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호/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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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편집]



1.1. 프로 출범 이전[편집]


괴산에서 태어나 큰 형을 따라 청주로 이사가며 축구부가 있던 청주 한벌국민학교에 전학을 갔고 거기서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같은 재단의 명문 청주대성중-청주상업고를 거쳤다. 청주상고에서 유인권 감독의 지도 아래 1년 선배 정성교, 이재희, 1년 후배 신상근, 최상국, 정기동 등 올스타급 멤버들과 함께 전국 대회를 휩쓸고 다녔고 그 중 단연 에이스로 활약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2선 공격수로 주로 활약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다. 골키퍼를 제외한 미드필더, 중앙 수비, 풀백까지 모두 소화했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주로 중원을 지키며 패스 능력과 시야를 키웠다. 이는 훗날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스트라이커로 성장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이다.

이미 중학생시절부터 포철 축구단에 입단하는 게 꿈이던 최순호는 청주상고 2학년에 포철과 연습 경기를 가졌는데, 당시 국가대표 주전 수비수였던 박영태를 상대로 활약하는 등 이미 완숙한 기량을 한홍기 감독에게 보여줬다.

결국 청주상고 3학년 겨울 방학부터 포철 훈련에 합류했고 청주상고 졸업 후 본격적으로 포철에 입단한다. 그전에 한국전력 축구단 입단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포철에 입단한 것이다.

1.2. 포항제철 축구단/포항제철 아톰즈 (1980~1988)[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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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청주상고 3학년이던 1979년부터 포철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최순호는 한홍기 감독 이외에도 포철에서 김정남 코치와 인연으로 1980년부터 대표팀에 소집될 수 있었다.

1981년 3월 15일부터 27일까지 개최된 실업축구연맹 1차 리그에서 최순호는 원맨쇼를 보여줬다. 후반 20분 첫 골, 후반 35분 중앙에서 이어지는 단독 드리블로 득점을 성공시키며 15분 사이에 두 골을 몰아넣는 기염을 토했다. 포철은 최순호와 함께 시작한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서 1975년 이후 6년 만에 정상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어진 1982 실업축구연맹전에서도 팀 우승에 기여하며 대회 2연패를 거뒀다.

1983년 프로축구가 출범하면서 프로화된 포항제철로 다시 입단했다. 첫해에는 월드컵 예선 참가로 인해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대신 프로 2년차인 1984 시즌 리그 24경기 14득점 6도움으로 득점 2위, 공격포인트 1위에 올랐다. 이에 따른 대우로 1984년 2,760만원을 받아 최고액을 기록한 최순호는 이후 1985년 연봉 3,200만원을 받아 프로축구 첫 연봉 3,000만원대 돌파한 선수가 됐다.

이후 주장을 역임하며 1986년 수퍼리그, 실업축구연맹전 더블 우승과 1985년, 1987년 수퍼리그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5시즌 동안 수퍼리그 55경기 21골을 기록하였다.

1987 시즌 미드필더로 뛰고 싶었던 최순호는 자신을 스트라이커로 기용하려는 이회택 감독과 마찰이 생겼다.

결국 1987년 11월 28일 포철로부터 대폭적인 연봉 삭감 통보를 받았다. 최순호의 1987년 연봉은 3,600만원, 포철은 국내 최고의 연봉을 받았지만 그해 부상과 부진으로 팀에 공헌하지 못했다며 1988년 연봉으로 33.3%가 깎인 2,400만원을 제시받았다. 이에 최순호는 코칭스태프와 갈등을 빚자 구단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판단했고, 결국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1987년 12월 30일 2차 협상에서도 재계약에 실패한 포철이 다음해 1월 7일 임의탈퇴 선수 공시를 요청, 최순호는 1988년 1월 8일자로 프로축구 사상 두 번째 임의탈퇴선수가 됐다.[1]

그로부터 13일 뒤인 1월20일 포철 구단 사무실에서 서상달 단장과 만난 최순호는 '무조건 복귀'라는 백기를 들었다. 포철은 임의탈퇴선수 공시를 철회했고 최순호는 연봉 협상을 뒤로 미룬 채 2월4일 포철과 함께 프랑스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러나 2월14일 귀국한 최순호는 서상달 단장으로부터 “프랑스 원정에 합류하면 귀국후 이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팀에 복귀했었다고 밝히며 결국 팀을 떠나기에 이른다.

당시 최순호를 고향으로 데려오려던 럭키금성은 “돈에 구애받지 말라.”는 구단 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본격적으로 스카우트를 추진했고 포철도 이회택 감독이 최순호의 이적에 동의하면서 방출방침을 굳혔다.

처음 이적료 3억원을 요구했던 포철은 지나친 고액임을 감안, 조민국이나 구상범과의 웃돈을 얹는 맞트레이드를 제안했다. 대형 스트라이커 김종부를 확보해 놓은 이회택 감독의 수비보강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럭키금성 고재욱 코치가 난색을 표해 결국 현금 트레이드로 낙착됐다.

결국 1988년 2월 27일, 당시 역대 최고 이적료인 3억원에 최순호는 포철을 떠난다.

1.3. 럭키금성 황소 (1988~1991)[편집]


1988년 당시 초중고를 모두 나온 청주를 연고로 하는 럭키금성으로 이적했다.

이적료 3억원에 연봉 4,200만원으로 국내 최고 연봉 선수 자리를 지키게 됐다.

럭키금성으로 이적한 후 바라던대로 미드필더로 출장한 최순호는 입단하자마자 1988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의우승에 일조했다.

그러나 1988 서울올림픽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으로 인해 대표팀 차출이 잦았던 탓에 정작 럭키금성에서는 경기를 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럭키금성이 한국프로축구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1989년엔 9경기 1도움에 그쳤고, 우승을 차지한 1990년에도 8경기 1득점 2도움에 그쳤다.

결국 3시즌 동안 34경기 4골 5어시스트에 그쳤다.#

1990 시즌 종료 후 럭키금성과 재계약하는 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세웠다. 구단은 연봉 4천5백만원으로 최고액을 제시했지만, 럭키금성 이외에 다른 기업의 광고를 금지하는 조항을 없애달라는 의견이 서로 상충했기 때문.

최순호는 일본 사커 리그 진출도 추진했으나 당시 사회 상, '한 수 아래의 국가에는 보낼 수 없다'는 방침 아래 이적에 동의하지 않아 불발됐고, 유럽 진출 역시 불발에 그쳤다.

1.4. 포항제철 아톰즈 2기 (1991)[편집]


결국 트레이드로 황영우에 현금 1억 5천만원을 얹어 제시한 친정팀 포철로 복귀하게 됐다.

리그 16경기에 출장하였으나 골은 없었고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K리그 통산 9시즌 100경기 23득점 19도움. A매치 기록 95경기 30득점과 비교해보면 지금 상식으로는 정말 기괴하기 짝이 없는 리그 스탯이지만, 쌍팔년도 당시에 전국구 선수라면 저게 정상이었다. 프로팀은 대표선수 월급 주는 호구쯤으로 여기고 마구잡이로 차출해서 굴리던 시절이었으니(...)[2].


1.5. 로데스 AF (1992)[편집]


1992년 프랑스 2부리그 로데스 AF로 이적했다. 스위퍼로 뛰며 18경기 2골을 넣었고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2. 대표 팀 경력[편집]



2.1.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79~1981)[편집]



2.1.1. 1979년 FIFA U-20 월드컵[편집]


최순호는 1979년 청소년 월드컵에서 처음 청소년 국가대표로 데뷔하였다.


2.1.2. 1980년 AFC 유스 챔피언십[편집]


대회에 출전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득점왕과 MVP를 차지했다.

2.1.3. 1981년 FIFA U-20 월드컵[편집]


2년 후인 1981년 호주 청소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와의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2골 2도움의 MOM급의 활약을 벌여 이탈리아를 4:1로 이기는 대형사고를 치기도 했다(!).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80~1990)[편집]



2.2.1. 1980년 AFC 쿠웨이트 아시안컵[편집]


1980년 8월 23일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다. 1980년 AFC 아시안컵[3] 에서는 18세의 나이로 7골을(!) 넣으며 역대 최연소 득점왕에 올랐고,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2.2.2.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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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86년 멕시코 월드컵[4] 대표로 나서서 조별리그 1차전 아르헨티나 전에서 박경훈의 오버래핑한 공을 받아 73분 박창선의 골을 어시스트했다.[5] 2차전 불가리아 전에는 나오지 않았고 팀은 1:1 무승부 첫 승점 1점을 거두었다.[6] 3차전인 이탈리아 전에서는 62분에 1:1이 되는 동점골을 넣었고[7] 89분 허정무의 골을 어시스트했다.[8] 그러나 그 경기에서는 2:3으로 졌으며, 승점 1점 86월드컵 20위를 기록했다.[9]

최순호 본인은 이때 당시 상당히 놀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차범근이나 허정무도 있고 그들이랑도 같이 훈련해 봤다. 그리고 실제로 해외 팀과 경기해 봤을 때 예를 들어 친선 형식으로 온 프로팀과 한국 국가대표팀이 붙어보는 형식, 주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이 붙어보는 형식, 2진급 대표팀과 붙어보는 형식으로 경기해 봤을 때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우리가 밀리긴 하지만 월드컵 나가기만 한다면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월드컵에 나갔을 때는 전혀 달랐고, 전에 외국 선수들과 붙었을 때는 통하던 기술이 안 통해서 당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해외에 나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고 한다.


2.2.3. 1990년 FIFA 이탈리아 월드컵[편집]


파일:external/www.ksport.co.kr/f_20130913011810.jpg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10]에서는 정용환과 함께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11] 스페인전에서는 스트라이커, 나머지 2경기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으며 대회에서 유일한 득점인 스페인 전 황보관의 시속 114킬로 대포알 프리킥을 톡 차서 어시스트(...)한 게 최순호. 나름 멸망 직전인 한국 국대 중 그나마 준수한 플레이를 했으나 기본적으로 이 대회는 승점 0점 3전 전패 대회 22위라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한국 월드컵 진출사에서 독보적으로 흑역사에 가까운 대회라...[12]

사실 월드컵 본선보다 24개국 본선에 진출을 위한 아시아 예선에서 우승으로 진출한 최순호의 활약은 눈부셨다. 1986년 한국의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을 확정지은 일본과의 최종전에서 맹활약한 것도 최순호였으며 마치 2000년대 이후 안정환처럼 한국 국대의 중요한 장면은 대부분 그와 연관되어 있을 정도로 국대공헌도가 높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예선때는 이탈리아에 가야한다며 맏아들을 이름 대신 '로마'라고 부를 정도로 국대에 헌신했다(...)[13]

이회택-차범근-최순호-김주성으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의 에이스 계보의 한 명. 1골 3도움으로 현재 대한민국 월드컵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 기록 보유자이다.[14]


3. 기록[편집]



3.1. 대회 기록[편집]







3.2. 개인 수상[편집]


  • AFC 아시안컵 득점왕: 1980
  • AFC 아시안컵 토너먼트의 팀: 1980
  • AFC 유스 챔피언십 MVP: 1980
  • AFC 유스 챔피언십 득점왕: 1980
  • KFA 최우수 선수: 1990
  • KFA 베스트 XI: 1980, 1984, 1985, 1986
  • K리그 베스트 XI: 1984
  •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2013
  • K리그 명예의 전당: 2023


3.3. 출전 기록[편집]



3.3.1. 국가대표[편집]


연령
출전

U-17
0
0
U-20
10
6
U-23
0
0
A대표
96
30
종합
106
36

[1] 첫 번째는 김종환, 현대 ->유공 1989년 은퇴[2] 최순호의 선수 생활은 전두환-노태우 재임시기였고, 소속팀 포철의 구단주는 여당 국회의원 박태준이었다. 29만원 각하께서 선수 출장시키라는데 거부할 수 있을리가 있나. 당시 위용이 어느정도였느냐 하면 88올림픽에 프로선수들은 출장을 못한다고 해서 대학 졸업한 국대선수들이 프로로 올라가는 것을 막아버렸을 정도였다[3] 10강 본선[4] 24강 본선[5] 대한민국 월드컵 첫 골[6] 대한민국 월드컵 첫 승점[7] 이 골은 외국에서도 월드컵 역대 멋진 골을 선정하면 종종 순위권에 올라가는 환상적인 골이다. 실제로 영국 BBC 선정 멕시코 월드컵 최고의 골 베스트 20에서 박창선의 골(13위)과 함께 순위권(10위)에 올랐으며, FIFA 공식 유투브 채널에 올라온 1986 월드컵 TOP 10 골에서 10위를 차지했다.[8] 대한민국 월드컵 첫 다득점[9] 하지만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넣은 4골 중 3골에 관여하며 2경기 1골 2어시스트를 기록한 이 시기 최순호의 활약은 3년 전 청소년 대표팀 참사와 맞물려 이탈리아에 박두익 이후로 그 이름 석자가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아직도 이탈리아에서 그의 이름을 박두익과 함께 많이 안다고...[10] 24강 본선[11] 벨기에와의 첫 경기에서는 정용환이 주장이었고, 스페인 전은 최순호가 주장이었다.[12] 심지어 의리축구 등으로 인해 '최악'이라 불리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당시 피파랭킹 19위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무승부 승점 1점을 거뒀다.[13] 실제 최순호의 맏아들 이름은 최원영이다. 최로마에서 개명한 것이 아니고 집에서만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출처[14] 손흥민의 3골 1도움과 동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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