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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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국왕
카지미에시 4세
Kazimierz IV


이름
카지미에시 안제이 야기엘론치크
(Kazimierz Andrzej Jagiellończyk)
출생
1427년 11월 30일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사망
1492년 6월 7일 (64세)
리투아니아 대공국 가르디나스
재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1440년 6월 29일 ~ 1492년 6월 7일
폴란드 왕국의 왕
1447년 6월 25일 ~ 1492년 6월 7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1454년 결혼)
자녀
울라슬로 2세, 야드비가, 카지미에시,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조피아, 엘즈비에타, 지그문트 1세, 프리데리크, 엘즈비에타, 안나, 바르바라, 엘즈비에타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
어머니
조피아 홀샨스카
형제
브와디스와프 3세, 카지미에시
1. 개요
2. 행적
2.1. 어린시절
2.2. 리투아니아 대공
2.3. 즉위
2.5. 사망
3. 주요 자녀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폴란드어: Kazimierz IV Jagiellończyk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리투아니아어: Kazimieras IV Jogailaitis (카지미에라스 요가일라이티스)

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루테니아 출신 네번째 아내 조피아의 셋째 아들[1]로 태어나 꼭두각시로 써먹히기 위해 옹립당하기도 했지만,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동군연합을 공고히 다졌고, 튜튼 기사단을 몰아내어 그단스크를 탈환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명군으로 보이겠지만, 그가 아무 생각없이 남발했던 조항[2]들은 후대에 폴란드 왕권을 제한하는 족쇄로 작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멸망의 씨앗이 되었다.


2. 행적[편집]



2.1. 어린시절[편집]


개요에서 설명되듯이 네번째 아내의 둘째 아들이란 입지 때문인지 별다른 교육도 못받고 관심도 못받는 상당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즉위하게되자 법적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다. 그래봐야 사실 말이 좋아야 상속자지 아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다시 밀릴 운명이었다.


2.2. 리투아니아 대공[편집]


그런데 때마침 리투아니아 대공인 스비트리가일라가 후계자없이 사망하자[3] 브와디스와프 3세의 명으로 총독으로 파견된다. 그런데 써먹기 편한 꼭두각시를 원한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강제로 그를 대공으로 추대하고, 한동안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를 통치했다.


2.3. 즉위[편집]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자식도 남기지 못한채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하자, 폴란드 국왕도 겸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리투아니아로 건너갔기 때문에 폴란드의 궁정 생활보다 리투아니아에서 사냥하면서 노는 것을 더 즐겨 폴란드 국정에 관해서는 주교 임명권을 제외하면 소극적으로 일관했고 폴란드 귀족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며 한발 물러섰다.

1454년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엘리자베트[4]와 결혼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와 결혼 생활중 무려 13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었고, 이 또한 그의 정통성과 권력 외교관계를 강화시키는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2.4. 튜튼 기사단 복속[편집]


그리고 결혼식이 이뤄진 1454년 카지미에시 4세는 프로이센의 반 튜튼 기사단 세력과 밀약을 맺고 기사단을 공격해 13년 동안의 전쟁을 통해 단치히를 포함한 비스와 강 하류 영토를 모조리 탈환하고 튜튼 기사단을 쾨니히스베르크에 몰아넣은 뒤 이들을 겁박해 복속시키는데에 성공했다. 폴란드 왕국 입장에서는 150년 만에 고토 회복이었다. 이후 그단스크는 비스와 강 수운을 이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농산물을 서유럽으로 수출하는 창구로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2.5. 사망[편집]


1492년 현 벨라루스흐로드나(Гро́дна)[5]에서 죽음을 맞이하며[6] 유해는 크라쿠프바벨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3. 주요 자녀들[편집]




4. 기타[편집]


아들 중 한 명인 카지미에시(성 가시미로, 1458~1484)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사후 빌뉴스에 묻혔는데 기적을 인정받아 1522년에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성인으로 선포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Europa Universalis IV에서 4/4/1의 능력치와 기본적으로 학자 트레잇(기술 비용 -5%)을 가지고 있는 군주로 등장한다. 시작 시점인 1444년에 재위 중이지는 않고, 공위기를 거쳐 1440년대 후반에 뜨는 왕위 계승 이벤트를 통해 즉위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 마차시 1세가 개혁교회를 받아들이자 이에 반발한 헝가리 귀족들이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언급된다. 물론 상대가 그 마차시라 헝가리 귀족들이 박살나는 바람에 직접 등장하진 않는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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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둘째 형 이름도 카지미에시였으나 어린 시절 사망했다.[2] 물론 니힐 노비(Nihil novi)와 같은 특권은 4남 알렉산데르가 승인하기도 했고, 그가 승인했던 조항들은 정작 그가 살아있을 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고 선거왕제가 들어서 외국인 군주들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폴란드 왕권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3] 브와디스와프 2세&비타우타스 연배라 즉위할 때 이미 노인이었다.[4] 카지미에시 3세의 후손인데, 정확히 말하면 카지미에시 3세의 딸이 엘즈비에타 카지미에쥬부나인데 바로 엘즈비에타의 현손이다.[5] 폴란드어로는 그로드노(Grodno), 리투아니아어로는 가르디나스(Gardinas)[6] 사인은 폐렴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