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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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룡
全命龍

출생
1606년 11월 13일[1] 오후9시~11시 사이
(음력 선조 39년 10월 14일 해시)
충청도 옥천군 양산현 지내촌
(現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사망
1667년 8월 4일[2] 오전 1시~3시 사이
(음력 현종 8년 6월 15일 축시 / 향년 62세)
경상도 상주목 암려
(現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묘소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 산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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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전씨

백유(伯兪)

영서(𤃡西)[1]
학력
전중승의 문하 (1612년~ )
생원시 증광시 3등 20위 입격 (1624년 10월 10일)[2]
월봉 고인계의 문하 (1625년~ )
문과 식년시 병과 12위 급제 (1627년 10월 18일)[3]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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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학유 (1630)
성균관 학록 겸 차장무관 (1630)
성균관 학정 겸 봉상시 봉사 (1631)
성균관 박사 겸 양현고 직장, 성균관 전적, 형조 좌랑 (1632)
예조 좌랑 겸춘추관, 흥덕현감 (1633)
형조 정랑 (1642)
성균관 직강, 경성판관 (1643)
평양서윤, 북청판관 (1647)
흥양현감 (1650)
공조 정랑 (1653)
자인현감 (1654)
풍기군수, 영암군수 (1659)
울산도호부사 (1662)
영해도호부사 (1665)

최종관등
통훈대부 행 영해도호부사
저서
《영서집(𤃡西集)》
부모
부친 - 전대승(全大承, 1579~1656)
모친 - 박운(朴芸)의 딸 함양 박씨(咸陽 朴氏, 1583~1666)
형제자매
동복제 - 전명익(全命益, 1622~1674), 전명직(全命稷, 1626~1668)
동복매 - 한혜(李憓)의 처, 이경일(李慶一)의 처, 오서봉(吳瑞鳳)의 처
이복제 - 전명석(全命碩, 1629~1670)
부인
선부인 숙인 개성 고씨(開城 高氏, 1603~1660) - 고인계(高仁繼)의 딸
후부인 숙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 1640~1714) - 권문발(權文發)의 딸
측실
자녀 ||3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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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개성 고씨 소생 2녀]
적장녀 박경휘(朴景輝)의 처
적차녀 노사헌(盧思憲)의 처
[안동 권씨 소생 1녀]
적3녀 - 정진휘(鄭晉徽)의 처
[측실 소생 3남]
서장남 - 전시징(全始徵, 1648~1665)
서차남 - 전시은(全始殷, ? ~ ? )
서3남 - 전시주(全始周, 1654~ ? )}}}[양자] 전시하(全始夏, 1649~1711) ||}}}}}}}}} ||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조선 인조조~현종조의 문신. 는 백유(伯兪), 는 영서(𤃡西)이며 본관은 옥천이다. 주로 여러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며 명성이 있었다. 동시기 같은 고을, 즉 구(舊) 상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족(同族)과 다르게 임란 이후 새롭게 성장하던 산양(山陽) 사족의 일익을 담당했다.


2. 생애[편집]


1606년 양산현(陽山縣)에서 전대승(全大承)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선교랑을 지낸 전천성(全天性), 조부는 장사랑 예빈시 참봉을 지내고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로 추증된 전결(全潔), 외조부는 부호군 함양 박운(朴芸)이다.

12세부터 한강 정구의 문하생이었던 숙부 전중승(全仲承)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15세가 되는 1620년부터는 향시(鄕試)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1623년 증광(增廣) 향해(鄕解) 종장(終場) 제1위에 들었으며, 이듬해 복시에서 생원으로 입격하였다. 하지만 전시(殿試)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625년 충청도 도사로 재임하던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의 눈에 들어 20세의 나이로 고인계의 딸 개성 고씨와 혼인하였고, 고인계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1626년 한 번의 실패를 더 거친 뒤 1627년 명경(明經)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나라 서쪽에서 큰 우환이 발생하여 강학의 공효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올린 성취였다.

관직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630년부터였다. 1632년까지 성균관 학유, 학록, 학정, 박사, 전적을 거쳤으며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는 예조 좌랑 겸춘추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동료와 서로 헐뜯는 서류를 제출한 탓에 해직되었다. 해직된 해 겨울부터 이곳저곳의 지방관으로 떠도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외직을 전전하게 된 데 있어 두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있는데, 처조카 고진학(高晉學, 1631~1675)은 유사(遺事)를 지으며 집이 가난하고 늙으신 부모를 모시고 있는 까닭에 부모를 좀 더 잘 봉양하기 위해 좌천을 자처했다고 썼지만, 증조부 권구(權坵, 1611~1682) 때부터 집안끼리 깊이 교유한 연으로 묘갈명까지 지은 청대(淸臺)권상일(權相一, 1679~1759)이 쓴 일기에는 '남포귀범(南浦歸帆)'이라는 시[4]를 쓴 탓에 미움을 받아 크게 승진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1633년에는 흥덕현감에 임명되어 6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는데, 도중 병정노란을 겪었지만 안정된 치적을 올린 까닭에 어사였던 청봉(晴峯) 심동구(沈東龜, 1594~1660)가 이를 임금에게 포상하기를 청하여 옷 겉감과 안감을 특별히 하사받았다. 고을 백성들이 그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 임기가 만료됐음에도 1년을 더하도록 하였는데, 극구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결국 얼마 후 병을 이유로 체임되었다.

1634년 34세의 나이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때 처음으로 처가가 있는 상주 산양현에 작은 땅을 매입하여 집을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642년, 1643년 형조 정랑, 성균관 직강 등에 제수된 뒤로부터는 다시 지방관 생활이 시작된다.

1643년 경성판관으로 부임한다. 북쪽 변방 고을이므로 대체로 풍속이 사납고 유학적 기풍이 잘 자리잡지 못했는데, 이를 잘 교화했다. 1647년에는 평양서윤에 임명되었으나 상주에서 올라가던 중 칙사의 행차가 임박해 평양서윤의 자리를 더 이상 비워둘 수 없다는 이유로 개차되었다.# 이후 며칠을 관저에서 머물다 북청판관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1650년에는 흥양현감이 되었는데 임기 중 호적 일부가 불탄 것을 보고하지 않아 처치당했다가 직첩을 환급받는 해프닝이 있었다.

1653년에는 모처럼 공조 정랑에 임명됐지만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대신 이듬해 자인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656년에는 부친상을 당해 양산 선영에서 호상하였고 마친 뒤에는 산양 별장으로 돌아가 기거했다. 1659년에는 풍기군수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영암군수에 제수되어 모친을 모시고 부임하였다. 재임중 기근이 들었는데 부족한 진곡 대신 대동미를 분배하여 진휼하는 과정을 당시 어사였던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문제 삼아 탄핵하였고, 결국 파직되었다.#

1660년 아내 개성 고씨의 상을 당했고, 이듬해 권문발(權文發)의 딸인 안동 권씨와 재혼하였다. 1662년 울산도호부사에 부임하여 모친을 모시고 갔으나 모친을 봉양하기에 환경이 좋지 않으므로 사직을 청하여 체임되었다. 1665년 영해도호부사에 제수되어 다시 모친을 모시고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모친상을 당해 관을 모시고 상주로 돌아왔다가 양산에 장사지냈다. 이때 영해에 사는 이상일(李尙逸)[5]이 와서 호상하였다. 평소 검소하게 산 까닭에 염습하는 데 쓸 물건들이 집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며, 읍민이 부의로 무명 3백여 필을 모았는데 이를 한사코 사양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아에 부쳐 백성들 상례에 활용하게 하고 본인은 1/10도 채 챙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궤연을 모시고 다시 상주에 돌아왔는데 적지 않은 나이에 예를 다하여 집상한 탓에 몸을 상해 병이 도졌으며, 이질 증상이 더욱 심해져 결국에는 1667년 모친상을 치르던 암려에서 사망하였다. 본향인 양산현에 묻혔다. 유사는 처조카 고진학이, 행장(行狀)은 본향의 양곡(陽谷) 여안소(呂安素, 1637~1714)[6]가, 묘갈명은 상주에서 대대로 교유하던 집안의 청대 권상일이 지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딸 둘은 선부인 개성 고씨 소생이고 딸 하나는 후부인 안동 권씨 소생이었다. 아들 셋은 모두 서자였으므로 후부인 안동 권씨가 전명룡의 평소 뜻을 따라 전명룡의 친동생인 전명익(全命益)의 아들 전시하(全始夏)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전시하는 한동안 상주에 살다 본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3. 여담[편집]


  • 옥천 전씨 보사(譜史)와 관련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본래 영천(榮川)에 보관 중이던 족보를 화재로 읿어버리고 난 뒤 송정 전팽령 종가에서 보관 중이던 족보의 사본을 얻어 증수하고 발문을 달았는데 이것이 현전하는 옥천 전씨 최고(最古)의 족보인 을해보(1635)이다. 이 다음 족보인 무술보(1718) 발간 역시 양자인 전시하의 아들, 곡남 전계선(全繼善)이 주도하였다.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옛 상주 지역 향촌 사회를 주도한 동종 사서 전식과 활동 시기가 겹치고 또 서로 친밀하게 교류했지만 그와 달리 임진왜란 이후 사족 집단이 새로 성장하던 산양현을 근거지로 하였고, 이 지역 인물들과 함께 사론을 주도했다. 근암서원(近嵒書院) 창건 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 외부 집단의 유입으로 폭발적으로 인적 성장을 이룬 산양의 사족들은 근암서원을 건립하여 상주 내 다른 지역에 비해 아직 세력이 미약한 산양의 학풍을 진작시키고자 하였는데, 기존 향촌 세력이 주도하고 있던 도남서원(道南書院)[7]과 옥성서원(玉成書院)에서 새 서원 건립의 불필요함을 주장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향론의 반대를 맞닥뜨린 산양 사족들은 외부인인 고을 수령, 즉 목사의 지지를 얻는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해 끝내 서원 건립을 쟁취해냈는데, 이때 소두를 전명룡이 맡았다.

  • 류성룡의 문인 김영(金坽)이 쓴 일기 《계암일록(溪巖日錄)》에도 단편적으로 등장하는데, 전명룡 역시 학맥으로는 남인에 가까웠지만 이 내밀한 기록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김영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영의 족손 김확(金確)의 송사에 관해 고인계와 전명룡이 연줄로 무리한 일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면서 전명룡은 사람됨을 이미 알 만 하고 고용우(高用雨)[8]는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동종 전식 역시도 험한 말을 피하지 못했는데, 창의 당시 한 게 별로 없으면서 수고를 과시한다거나# 남인이면서 최명길 문전에 드나드는 무리가 많은데 늙은 전식 역시 골골대며 그 앞에 오래 서 있었다는 등# 혹평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