逸材, 아주 뛰어난 인물)'이라 불리며 장래가 촉망되는 승려였다.


2.2. 쇼군 취임 전야[편집]


1423년, 무로마치 막부의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즈에게 쇼군 위를 물려주고 출가했다. 일찍이 선종에 깊이 귀의하고 있던 요시모치는 선승으로서 만년을 보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425년, 과음을 일삼던 요시카즈가 요절한 탓에 요시모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요시카즈 외에 이렇다 할 후사를 보지 못한 요시모치는 부득이 쇼군직을 대행하게 되었지만, 이 체제 역시 오래가지는 못했다.

1428년 1월, 엉덩이에 생긴 종기에 손을 댄 것이 화근이 되어 요시모치가 심한 패혈증 증세에 시달리게 됐기 때문이다. 그의 병세가 나날이 악화되자 막부 수뇌들은 후사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요시모치는 차기 쇼군의 지명을 거부하였다. 쇼군 권력이 유력 슈고 다이묘들의 합의와 지지에 근거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자신이 섣부른 지명을 했다가는 자칫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2.3. 제비뽑기 쇼군의 탄생[편집]


요시모치의 완강한 태도에 부딪힌 막부 수뇌들은 여러 명의 쇼군 후보를 지정하고, 그들에 대해 신의 뜻을 묻기로 결정했다(이러한 결정 방식에 대해서는 요시모치 역시 동의하였다). 즉, 일찍이 출가한 요시모치의 동생 4명을 후보자로 선정한 후,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의 신전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신의 의중을 가늠한다는 것이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제비뽑기는 요시모치의 사망 전에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사망 직후에 공개되었다. 제비뽑기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두 번 모두 기엔(요시노리의 승명)이 뽑히면서 그가 차기 쇼군으로 지명되었다.

한편,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당시 신이란 존재가 일본 사회에서 일종의 사회적 완충재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요시모치는 차기 쇼군의 지명을 거부했는데, 이는 쇼군 가문을 둘러싼 유력 슈고 다이묘들의 무력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누구를 지명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신의에 따른 쇼군 지명은 실로 묘수였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슈고 다이묘들이라 해도 세속의 논리를 넘어선 신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의 중세인들은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사안에 대해서는 기청문(신에 대한 서약문)을 작성하고 신의 뜻을 묻곤 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2.4. 막부 권위 강화와 전제 정치[편집]


신의 뜻에 따라 쇼군으로 지명된 기엔은 곧바로 환속하여 뒤늦은 성인식을 치른 후, 정식으로 쇼군 요시노리가 되었다.

쇼군 취임을 마친 요시노리의 목표는 실추된 막부 권위의 부흥과 쇼군 친정 체제의 부활이었다. 부친 요시미쓰를 시책의 모범으로 삼은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발점으로 쇼초 원년(1428년), 쇼코 덴노 사후의 천황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였다. 고하나조노 덴노가 칙찬(勅撰)한 《신속고금화가집》(新續古今和歌集)은 요시노리가 주청한 것이다. 산보인 만사이를 정치 고문으로 삼아 예의와 소송 수속 등을 요시미쓰 시대의 형식으로 되돌리고, 참가자의 신분과 가문이 정해져 있는 기존의 의결기관(효조슈(評定衆) 등)을 대신하여 쇼군이 스스로 주재하며 참가자를 지명하는 비공식 평정인 고젠사타(御前沙汰)를 협의기관으로 삼아 간레이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요시모치 대에 중단되었던 명과의 감합무역을 재개하여 재정 정책을 손보는 등 막부 권력의 강화에 힘썼다. 또한 신사·사찰 세력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군사적으로도 쇼군 직할의 치안 담당 기관 호코슈(奉公衆)를 정비하는 등 군제 개혁을 감행하여 군사력을 얻었다. 그리고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가 쇼초에서 에이쿄로 연호를 개원한 것을 무시하고 계속 쇼초 연호를 사용하고 가마쿠라 5산의 주지를 멋대로 결정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이를 구실로 가마쿠라 구보 토벌을 시도하였다. 이는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가문(上杉氏)의 반대로 단념하였으나, 대신 오우치 모리하루(大內盛見)에게 규슈 정벌을 명하였다. 모리하루는 전사했으나, 그의 뒤를 이은 조카 오우치 모치요(大內持世)가 야마나 가문(山名氏)의 힘을 빌려 시부카와씨(渋川氏)·쇼니씨(少弐氏)·오토모씨(大友氏)를 격파했다. 요시노리는 그의 심복이 된 모치요를 규슈 단다이에 임명하여 규슈를 쇼군의 영향력하에 두었다.

요시노리는 취임 직후부터 쇼군 권력의 강화에 힘썼고, 간레이의 권한을 축소하고 중국식 전제정치를 추구했다. 시종일관 막부에 반항적인 태도를 취해온 가마쿠라부[2]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여 1439년 이를 멸망시켰으며, 잇키 요시쓰라 등 유력 슈고 다이묘들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요시노리의 위압적인 태도는 일상생활에서도 드러나서, 당시의 기록을 보면 ‘살얼음판’이라는 표현이 종종 눈에 띈다. 말하자면 요시노리는 공포정치를 행했던 셈인데,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은 쇼군이라는 인식도 그 배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그는 자신의 언행은 곧 신의 언행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재단했던 것처럼도 보인다.

조선세종 재위기 였던 1428년 12월 요시노리의 쇼군직 계승을 축하하는 통신사로 박서생(朴瑞生) 등을 파견하였으며 박서생은 다음 해 돌아와 12월 '일본국왕 원의교' 명의의 답서를 조정에 바치고 사행을 통하여 취득한 정보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실록에는 원의교(源義敎)라는 표기로 나온다.[3]


2.5. 최후[편집]


역사상 공포정치가 으레 그렇듯 요시노리의 공포정치도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1441년 요시노리는 슈고 다이묘 아카마쓰 미쓰스케의 저택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막부가 가마쿠라부의 잔당을 궤멸시킨 유키 전투의 승리를 축하한다는 명목이었다. 미쓰스케는 이 자리에서 요시노리를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일찍이 요시노리와 몇 차례 갈등을 겪었던 미쓰스케는 잇키 요시쓰라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는 도중에 미쓰스케가 미리 배치해 둔 무사들이 요시노리를 덮쳤으며, 이에 요시노리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를 '카키츠의 변'이라고 한다. 이후 쇼군직은 요시노리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카츠가 승계하게 된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선 승려였다가 엉겁결에 쇼군이 된다. 이후 설치는 다이묘들을 모조리 때려잡아 기를 꺾고 쇼군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귀족이건 다이묘건 쇼군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은 차례로 제거하는 냉혹한 모습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런 잔혹한 공포정치로도 이미 때는 무리였는지, 결국 대낮에 다이묘의 칼에 맞아죽는 처참하고 비참한 최후를 보여준다. 작중 표현을 보면 -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개 같은 죽음', '개죽음', '쇼군? 웃기는 친구... ㅋㅋㅋ' 등 다소 경멸적으로 표현했지만, 쇼군의 권위에 도전하는 슈고, 쿠보를 토벌하고[4], 감합무역을 재개하는 등의 업적(?)도 있으니, 부당한 폄하라고 할 수도 있으나..... 본인도 그 대처가 좀 심했는지, 그 당시에도 「萬人恐怖」(만인 공포), 「自業自得[5]이란 표현이 나오는 걸 보면....... 특히 '개같은 죽음(犬死)이라는 표현도 먼나라 이웃나라의 일방적인 폄하가 아니라 요시노리의 죽음을 두고 이미 당대 일본 기록에서부터 나온 소리기도 하다. 여러 모로 당대 사람들에게는 폭군의 이미지로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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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38년 ~ 1441년.[2] 간토 지방 통치를 위해 가마쿠라에 설치한 막부의 출장기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동생의 후손들이 대대로 맡았다.[3] 아시카가 쇼군가는 외교문서에서는 본성인 미나모토씨(源氏, 원씨)를 사용했다. 이는 후대의 도쿠가와 쇼군가도 동일하다.[4] 사실 쇼군인 자신을 그렇게 우습게 보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쇼군으로서 자질부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요시노리의 부친인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무로마치 시대 뿐만 아니라 일본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권력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이를 보고 자랐을 요시노리 입장에서는 실추된 쇼군의 권위에 문제의식을 강하게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5] 카키츠의 변에서 살해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