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셀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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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28대 군주
Cleopatra Selene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파일:클레오파트라 셀레네.jpg

출생
기원전 135년 ~ 기원전 130년 사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사망
기원전 69년
셀레우코스 제국 셀레우키아
재위
셀레우코스 군주
기원전 82년 ~ 기원전 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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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Cleopatra Selene
가족
프톨레마이오스 8세(아버지)
클레오파트라 3세(어머니)
프톨레마이오스 9세(첫째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0세(둘째 남편)
안티오코스 8세(셋째 남편)
안티오코스 9세(넷째 남편)
안티오코스 10세(다섯째 남편)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코스(아들)
셀레우코스 7세(아들)?[1]
참전
아르메니아 전쟁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셀레우코스 왕조의 28대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로, 프톨레마이오스 9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잇따라 결혼했다가 이혼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로 시집갔다. 이후 내리 세 명의 남편과 결혼하다가 과부가 되길 반복했고, 안티오코스 12세나바테아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뒤 아들 안티오코스 13세를 내세우며 공동 왕을 칭했으나, 기원전 69년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2세에게 살해되었다.


2. 생애[편집]


기원전 135년 ~ 기원전 130년 사이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클레오파트라 3세 사이에서 출생했다. 기원전 116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죽은 뒤, 클레오파트라 3세는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새 파라오로 선출하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반발하자, 어쩔 수 없이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즉위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자신의 딸이지만 사사건건 갈등을 빛었던 클레오파트라 4세와 이혼하라고 강요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그 말에 따랐고, 클레오파트라 3세의 총애를 받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기원전 115년경 결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오빠이기도 했다.

기원전 107년,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신과 마찰을 자주 벌이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추방하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그녀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안티오코스 9세가 동맹을 맺을 걸 우려했다. 이에 기원전 103년, 그녀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이혼시키고, 안티오코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기원전 96년, 안티오코스 8세의 최고 관료였던 헤라클리온이 주군을 암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베로에아로 도주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9세가 안티오키아에 입성한 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했다.

기원전 96년 말, 안티오코스 9세는 안티오코스 8세의 장남 셀레우코스 6세와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새 왕이 수도에 입성하기 전에 도주했다. 이후 기원전 95년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10세가 아라도스에서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했다. 키케로는 훗날 안티오코스 13세가 두 사람 사이의 자식이라고 언급했다. 화폐학자 브라이언 크리드는 2002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공동 통치자의 초상화가 새겨진 주화 동전을 찾아낸 뒤, 이 새로 발견된 왕에게 '셀레우코스 7세'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하지만 동전의 상태가 심하게 손상되어 일부 글자를 읽을 수 없기에, '셀레우코스'라는 명칭을 거부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죽인 뒤

"셀레우코스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사로잡았다."

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른다면, 안티오코스 10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의 사이에서 여러 아들과 딸을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키케로의 언급으로 전해지는 안티오코스 13세 외에 다른 아들들은 문헌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기원전 92년 또는 기원전 88년, 안티오코스 10세는 길르앗의 여왕 라오디케를 도와 파르티아와 대적하던 중 전사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8세의 또다른 아들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를 공략하자, 그녀는 자식들과 함께 시리아에서 숨어지냈다. 그녀가 어디에 숨어지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파악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코엘레-시리아의 프톨레마이스 또는 킬리키아로 도주했을 것이다. 그러던 기원전 82년, 안티오코스 8세의 막내 아들 안티오코스 12세나바테아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이제 왕좌가 공석이 된 상황에서, 그녀는 아들 안티오코스 13세를 왕으로 선포했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통치자로서 동전에 새겨졌는데, 이에 따르면 그녀는 공동 왕이었다.[1]

하지만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의 옛 영토들은 외세에게 거의 잠식된 상태였다. 안티오키아 일대는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에게 공략되었고, 다마스쿠스 일대는 나바테아 왕국의 왕 아레타스 3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1세기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시리아를 다스렸다고 기록했다. 아마도 시리아의 몇몇 해안 도시가 그녀와 안티오코스 13세의 통치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75년, 안티오코스 13세는 로마를 방문하여 자신을 셀레우코스의 왕으로 인정하고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기원전 69년,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는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도시는 함락되었지만 루쿨루스의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북쪽으로 이동해야 했다고 한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티그라네스 2세는 프톨레마이스에서 사로잡은 여왕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셀레우키아에 감금한 뒤 나중에 죽여버렸다고 한다. 티그라네스 2세가 그녀를 죽인 건 그녀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다른 야심가들을 막으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기타[편집]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파라오의 배우자를 대부분 공동 파라오로 삼았는데,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1세는 특이하게도 공동 파라오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셀레우코스 제국에선 군주가 된 적도 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군주가 된 적이 없다. 이것은 권력욕이 무척 강했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가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동명이인들과의 구별을 위한 명칭들이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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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는 그러면서 아들 안티오코스 13세의 공동 왕 지위마저도 기원전 75년까지 섭정하여 사실상 단독 통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