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타 호아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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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포르투갈 왕국과 브라질 왕국의 왕 주앙 6세의 왕비이자 페드루 4세와 미겔 1세의 어머니이자 마리아 2세의 할머니이다. 포르투갈에서는 카를로타 조아키나라고 불린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장녀이자 페르난도 7세의 누나이자 이사벨 2세의 큰 고모.
2. 작위[편집]
- 스페인의 인판타 카를로타 호아키나 전하 Her Royal Highness Infanta Carlota Joaquina of Spain (1775년 4월 25일 – 1785년 5월 8일)
- 브라질 공비, 브라간사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Brazil, Duchess of Bragança(1785년 5월 8일 – 1816년 3월 20일)
- 포르투갈, 브라질과 알가르브의 왕비 폐하 Her Most Faithful Majesty The Queen of the United Kingdom of Portugal, Brazil and Algarves (1816년 3월 20일 – 1822년 9월 7일)
-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왕비 폐하 Her Most Faithful Majesty The Queen of Portugal and the Algarves (1822년 9월 7일 — 1826년 3월 10일)
-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왕대비, 브라질의 황태후 폐하 Her Most Faithful Majesty The Queen Mother of Portugal and the Algarves, Empress of Brazil (1826년 3월 10일 ~ 1830년 1월 7일)
3. 생애[편집]
3.1. 스페인의 공주[편집]
카를로스 4세의 장녀이자 둘째로 태어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첫째가 요절하면서 맏이로 자랐다. 아버지인 카를로스 4세는 어리숙하고 무능했기에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가 정치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행보를 보면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어렸을 때 그녀의 고모할머니인 포르투갈의 왕대비 마리아나 빅토리아[1] 의 추진 하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에 혼담이 진행되었다. 1785년에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삼촌 가브리엘과 포르투갈의 마리아 1세의 딸 마리아나 비토리아의 정략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같은 해에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마리아 1세의 차남인 베자 공작 주앙과 결혼하게 되었다.
3.2. 포르투갈의 왕세자비[편집]
후에 주앙 6세가 되는 베자 공작 주앙은 결혼했을 당시 18살이었다. 반면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10살이었다. 당연히 주앙 6세는 어린 신부에게 관심이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5년 후에야 첫날밤을 치뤘다. 1788년에 주앙 6세의 형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주제가 사망하면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왕세자비가 되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첫 아이를 가지기도 전에 주앙 6세가 다른 여성을 임신시켜 스페인으로 보내버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성격이 매우 달랐다. 주앙 6세는 우유부단하고 게을렀으며, 정치보다는 종교에 좀 더 몰두했다. 또한 어머니 마리아 1세의 영향으로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거칠고 행동력이 있으며 야망이 넘쳤다. 부부 사이에서는 9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아홉번째 아이를 낳고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다.
포르투갈의 궁중은 스페인에 비해 매우 종교적이고 엄격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여러번 정치에 간섭하려 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포르투갈에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성질 나쁘고 못생긴 여자라는 평을 받았다. 부부가 낳은 아이들 중 밑에 애들은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바람을 펴서 낳았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는데,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평판이 안 좋기도 했지만 부부가 둘 다 워낙 인물이 안 좋은 데에 비해 아이들은 인물이 괜찮았기에 난 소문으로 보인다.
3.3. 포르투갈의 왕비[편집]
1807년에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정세가 급박해졌다. 포르투갈은 영국과 함께 나폴레옹에 맞섰지만 패배했고, 왕가는 브라질로 피신했다. 망명기간 동안 카를로타는 포르투갈보다는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있었던 스페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1816년, 마리아 1세가 사망하고 주앙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었다.
14년이 지나고 돌아온 포르투갈은 자유주의 혁명의 영향으로 변해있었다. 사람들의 반발을 제어할 수 없었던 주앙 6세는 입헌군주제를 승인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보수파였던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이에 반발해 자신과 정치 성향이 비슷한 막내아들 미겔 1세를 왕위에 올리려고 했다. 주앙 6세를 유폐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영국이 개입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미겔은 해외로 추방당하고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켈루스 궁에 가택연금을 당했다.
1826년에 주앙 6세가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심한 경련과 구토를 하다가 급사했기에 사람들은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왕을 암살했다고 의심했다. 건강 문제를 핑계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자 의혹은 커졌다. 현대의 연구 결과 주앙 6세의 시신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면서 이 의혹은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관련 논문
후계자인 페드루 4세는 당시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로 군림하고 있었다. 페드루 4세는 곧장 딸 마리아 2세에게 포르투갈의 왕위를 양도하고 쫓겨났던 동생 미겔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동안의 섭정은 페드루 4세의 동생이자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딸인 이자벨 마리아가 맡게 되었다. 그러나 미겔 1세가 왕위 찬탈을 시도하면서 포르투갈은 내전에 휩싸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잊혀진 전 왕비로 1830년에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4.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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