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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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해발 337.5m인 장미산을 중심으로 계곡을 감싸, 돌로 쌓은 산성이다. 수로 및 육로교통의 요충지이자 삼국시대에 전략적 거점이기도 한 이곳에는 백제시기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지만, 이와 같은 산성의 원류는 고구려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충주 고구려비’와 관련하여 고구려 세력의 남하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대림산성과 장미산성 내 설명판) 이 성과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충주의 서쪽 28리에 돌로 쌓은 옛성이 있다.”라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장미산고성유지(장미산에 오래된 성터가 남아있다)”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성곽은 다소 훼손된 상태로, 성의 크기는 높은 곳이 5m, 폭은 5~10m이며, 둘레는 2,940m이다.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소개 문구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 인근에 있는 산성으로 삼국의 각축지였던 충주에 소재하는 만큼 축조 주체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는 성곽이다. 사적 제400호.
과거에는 고구려 성곽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지만 발굴결과 백제가 가장 먼저 축조했고 이후 고구려가 잠시 점령했다가 신라가 최종적으로 손에 넣었다고 추정한다.
이름에 들어가는 장미(薔薇)는 장미꽃의 장미와 같은 한자이긴 하지만 꽃에서 유래한 이름은 아니고 이 성이 있는 장미산(337m)에서 유래했다.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보련과 장미라고 하는 남매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둘 다 장수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은 희생이 되어야 해서 각자 보련산(764m)과 장미산에 성을 쌓는 것으로 내기를 했는데 남동생인 장미가 누나 보련을 이겼다고 한다. 또는 이 산의 형태가 남한강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데 이것이 긴 꼬리 같은 모양이라고 해서 장미산(長尾山)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그랬던 것이 나중에 한자만 장미꽃의 장미로 바뀐 것이다.
2. 조사 내용[편집]
장미산성은 협축의 석성으로써 삼국시대의 토기들이 분포하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시·발굴 조사 이전에는 채집된 여러 삼국시대 토기들 가운데 고구려 토기의 성격을 갖는 토기가 일부 확인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장미산성의 인근에 중원 고구려비가 있고, 탑평리 유적[2] 에서 고구려 구들이 확인되기도 하였으며 장미산성에도 고구려 산성에서 주로 보이는 치(雉)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토기가 채집된 사실과 더불어 고구려 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더러 있었다.
2004년의 발굴조사에서 장미산성 성벽의 일부 구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고구려 산성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는 확인되지는 않았고 협축(夾築) 성벽의 축조기법을 확인하고 석환(石丸)[3] 무지가 조사되었을 뿐이었다.
장미산성의 북벽에 붙어있는 치성(雉城)은 석축이 일부 보강되었지만 위의 사진처럼 석축 성벽이 완전히 남지는 않았다. 치성의 윤곽을 따라서 굵은 주혈이 열상으로 배치된 양상은 백제가 초축했으나 고구려가 점령하면서 재사용된 도기동 목책성의 사례가 있기 때문에 또 마냥 고구려만의 특징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더군다나 목책성에 나중에 석축을 덧대 보강하는 양상은 남한지역에 소재하는 고구려의 크고 작은 보루에서도 확인기도 한다.[5]
성벽에 사용된 성석도 고구려 석성에서 보이는 쐐기형 석재의 양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편이다.
또 고구려 토기의 채집의 문제도 있다. 순수 고고학적 이유는 아니지만 1990년대부터 경기도의 북부 지역에서 확실한 고구려 산성이 확인되면서 남한 지역에서의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붐이 일어났는데, 그런 이유에서 유적에서 확인된 토기 조각 하나를 갖고 고구려토기라고 확실히 보기 어려움에도 니질 태토의 토기편인 경우 고구려 토기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장미산성 또한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지만
장미산성에 전면적인 발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벽 전반에 대해서 시굴조사를 하였던 바 지금까지는 백제에 의해서 가장 처음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또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목탄을 시료로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 분석결과는 490년이라고 나왔고, 출토되는 유물도 파편이긴 하지만 대부분 백제토기였기 때문에 5세기 중후반 즈음에는 분명히 백제가 점유한 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6]
한편 연대측정이 490년을 가리키는 것은 475년의 고구려 남정과 관련이 있음을 추정케도 한다. 장미산성의 축조 자체는 백제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6세기의 고구려의 남한 내 주요 거점이라는 충주의는 지역적 특징을 고려하면 고구려와 관련이 없었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지근거리에 위치하는 장미산성에서 고구려가 산성을 점유하였는
그뿐 아니라 멀지 않은 곳에 신라 고분군이 있기 때문에 신라가 만든 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조사 결과로 볼 때, 장미산성은 백제가 처음 지었으나 (중간에 고구려가 점유했을 수도 있고) 신라가 결국 손에 넣었다는 설이 타당해 보인다.
3. 관련 유적[편집]
충북, 대전 일대는 소위 중원지역이라고 지칭되며 삼국시대 5~6세기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관방시설이 굉장히 많다. 중원지역의 삼국시대 산성들이 실제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가능성은 낮지만 중부내륙 산성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등재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도 475년 고구려 남정과 관련하여 고구려의 남한 진출 및 점령과정을 엿 볼 수 있는 다른 관방유적들과도 관련이 있다.
4. 외부 링크[편집]
5. 사적 제400호[편집]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호)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