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지 멜루 비아나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브라질의 제11대 부통령.
2. 생애[편집]
오우루 프레투 법학부(지금의 미나스제라이스 연방 대학교 법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주 서부에 위치한 우베라바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12년부터 1919년까지는 주 동남부의 카랑골라에서 판사로 일했다. 1924년 미나스제라이스 주지사로 선출되어 재직하다가 1926년 와싱톤 루이스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었고, 당선되면서 부통령이 되었다.
1929년 와싱톤 루이스 대통령은 같은 상파울루 주 출신의 줄리우 프레스치스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이는 상파울루 주와 미나스제라이스 주가 맺은 Cafe com Leite[1] 협의를 어기는 일이었고 협의대로라면 차기 대통령은 미나스제라이스 공화당 출신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어야 했다. 협의가 깨지자 미나스제라이스는 히우그란지두술과 동맹을 맺어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인 제툴리우 바르가스를 지지했다.
멜루 비아나는 미나스제라이스 출신임에도 프레스치스를 지지했고, 선거 유세 도중 1930년 2월 6일 미나스제라이스의 몬치스클라루스에서 총격을 당했다. 본인도 세 발을 맞았고, 그의 개인 비서를 포함해 5명이 현장에서 죽고, 14명이 부상을 당했다. 해당 사건은 배후가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지역 유력자 중 한 명인 주앙 아우베스라는 추측이 있다.
1930년 치러진 대선에서 줄리우 프레스치스가 승리했다. 하지만 패배한 제툴리우 바르가스는 이 결과에 불복했고 마침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주앙 페소아[2] 가 암살[3] 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히우그란지두술과 미나스제라이스를 중심으로 1930년 10월 3일 쿠데타가 발발했고, 와싱톤 루이스 정부와 함께 브라질 제1공화국도 붕괴되었다.
멜루 비아나 역시 유럽을 떠돌며 8년간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한편 브라질의 바르가스 시대에서는 부통령을 폐지했기 때문에 그는 한동안 브라질의 마지막 부통령이었다.
1945년 바르가스 정권이 무너지면서 새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임시 제헌의회가 세워졌고, 멜루 비아나는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임시 제헌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브라질 제4공화국의 헌법을 승인했고, 정식 의회가 출범하자 상원 부의장이 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22 14:02:27에 나무위키 페르난두 지 멜루 비아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