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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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102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忠州 淨土寺址 弘法國師塔 | Stupa of State Preceptor Hongbeop from Jeongtosa Temple Site, Chungju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면적
1기
지정연도
1962 12월 20일
건축시기
고려 현종 8년 (1017년)


파일:k20220611_174827.jpg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4. 국보 제102호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k20220611_173517.jpg

파일: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1.jpg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홍법국사탑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상륜부가 복원되기 전의 모습이다

忠州 淨土寺址 弘法國師塔.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은 고려시대 현종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화강암승탑[1]으로 홍법국사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은 본래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의 정토사지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 탑비와 함께 조선총독부 청사 앞뜰로 옮겨졌다. 정토사(淨土寺)의 창건연대과 같은 세부 연혁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어 본래의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성종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때 정토사에 고려왕조실록을 보관했었다고 전하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고려시대에는 상당히 중요한 사찰이었던 듯 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시기에 폐찰되어 조선 중기에는 이미 폐사지로 남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2]

정토사가 폐사된 이후 홍법국사탑과 홍법국사탑비, 법경대사탑비가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홍법국사탑과 홍법국사탑비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서울로 옮겨지고 법경대사탑비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정토사터는 충주댐 건설로 인해 인공호수인 충주호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수몰되어 버렸고, 마지막까지 제 자리에 남아있던 법경대사탑비는 결국 인근으로 옮겨지게 됐다.[3] 정토사와 관련된 유물로는 본 승탑을 비롯하여, 언급된 보물 제17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보물 제359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 등이 있다.

본 승탑의 주인인 홍법국사(弘法國師)는 신라말부터 고려초기 시기에 활동한 승려로, 문헌상 남아 있는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다행히도 홍법국사탑비가 남아 있어 생애를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승려로서의 최고 법계인 국사로 책봉됐을 만큼 당대에 명망이 높았던 고승이라 짐작 가능하다. 홍법국사탑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는 목종 시기에 입적한 것으로 보이는데, 목종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호를 홍법으로 내리고 탑명을 실상(實相)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홍법국사탑을 홍법국사실상탑이라고도 부른다.[4]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은 1962년에 국보 제102호로 지정됐으며, 2022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 중이다.


2. 내용[편집]



파일:k20220611_173452.jpg

국립중앙박물관 홍법국사탑 설명판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은 전체 높이 2.55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홍법국사탑의 구성은 받침돌과[5] 기단, 몸돌,[6] 지붕돌[7]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신라~고려시기까지 승탑들의 전형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8] 보이나 몸돌을 아예 구형(공모양)으로 만들어서 파격을 줬다. 또한 지붕돌 일부에 손상이 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파일: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2.jpg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9]
기단 아래에서 승탑 전체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8각을 이루고 있는데 돌 표면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줄무늬가 있다. 받침돌 위에는 승탑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형태의 기단이 있다. 기단은 세 부분으로 나눠서 볼 수 있는데, 연꽃 무늬를 새긴 하대석(아랫돌)과 무늬가 새겨진 중대석(가운데돌) 그리고 또다시 연꽃 무늬를 새긴 상대석(윗돌)으로 구분 가능하다.


파일:k20220611_173611.jpg

홍법국사탑 기단부
기단 부분에선 중대석이 눈에 띄는데,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용을 8각형의 각 면마다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새겼다.[10] 윗돌의 테두리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몸돌과 만나는 부분은 평평한 면을 두고 여기엔 연꽃 문양을 촘촘하게 새겼다.

홍법국사의 사리가 모셔졌던 몸돌은 본 승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인데,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구형으로 만들어서 다른 일반적 승탑들과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11] 몸돌에 새겨진 장식도 매우 인상적인데, 마치 공에 끈 3개를 묶듯이 두 줄로 된 선을 상하좌우로 한바퀴 씩 둘러서 서로 십자(十字)로 교차하게 했다. 또한 이렇게 만나는 4개의 교차점들에는 작고 단정한 꽃모양 장식을 새겨서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구에 미적인 포인트를 줬다. 몸돌의 위로는 원통 기둥이 하나 올라와서 지붕돌과 만난다.


파일:k20220611_174006.jpg

홍법국사탑 지붕돌 안 쪽의 조각
지붕돌도 8각의 형태인데 전체적으로 삿갓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돌의 귀퉁이 일부는 파손되어서 없다. 지붕돌 끄트머리들의 각 추녀#건축용어마다 꽃모양의 큰 귀를 달았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는 거의 다 떨어져나가고 없다. 지붕 표면에는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대신 지붕돌 안 쪽에는 비천상과 꽃이 번갈아가며 조각되어 있다. 홍법국사탑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어서 지붕돌 안 쪽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어렵지만, 이 역시도 다른 장식들 못지않게 대단히 수준 높은 조각솜씨를 보여준다.[12] 지붕돌 위의 상륜부(相輪部)[13]는 아예 증발해 버린 채로 상당히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홍법국사탑을 서울로 옮기기 이전에 촬영한 사진에는 상륜부가 명확하게 확인되나, 2018년까지 행방이 묘연했었다. 그러다가 2018년 7월 9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수장고에 정리도 안 된 상태로 잠들어 있는 유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홍법국사탑의 상륜부를 찾아냈다고 밝혔고, 복원을 진행하여 현재는 상륜부까지 온전한 상태다.[14]


파일:k20220611_173720.jpg

홍법국사탑 후면
이외에도 홍법국사탑은 대략적인 제작시기와 탑에 모셔진 사리의 주인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유물이라 할 수 있는데, 홍법국사탑비가 남아 있어서 꽤나 자세한 내역이 전해졌다.[15] 홍법국사의 행적은 문헌 자료로 전해지는 것은 없지만, 탑비에 기록된 비문을 통해 파악 가능한데 우선 탑의 주인이 홍법국사임이 확인되며, 탑비의 건립시기를 현종 8년(1017년)이라 밝혀서 최소한 1017년 경에는 홍법국사탑이 만들어졌었을 것이라고 추측 할 수 있다.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은 팔각원당형이라는 승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지만 탑신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파격을 행하여 미적으로 가치가 높고 새로운 기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승탑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또한 승탑 전반에서 보이는 섬세한 조각 솜씨와 재료 자체에서 드러나는 돌무늬가 잘 조화되었고, 전체적으로 곡선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데, 고려시대 석조 공예의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걸작 중 하나라고 평가 받는다.[16] 또한 탑비도 같이 전해져서 승탑의 주인과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은 이와 같은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 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2호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편집]




4. 국보 제102호[편집]



대한민국의 국보 제102호
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탑으로,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활약하였던 유명한 승려로서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禪)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다.
기단(基壇)은 네모난 바닥돌을 깐 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높직한 괴임을 두어 가운데받침돌을 올린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윗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솟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탑신(塔身)의 몸돌로,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다. 몸돌에는 공을 가로·세로로 묶은 듯한 십(十)자형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무늬를 두어 장식하고 있다. 지붕돌은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여덟 곳의 모서리마다 꽃조각을 둔 것이 눈에 띄는데, 아쉽게도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삿갓 모양으로 깊숙이 패인 지붕돌 밑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8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의 탑형식을 잃지 않으면서 일부분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작품으로, 제작연대는 고려 현종 8년(1017)이다. 공모양의 몸돌로 인해 ‘알독’이라고 불려지기도 한 이 탑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탑으로, 섬세한 조각과 단조로운 무늬가 잘 조화되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5. 둘러보기[편집]


파일:충주시 CI.svg
충주시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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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등록문화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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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탑은 불교 승려의 묘탑을 지칭하는 말이다.[2]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정토사지, 두산백과 - 정토사지[3] 이로 인해 정토사지는 국가 사적이나 시도지정기념물 등과 같은 문화재로 보호받지 못했다.[4]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홍법국사[5] 이를 지대석(地臺石)이라고도 한다.[6] 이를 탑신(塔身)이라고도 한다.[7] 이를 옥개석(屋蓋石)이라고도 한다.[8] 각 기단, 몸돌, 지붕돌 등을 바닥과 평행하게 자른다고 쳤을 때, 그 단면이 8각형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참조: 두산백과 - 팔각원당형 승탑[9] 위 사진은 과거 경복궁 시절의 사진으로 추정된다.[10] 다만 풍화에 의해 용들의 형태가 다소 마모됐다.[11] 이에 착안해 정토사지가 있던 마을의 사람들은 이 승탑을 알독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1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13] 이를 머리장식이라고도 한다.[14] 출처: 경향신문 2018년 7월 9일 기사 - 홍법국사탑 등 국보와 보물 고려 승탑들, 제 모습 찾는다...중앙박물관, 상륜부 찾아내 복원 예정[15] 세월의 흐름에 의해 풍화되어 비문이 마멸된 부분이 많아 온전한 내용 파악은 어렵다고 한다.[16]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