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나스 스녜츠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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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집권 전
2.2. 소련으로의 매국 행각
2.3. 매국 후의 만행
3. 기타



1. 개요[편집]


파일:스녜츠쿠스.jpg

이 괴물이 권력에서 손을 놓을 때까지 나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스녜츠쿠스의 친어머니 마리야 스녜츠카(Marija Sniečka , 1863~1948)가 망명 중에 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 #


Antanas Sniečkus, 1903.1.7 ~ 1974.1.22 (향년 71세)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지도자, 독재자. 1940년부터 1974년까지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했다.

인지도는 매우 낮지만 악행의 질로 보면 이완용, 비드쿤 크비슬링도 능가하는 사상 최악의 매국노다. 다만 집권 후반에는 소련 중앙정부의 시책에 맞추어서 억압을 완화하고 리투아니아의 경제를 발전시키기도 한 양면적인 면모의 인물이기도 하며 면밀히 보면 식민 국가의 체제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기만 하면 어떤 인물이 나오는지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1]


2. 일생[편집]



2.1. 집권 전[편집]


1903년 1월 7일 리투아니아의 사키아이 근처의 부블레리아이에서 부유한 농부의 7남매 중 아들로 태어났는데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로 피난한 그의 가족들은 러시아 혁명을 현장에서 목격했고 이는 스녜츠쿠스의 사상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녜츠쿠스 일가는 1919년 고국으로 돌아왔고 1920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가 같은 해에 반정부 활동이 들통나 수감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후 1921년 가족을 두고 러시아 스몰렌스크로 도망쳐 소련에 반대하는 농민들을 진압하는 특수부대에 참여했으며 코민테른의 대리인이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리투아니아인 공산주의자들의 신뢰를 얻은 스녜츠쿠스는 20세 남짓의 젊은 나이에 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26년 고국에서 사형당한 카롤리스 포젤라(Karolis Požela, 1896~1926)를 포함한 4명의 공산주의자들을 대신해 (불법인) 리투아니아 공산주의 조직의 핵심을 강화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고국으로 보내졌다.

고국으로 보내진 스녜츠쿠스는 1927년 17세의 유대인 소녀 미라 보르도나이트[2]와 처음 만났다. 이후 '파괴적인 행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30년 카우나스 감옥에 수감되었고 1933년 소련에 수감된 리투아니아인 정치범과 교환되어 석방된 후 1936년 리투아니아로 돌아와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제1비서로 임명되었으며[3] 미라와 결혼해 아들 1명과 딸 1명을 낳았으나[4] 1939년에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또다시 수감되었다.


2.2. 소련으로의 매국 행각[편집]


1940년 6월 15일 소련이 자신들의 최후 통첩을 받아들이지 않은 리투아니아를 침공, 점령하자 스녜츠쿠스는 6월 18일에 감옥에서 풀려난 후 국가안보부 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스녜츠쿠스는 블라디미르 데카노조프[5]의 명령을 하달하며 고국을 소련에 합병시키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스녜츠쿠스는 1940년 7월 7일 '반국가 정당 및 기타 주요 구조 청산의 준비 작업 및 실질적 청산' 계획을 승인하여 리투아니아의 수많은 저명 인사들을 체포, 고문하게 하여 7월 14일에 치러질 소련 당국에 의해 새로 설립된 꼭두각시 의회 인민의 세이마스(People's Seimas)의 선거 운동 과정에서 공포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 도움을 줬고 공산당 소속 후보자만이 출마한 투표는 99.2%의 찬성으로 가결된 후 8월 3일 소련이 리투아니아 결의안을 승인하면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14번째 국가, 다시 말해 소비에트 연방 산하의 공화국으로 전락했으며 스녜츠쿠스는 고국을 소련에 팔아넘긴 대가로 1940년 8월 15일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독립 이후 리투아니아는 '인민의 세이마스'의 행동과 합병의 전체 과정이 리투아니아법과 국제법을 모두 위반했으며 안타나스 스메토나[6]가 결코 스스로 사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직 박탈로부터 소련 합병으로 이어지는 모든 후속 조치가 불법이자 위헌이므로 사실상 무효라고 주장한다.[7]


2.3. 매국 후의 만행[편집]


스녜츠쿠스는 집권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41년 6월 14일~19일 1만~1만 7천 명의 동포들을 추방하는 일을 주도했는데 정확히는 남성은 굴라크로 끌려갔고 여성과 어린이들은 시베리아의 오지로 추방되어 가족을 해체시켰으며 사망률도 60%에 달했고 심지어 강제 이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스녜츠쿠스의 친척[8]과 그 가족들도 있었다. 스녜츠쿠스의 형제자매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이들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으나 스녜츠쿠스는 뻔뻔하게도 이들은 '쓰레기'에 불과하며 그들이 더 '유용하게' 일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 그럼에도 스녜츠쿠스는 1941년의 행각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이런 무자비한 폭정에 질린 리투아니아 국민들은 또다시 고국을 침공한 독일해방자로 여기고[9] 친위대에 가입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는데 당시 리투아니아에 있었던 유대인 중 고작 3~4%만 살아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1948년~1952년에는 농민들을 강제로 집단농장에 밀어넣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면서 농업 생산력을 대폭 떨어뜨려 유럽 최하위권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리투아니아 농민들의 생활은 '농노보다 열악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녜츠쿠스는 "집단화의 승리는 리투아니아 국가, 특히 일하는 농민이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라고 자화자찬했다.(#) 다만 1956년 이후에는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오히려 리투아니아를 소련에서 잘사는 지역으로 만들었고 '상점에 고기가 풍부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리투아니아의 경제가 발전하기는 했는데 이는 사후에 리투아니아에서 그의 악행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가려지고 그를 '리투아니아의 구세주'라며 추앙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10]

그리고 1949년 3월 25일~28일 스녜츠쿠스는 또다시 정확히 20,722명을 또다시 시베리아로 보냈다. 추방된 이들 중 충분히 일할 수 있는 건장한 남성은 고작 10%였고 나머지는 여성[11], 어린이, 노인, 장애인이었고 추방된 사람들은 생후 1일밖에 안 된 아기[12]부터 95세 할머니까지 모든 연령대에 걸쳐져 있었다.

1948년 5월 22~24일에는 소련의 국가안보부(MGB)[13] 주도로 '숲의 형제들'이라고 불린 반소 빨치산[14]들과 그들의 가족들, 협조자들을 합해 정확히 49,331명[15][16]을 산림[17], 탄광, 집단농장으로 끌고 갔고 이들은 이동이 엄격히 제한된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탈출 시도는 물론 리투아니아의 민요를 불렀다가 어김없이 굴라크로 끌려갔으며 1951년 가을에는 총 3차례에 걸쳐 1948년 추방의 추방 대상들과 함께 집단농장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한 농민들까지 합해 총 14,950명[18]을 가축 수송차에 싣고는 시베리아로 추방했다. 이 둘은 스녜츠쿠스가 아닌 소련 각료회의에서 승인한 것이긴 하지만[19] 식민지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 자국민의 강제 추방을 눈감아준 것만으로도 스녜츠쿠스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런 악행 속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의 반발이 거세어 구소련권에서 가장 독립운동이 활발한 구성국이 바로 리투아니아였을 정도였으나[20] 스녜츠쿠스는 리투아니아인들의 독립운동을 유혈 진압했으며 지식인과 가톨릭 신자들을 탄압했고 심지어 스탈린 시기에 자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승인하여 리투아니아가 독립했을 적에 출판된 거의 모든 책들이 불살라졌으며 빌뉴스의 삼십자가 성지[21]도 1950년에 철거되었다.[22] 스녜츠쿠스는 자신이 조국을 팔아넘긴 것에 마음이 찔렸는지 '리투아니아의 독립'에 대한 언급을 들으면 '병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렇듯 스녜츠쿠스의 독재가 얼마나 악랄했는지 심지어 본인의 친어머니조차 아들의 만행에 질려서 친구와 친척들에게 "아들이 살아 있지 않기를 바란다"고까지 반복해서 말했을 정도였으며 1944년 자식들[23]과 함께 독일 하나우로 도피하고 상술한 말을 남기면서 아들과 의절했다고 하고 리투아니아 SSR의 권유에도 1948년 1월 27일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않았다.[24]

킬링필드와 홀로코스트,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누온 체아(#), 하인리히 힘러, 도조 히데키와 같은 악인들도 구드룬 힘러도조 유코와 같은 가족들에 의해 두둔받는 것처럼 악인의 가족이 악인을 두둔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먼 친척도 아닌 부모가 집안의 망신거리가 된 자식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정도도 아니라 대놓고 죽길 바란다고 말하고 의절까지 선언했을 정도였으면 스녜츠쿠스가 어느 정도의 악인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스녜츠쿠스는 무려 34년 동안 권좌에 있었다. 스탈린 사후에 소련의 체제가 온건화되고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기에 이를러서까지 이 기조가 지속되자 안타나스 스녜츠쿠스도 시류에 맞추어서 소련 중앙정부의 명령이 리투아니아인들의 이해관계에 거슬린다면 거절하거나 소련 중앙정부에게 사업지원 및 특혜를 요구하여 받아챙기는 등 리투아니아의 이익을 지키는 수호자로 행세하면서 장기집권했다. 우선 스탈린이 격하된 뒤에는 자신이 추방한 지식인, 가톨릭 성직자들의 상당수를 복권하고 리투어니아로 돌려보냈으며 리투아니아어 교육을 활발하게 하여 빌뉴스대학교를 발트해 연구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가톨릭에 대한 탄압은 지속되었고 여행도 제한되어 리투아니아를 비소련 세계에서 크게 고립시켰다.

만 71세 생일 15일 후인 1974년 1월 22일에 사망했는데 스녜츠쿠스는 스탈린 시대, 흐루쇼프 시대, 브레즈네프 시대 모두에서 살아남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유일한 총독이었다고 한다. 스녜츠쿠스는 소련 붕괴와 1991년 리투아니아의 독립 직전까지 계속해서 신격화되었고 심지어 독립으로부터 고작 12년밖에 안 지난 2003년 리투아니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스녜츠쿠스를 기리는 회의가 열리고 그를 추모하는 책도 출판되었을 정도였다.[25] 그만큼 집권 전반기와 후반기 행보가 극명하게 엇갈려서 벌어진 일이다.


3. 기타[편집]


  • 독재자 스녜츠쿠스는 자기 친척까지 죽게 만들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였지만 인간 스녜츠쿠스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활력이 넘치고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났으며 화려함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검소하게 살았고 엄청난 애처가에 리투아니아를 구소련 공화국 중 소련 합병 이전에 활동했던 공산주의자가 단 1명도 체포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만들었을 정도로 부하들을 철저히 보호하고 아껴서 '스승'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였다. 사실 이완용도 개인적으로는 배짱 있고 침착한 사람에 양아버지에게는 지극한 효자이긴 했다.

  • 리투아니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환한 미소로 직조공, 젖 짜는 일꾼, 콤바인 수확기, 기계공, 공장 노동자들과 화기애애하게 수다를 떨거나 사진을 찍는 것을 즐겼다.

  • 공개 연설에서 자신의 삶과 활동의 주요 목표가 "근로자의 복지"라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 니키타 흐루쇼프칼리닌그라드가 러시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역에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칼리닌그라드를 리투아니아에 넘기려고 하자 이를 거부했다. 얼핏 보면 영토의 확장을 거절한 허튼 짓으로 보이지만 칼리닌그라드 지역은 러시아계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한 데다 발트 3국이 독립한 후에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 비라트비아인, 비에스토니아인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아 사회갈등이 일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재평가를 받았다.

  • 위의 일화처럼 리투아니아에서 이민족들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해서 리투아니아는 타 발트국가들에 비해 이주민의 비율이 적었다. 물론 당시 리투아니아가 1950년대 말에 저출산 상태에 들어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와 달리 출산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으므로 여전히 인구증가가 활발해서 이민자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떨어진 이유도 있었지만 타 소련권 국가의 이주민 비율을 생각하면 리투아니아의 이주민 비율이 낮은 것은 스녜츠쿠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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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녜츠쿠스는 이오시프 스탈린 시기에는 무자비한 폭정을 휘두르면서 자국 인민들을 학살, 추방하거나 문화를 파괴하는 것을 주도하는 마름의 역할을 했지만 니키타 흐루쇼프 이후에는 시류에 발맞추어서 소련에서 리투아니아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수호자마냥 행세했다. 오죽하면 러시아인 이민을 최소화하는 정책까지 펼쳐서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로 평가될 정도였다. 다만 집권 초반의 죄악이 너무 커서 후반의 치적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2] Mira Bordonaite, 1910~1992. 그녀도 열렬한 공산주의자라 공산주의자들의 지하 활동에 참여했다가 여러 번 수감되었고 소련의 리투아니아 식민지화 이후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라디오 위원회를 이끌고 빌뉴스대학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교수를 역임했다.[3] 이후 잠깐 휴식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4] 이들 중 아들 블라다스(Vladas)는 2019년 시점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나 딸 마리야(Marija)는 빌뉴스에서 살면서 가족에 대한 회고록을 썼다고 한다.#[5] Vladimir Dekanozov, 1898~1953. 라브렌티 베리야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후 총살당했다. 다만 데카노조프는 아제르바이잔 바쿠 지역 출신이라 매국노는 절대 아니다. 한일합방 과정에 대입하면 대략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포지션이라고 봐도 무방한 셈.[6] 다만 이 사람도 1926년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1942년까지 16년간 리투이니아 대통령으로 군림하며 의회를 없애고 반공주의 정책을 펼친 독재자였다. 축출 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1944년 1월 9일 보일러 과열로 집에서 화재가 났을 때 유독가스에 질식되어 사망했다.[7] 한국이 경술국치의 불법성에 대해 지적하는 내용과 너무나 유사하다.[8] 형이라는 말도 있으나 이는 과장된 것이고 정확히는 외삼촌/이모의 아들, 즉 외사촌이었다.[9] 강제 추방 종료로부터 고작 3일 뒤인 6월 22일 나치의 리투아니아 침공이 시작되었고 1주일 뒤인 6월 29일 리투아니아가 점령되었다.[10] 더욱이 그의 사후에 한동안 리투아니아의 경제가 어려워졌으니 미화된 것도 크다.[11] 전체의 50%를 차지했다고 한다. 당연히(?) 임산부도 시베리아로 끌려갔다.[12] 그 추방된 아기는 고작 1년 만에 가혹한 환경 속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13] 1946~1953년까지 존재했던 소련의 비밀경찰로, 안보 임무를 담당했다.[14] 다시 말해 리투아니아인 독립운동가들이다. 다만 추방된 사람들 중에는 리투아니아인 외에도 폴란드인벨라루스인도 있었다.[15] 어린이 추방자만 이들 중 약 1/4인 약 11,000명에 달한다.[16] 이는 소련이 저지른 리투아니아인 추방 중 최대 규모였다.[17] 전체의 50%가 산림으로 끌려갔다.[18] 정작 이들 중 대다수는 이미 집단농장에 가입한 상태였으며 리투아니아인 외에 리투아니아에 살던 폴란드인 1,100~1,200명도 추방되었다.[19] 특히 후자는 무려 이오시프 스탈린이 서명했다.[20] 1944~1956년까지 리투아니아에서만 3만 명이 독립을 위해 게릴라 활동을 했으며 같이 소련의 영토가 된 라트비아에스토니아도 각각 1만 명이 게릴라 활동을 했다. 다만 극소수는 1971년에까지도 게릴라 활동을 했다고 한다.[21] 14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빌뉴스에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파했고 리투아니아 신들을 비판하자 분노한 빌뉴스 주민들이 수도원을 불태우고 14명의 수사를 모두 죽였는데 그들 중 7명은 황량한 언덕에서 참수당했고 나머지 7명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된 후 그 시체는 강에서 던져졌다고 한다. 16세기 초부터 퍼진 이 전설의 신빙성에는 논란이 있으나 여하튼 1649년 이전에 7명의 수도자가 참수당한 언덕에 3개의 목재 십자가가 세워졌는데 1869년에 무너졌으나 러시아 제국이 재건을 허용하지 않아 1916년에 콘크리트로 재건된 것이 1950년에 철거된 것이다.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준비하던 1989년 6월 14일 삼십자가는 재건되었다.[22] 다만 스녜츠쿠스가 '민족주의 발언'을 한 리투아니아인 공산당원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피하도록 막으려고 했으며 스녜츠쿠스가 고국의 땅, 풍경 등 고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했다는 증언도 있고# 스탈린의 사후에 리투아니아인들을 고위직으로 승진시키기도 하는 등 스녜츠쿠스는 리투아니아에 대해 모순적인 감정을 보였다.[23] 안타나스의 형제 2명, 자매 3명[24] 사실 스녜츠쿠스의 어머니는 소련이 고국을 점령할 무렵에 아들을 만나 아들에게 공산주의 정권의 잔혹 행위를 말해주면서 아들의 마지막 남은 인간성에 호소하려고 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25] 한국으로 치환하면 4.19 혁명 직후에 이완용을 재평가하자는 책이 출판된 것과 마찬가지다. 1960년도 한국 정부 수립 12주년이 되는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