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먼데일

덤프버전 :





월터 먼데일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미네소타 주 클래스 2)
제81~88대
휴버트 험프리

제88~94대
월터 먼데일[1]


제94대
웬덜 앤더슨[2]



미합중국 제42대 부통령
월터 프레데릭 "프리츠" 먼데일
Walter Frederick "Fritz" Mondale


출생
1928년 1월 5일
미국 미네소타주 실론
사망
2021년 4월 19일 (향년 93세)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재임기간
제42대 부통령
1977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서명
파일:월터 먼데일 서명.svg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시어도어 시그바드 먼데일
배우자
조안 먼데일
자녀
아들 테드 먼데일
엘레노어 먼데일외 1명
학력
맥칼리스터 컬리지 (졸업)
미네소타 대학교 (BA, JD)
종교
개신교 (침례교회)
소속 정당
/


1. 개요
2. 약력
3. 생애
4. 선거 이력
5.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제42대 부통령.


2. 약력[편집]


  • 1967.1. 제90대 상원의원 (미네소타 제2부 / 민주당)
  • 1973.1. 제93대 상원의원 (미네소타 제2부 / 민주당)
  • 1977.1. 제42대 미국 부통령
  • 1984.11. 제40대 대선후보 (민주당 / 낙선)
  • 2002.1. 제108대 상원의원 (미네소타 제2부 / 민주당)


3. 생애[편집]


1948년 당시 미네소타 연방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던 휴버트 험프리의 선거캠프에 참여하며 20세의 나이에 처음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52년, 1954년, 1958년 미네소타 주지사 선거캠프에도 참여하였고, 1960년 32세의 나이로 미네소타 주 검찰총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에는 미네소타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워싱턴의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며, 1972년 재선에 성공한다.

1976년 미국 대선에서 지미 카터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부통령이 되었고, 1980년 미국 대선에서도 카터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으나, 지미 카터가 로널드 레이건과 러닝메이트 조지 H. W. 부시에 패배하면서 부통령에서 퇴임하였다.

1984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이 둘과 다시 대결했지만, 앞선 1980년 대선보다도 더 큰 표 차로 패했다. 먼데일은 제럴딘 페라로를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러닝메이트)로 지명하여 진보적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지만, 후보자 수락 연설에서 "진실을 말합시다. 레이건 대통령은 세금을 올릴 것이고 저도 올릴 것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걸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저는 솔직하게 진실을 말할 것입니다"[1]라는 최악의 연설을 해 지지율이 엄청나게 떨어졌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레이거노믹스의 효과가 발휘되어 경제가 호전된 반면, 제럴딘 페라로의 남편 존 지카로의 세금 탈루 논란이 터지면서 먼데일의 지지도는 더더욱 떨어졌다. 결국, 먼데일은 기록적인 패배를 당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선거인단 격차를 뛰어넘는 압도적인 패배에 본인과 민주당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먼데일이 이긴 곳은 고향미네소타와 골수 친민주당 지역 워싱턴 D.C(먼데일이 85% 득표). 선거인단 수로 따지면 525 대 13이다. 먼데일은 개표 최후반 미네소타에서 간신히 4천표차(0.18%)로 승리를 확정지었는데, 미네소타에서도 히스패닉의 압도적 지지[2]가 없었다면 결과가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레이건은 미국 50개 주에서 모두 이길 뻔 했다. 당시엔 NBC 등 개표방송을 하던 주요 언론들이 공화당을 파란색[3]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레이건은 이 승리 이후 "수영장 대통령"이란 별명을 얻었다.

다만 선거인단 확보자 수가 아닌, 유권자 개개인의 투표를 기준으로 하는 총 득표수(popular vote. 즉, 직선제 기준)로 따지면 레이건 58.8%, 먼데일 40.6%로 나타났다. 투표한 사람 10명 중 4명의 지지를 받은 셈이니, 생각보다 선거인단 차만큼 큰 표차는 아닌 셈이다.[4]

하지만 8년 뒤 민주당빌 클린턴조지 H. W. 부시를 누르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주일 미국 대사로 지명되었다.

2002년, 다시 한번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미네소타에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공화당 놈 콜먼 후보에게 2.2%p 차로 석패했고 그대로 정계를 은퇴했다. 18년만에 다시 갑작스럽게 선출직에 도전하게 된 비화가 있는데 당시 원래 민주당 후보였던 폴 웰스턴이 비행기 사고로 선거를 10일 남겨 놓은 상태에서 사망하게 되면서 급작스럽게 미네소타 민주농민노동당[5]의 지명을 받아 출마하게 된 것.

그래도 지명도를 바탕으로 불의의 사고로 주어진 짧은 선거운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잔여 지지세를 규합해 선거 직전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51 대 45로 앞섰으나, 정작 당일 선거에서는 패배하고 말았다. 이 낙선으로 50개 주에서 모두 진 최초의 정치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택했다.

2021년 4월 19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62
주 검찰총장 선거
미네소타


730,783 (59.64%)
당선 (1위)
초선
1966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685,840 (53.94%)
초선
197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981,320 (56.67%)
재선
1976
미국 부통령 선거[A]
미합중국


40,831,881 (50.08%, 297명)
초선
1980
미국 부통령 선거[A]
35,480,115 (41.01%, 49명)
낙선 (2위)

1984
미국 대통령 선거
37,577,352 (40.56%, 13명)

200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미네소타


1,067,246 (47.34%)



5. 기타[편집]


  • 비록 역사에 남을 기록적 참패를 했음에도 오늘날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일단 동시대의 다른 민주당 후보들과는 달리 본인이 그리 큰 정치적 실책을 저지른 것은 없는데다가 인간성과 도덕성이 높이 평가받는다. 일각에서는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은 지미 카터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기도 한다.
  • 먼데일이 출마한 1984년 대선에서 당시 현직이었던 레이건은 고령의 나이가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6] 먼데일과 레이건의 대선 1차 토론 당시 위대한 소통가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레이건답지 않게 유독 횡설수설하며 토론을 망쳐 국민들의 이 점이 실제 불안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2차 토론회에서 다시 사회자가 레이건에게 이 점을 지적하며 나이 문제를 지적하자 "전 나이를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상대 후보가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걸[7] 절대 정치적으로 공격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재치있게 받아쳤고 먼데일 본인마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풍문으로는 이 토론회 직후 아내에게 이미 대선에서 패배할 것을 직감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 미친 대통령이라는 격한 표현을 써 비판했으며 언제 핵무기를 발사할지 모르겠다며 우려를 표했다.

  • 1981년 퇴임 후 2021년 사망까지 40년이 넘게 생존하면서 생전 당시 최고령 전직 부통령이었다. 흥미롭게도 먼데일이 대통령으로 보좌했던 지미 카터는 역대 최장수 대통령이다.

  • 부통령 재임 당시 학생 시절의 제프리 다머가 학교 차원의 워싱턴 D.C. 견학[8]을 갔다가 친구 몇몇과 함께 그의 집무실을 견학한 적이 있다고 한다. 비범하게도 즉석에서 공중전화 통화[9]로 따낸 기회란다. 이 일화를 자신의 만화인 <내 친구 다머>에 실은 제프리의 학창 시절 친구던 만화가 더프 백더프 왈, 이런 일을 꾸밀 정도의 머리와 요령과 배짱을 지닌 다머가 훗날 가정의 불우함과 살인충동, 뒤틀린 성벽 같은 여러 요소로 인해 연쇄살인범이 됐다고 생각하니 그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고. 물론 이 사람은 다머를 옹호하는 사람은 아니다.

  • 미국 부통령의 관저인 '옵서버토리 서클 1번지'(Number One Observatory Circle)에 처음 입주한 부통령이다. 본래 미국 부통령은 별도의 지정된 관저가 없이 워싱턴 D.C. 내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출퇴근했었다. 그러나 부통령에 대한 경호 문제도 중시되면서 1974년 부통령을 위한 관저로 이 옵서버토리 서클 1번지 건물을 배정했다. 그러나 당시 부통령이던 넬슨 록펠러는 정작 입주하지 않고 손님 접대용으로만 사용해서 정식 입주한 부통령은 먼데일이 최초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1 11:53:35에 나무위키 월터 먼데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레이건의 방위비 인상과 세금 삭감으로 "쌍둥이 적자"라 불리던 국가 부채가 엄청나게 쌓여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먼데일은 증세를 하지 않으면 이것이 미국 경제에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2008년 금융위기로 현실화됨에 따라, 뒤늦게 먼데일이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2] 로널드 레이건은 포클랜드 전쟁에서 전폭적으로 영국마거릿 대처를 지지했었고, 이 때문에 히스패닉은 민주당에 몰표를 줬다. 당시만 해도 히스패닉의 인구 비중이 적은 편이라 선거에 큰 영향은 못 미쳤다.[3] 2000년 대선 까지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색을 반대로 표시했었다.[4] 물론 전국 득표율 기준으로도 보통 1대1 선거에서 두 자릿수 차이 이상은 참패라고 봐야 하지만 워낙에 선거인단 수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다보니 그렇다.[5] 미네소타에서 민주당의 지위를 대신하고 있는 지역 정당으로 연방 단위 선거에서는 민주당 당적으로 출마한다.[A] A B 대통령 후보 지미 카터[6] 1차 취임식 당시에도 이미 만 69세의 나이였다. 먼데일은 1984년 대선 당시 만 56세로 비교적 젊은 편.[7] 참고로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월터 먼데일은 민주당 의회정치의 전설인 휴버트 험프리의 수제자로 젊어서부터 온갖 권모술수의 기술을 다 배운 사람인데다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지미 카터를 도와 백악관 실무를 장악하며 카터 대통령 시절 "실세 부통령"이라고 불렸다. 사실, 딕 체니 이전 실세 부통령의 대명사는 먼데일이었다. 정작 캘리포니아 주지사 2번을 지낸게 전부였던 레이건은 먼데일에 비해서 공직 경험이 압도적으로 짧았다.[8] 연방정부의 구성과 업무를 배우기 위한 닷새 일정의 수학여행.[9] 금요일 자유 시간에 친구들과 걷다가 한 친구가 농담따먹기로 할 일 없는 부통령이나 보러 가자고 얘기한 걸 다머가 옆에 있던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어찌어찌 해서 진짜로 먼데일의 참모와 통화가 연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