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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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종교정당
창당

진리당

해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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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真理党(しんりとう | 진리당

창당일
1989년 8월 16일[3]
당수
아사하라 쇼코
정치적 사상·입장
복지 국가
국민 표의 확대
정교일치
신권정치
과두제
천황제 폐지
전제군주제

1. 개요
2. 역사
2.1. 옴진리교의 정계 진출 시도
3. 선거 공약
4. 역대 선거 결과
4.1. 중의원 의원 총선거



1. 개요[편집]


아사하라 쇼코옴진리교를 모체로 하는 일본의 종교정당.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옴진리교가 정계 원내에 진출하기 위해 아사하라 쇼코가 창당했으며, 원내 진출에 실패하고 옴진리교가 몰락한 현재는 본 정당의 존재성을 알 수 없다.


2. 역사[편집]



2.1. 옴진리교의 정계 진출 시도[편집]


선거에 출마할지 말지를 두고 사이비치고는 드물게 간부진에 의한 다수결이 채택되었다. 결과는 10:2로 선거 출마 찬성파가 승리했다. 반대한 2명은 조유 후미히로와 키베 테츠야[4]였다.

진리당이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9년 8월 27일에는 구가야마 회관에서 '아스트랄 월드 콘서트'가 개최되어, 아사하라인에 의한 존사마치가 발표됨과 동시에 푸른 코끼리를 본뜬 '가네샤 모자', 노란 코끼리 인형의 '가네샤 등신대 마스코트', 아사하라의 마스크를 쓴 '쇼코 군단'이 등장했다.

1989년 11월 4일, 선거전 등 교단의 활동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옴진리교를 비판하던 사카모토 변호사와 일가족을 전원 살해했다. 당시는 실종 사건으로 취급되어 사건성조차 확정되지 않았지만, 나카가와 토모마사가 살해할 때 플루샤(옴진리교 소속 배지)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범행설이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궁에 들어갔고…

그렇게 정당을 만들어 1990년에 실시된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아사하라 쇼코 본인이 도쿄 4구[5]에 직접 출마했고, 이외 후보자까지 합하면 모두 25명의 후보자를 냈지만 후보자 전원의 표를 합쳐도 당선되는 구가 없는 매우 저조한 득표율로 전원 낙선했다. 공약은 의외로 매우 정상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선거 유세부터가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옴진리교 특유의 복장[6]을 하고 기괴한 노래[7]를 부르며 춤을 추거나 타 당 후보자를 방해하는 기묘한 것이라서 한눈에 봐도 이상한 단체로 보였고, 심하게는 장난으로 정당을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또한 공직선거법에서 정한 시간대를 크게 넘는 일당 16시간에 걸친 거리 선전 운동을 펼쳐, 경시청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지만, 선거 활동에 참여한 모든 신자들은 '만약 누군가로부터 주의를 받거나 하면, '이것은 포교 활동입니다'라고 말하고 도망치도록'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간부이자 건설성 대신 하야카와 키요히데(1949~2018)의 주도 하에 '올빼미 부대(ふくろう部隊)'가 결성되어, 밤중 몰래 상대 후보의 선거 포스터를 떼어내거나 훼손하는 작업을 했다. 이 일은 교주 아사하라 자신이 추천하여, 심야에 신자를 사용하여 다른 후보자를 비방하는 전단을 배포시켰다.

그러나, 다른 선거구에서 출마했던 진리당 후보자는, 선거 공보와 정견 방송, 공설 게시판에 게시하는 선거 포스터 이외의 선거 활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한편 아사하라 이외의 후보자는 '마이트레야'(조유 후미히로) 등과 같이 홀리 네임, 즉 교단 내에서의 이름으로 입후보 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영 게시판에 게시된 선거 포스터에는, 아사하라 당수를 제외하고, 홀리 이름이 크게 적혀 있는 반면, 본명은 작게만 쓰여져 있고, 흰 옷으로 종교상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많았다. 아사하라의 포스터는 참고로 깔끔하게 면도한 아사하라가 자식들이랑 앉아있는 구도.

도야마 고이치는 자신의 퍼포먼스 선거 경험에서, 포말 후보[8]라도 거리의 인기자가 되는 것은 쉽기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것이고, 진리교가 사회 과학에 무지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음모론으로 달려갔다고 분석하였다. 또한, 노래와 춤의 퍼포먼스 전술은 당시의 반원전 운동의 영향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일부에서는 진리당의 정계 진출 실패가 옴진리교가 테러 집단의 길을 걷게 된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사실 일본에는 이미 창가학회와 연결된 공명당 같은 사례는 있지만, 그쪽의 경우 표면상으로는 별개의 조직이며, 적어도 진리당 만큼 노골적인 종교적 색채를 풍기지는 않는다.

2.2. 중의원 선거 이후[편집]


장난 정당 정도의 취급을 받아 아사하라 쇼코 본인조차 1,783표의 투표수로 낙선하는 굴욕을 겪었다. 게다가 공탁금 몰수점인 전체 투표의 10분의 1에 모든 후보가 미치지 않아 공탁금은 그대로 몰수되었다.

3. 선거 공약[편집]


  • 소비세 폐지 - 재원은 행정 개혁에 의한 11조엔-정부가 유착을 없애기만 하면 소비세 등은 필요 없다.

  • 의료 개혁 - 환자 위주의 의료와 새로운 의학의 창조 - 이것은 누구에게나 절실한 문제. 조속히 실시.

  • 교육 개혁 - 밝은 학교와 지능 교육의 추진 -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 복지 추진 - 풍부하고 충실한 장수 사회를 목표로 - 평화로 가득한 매일을.

  • 국민투표 제도 도입 구상 - 진정한 국민 국가로 계속하기 위해 - 지금의 정치는 불만 투성이. 국민투표 제도를 도입하면, 소비세 강행 표결과 같은 사태도 막을 수 있고, 부패 의원도 우리 손으로 해직할 수 있다. 금권·부패 정치의 온상을 쓸어버릴 수 있다.


4. 역대 선거 결과[편집]



4.1.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 의석 증감은 직전회차 선거 의석 수와의 비교임.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증감][9]
정당투표
득표수
득표율
1990(39회)
25
0 (-)
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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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탁금 몰수점 미만과 옴진리교 해체. 구체적 시기는 불명이지만 1996년으로 추정.[2] 진리당의 모체 종교인 옴진리교의 로고. [3] 도쿄도 선관위에게 신고한 날짜.[4] 1955년 5월 12일생. 단체 내 명의 마하카사파, 방위성 장관(…)[5] 나카노구, 시부야구, 스기나미구[6] 옴진리교의 신도들은 아사하라의 얼굴을 캐리커처한 가면을 쓰고 유세를 했는데, 이를 일명 '아사하라 군단'이라고 불렀다. 아사하라 군단이 발표될 당시 공개된 곡이 존사마치.[7] '존사마치', '진리교, 마를 불제하는 존사의 노래', '하바타케, 내일을 향해', '가네샤 체조' 등과 같은 '옴'송.[8] 당선될 전망이 희박한 선거 후보.[9] 비개선의석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