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이(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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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쿠시 왕국 나파타 시대 3대 왕이자 고대 이집트 제25대 왕조 초대 파라오. 누비아의 이집트 정복을 이끈 인물이다.
2. 행적[편집]
상이집트에 처음으로 진출하여 딸 아메니르디스를 테베의 "아문 신의 아내"로 임명한 카슈타와 페바트마(Pebatjma) 왕비의 장남이다. 남동생으로 샤바카가 있었고, 누이로 켄사, 페크사테르, 아메니르디스가 있었다. 이 중 켄사와 페크사테르는 그와 결혼했고, 쿠시 왕국 초대 왕으로 알려진 알라라의 딸 타비리와도 결혼했다. 그는 세 아내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셰비쿠, 타하르카와 아메니르디스의 뒤를 이어 아문 신의 아내가 된 셰펜웨펫 2세와 샤바카의 아내 칼하타, 타하르카의 아내가 된 타베케나문, 나파라예, 다하히테나문, 셰비쿠와 결혼한 아티 등 여러 딸을 두었다.
기원전 746년 피이가 집권했을 무렵, 이집트 제3중간기의 혼란상은 극에 달했다. 특히 나일강 삼각주에서 수많은 지역 파라오들이 자리를 잡고 세력다툼을 벌였다. 그러던 중 리비아인으로 알려진 테프나크트가 나일강 삼각주 서부의 도시인 사이스에서 세력을 뻗친 끝에 나일강 삼각주를 평정하고 멤피스와 이츠타위를 잇따라 공략했다. 이후 테프나크트의 군대가 헤라클레오폴리스를 포위하자, 그곳의 군주인 페프트자우와위바스트와 현지 쿠시 수비대가 피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피이 본인이 세운 승전비에 따르면, 당시 재위 20년(기원전 726년)이었던 그는 대규모 육군과 함대를 파견했다. 그 결과 쿠시 육군은 2차례의 전투 모두 적군을 격파했고, 쿠시 함대 역시 대규모 해전에서 모든 적군을 섬멸했다고 한다
피이는 여세를 몰아 하이집트 마저 평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쿠시에서 동원 가능한 전 병력을 소집한 뒤 나일강을 따라 북상했다. 도중에 테베에 방문한 그는 아문을 기리는 축제에 참가했다. 이어서 헤라클레오폴리스에 도착했고, 페프트자우와위바스트는 그를 주권자로 인정하고 금과 은, 청금석, 청동 등 막대한 선물을 바쳤다. 피이는 헤라클레오폴리스의 토트 신전에 찾아가서 황소와 거위를 희생제물로 바쳤다.
이후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출발한 그의 군대는 페르세켐케페라, 메르-아툼, 잇-타우이 등 여러 도시에 무혈 입성했다. 하지만 멤피스에서는 테프나크트의 정예병과 강력한 요새가 가로막았다. 이에 피이는 해군이 항구를 공격하는 동안 육군은 성벽을 공격하는 수륙양동전술을 동원했고, 쿠시군은 큰 손실을 감수하고 맹공을 벌인 끝에 멤피스를 함락했다. 테프나크트는 헤르모폴리스로 후퇴했고, 나일강 삼각주의 다른 통치자들은 피이에게 선물을 바치며 충성을 서약했다. 특히 아티비스의 페디즈 왕자는 피이를 자신의 도시로 초대한 후 극진하게 대접했다. 피이는 헤르모폴리스를 5개월간 공격한 끝에 함락시키고 끝까지 저항했던 모든 수비대와 주민을 학살한 뒤 그 도시를 페디즈에게 넘기는 것으로 보답했다.
테프나크트는 다시 삼각주 북서쪽의 한 섬으로 도주했지만, 더 이상 저항해 봐야 소용 없다는 걸 깨닫고 피이에게 선물을 보내고 편지를 보내 패배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편지를 보냈다. 다만 피이를 직접 알현하는 것만은 끝까지 거부했다. 피이는 이 정도면 이집트 평정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수도 나파타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도중에 멤피스의 프타 신전에서 막대한 제물을 바쳤고, 현지 사제들은 오랜만에 제물을 받은 것에 크게 기뻐하며 그를 파라오로 인정했다. 그 후 나파타에 도착한 그는 나파타 인근 제벨 바르칼의 아문 신전에 화강암으로 제작된 승전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1872년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에 의해 발견되었고, 1876년 에마뉘엘 드 루제에 의해 번역되었다. 그의 원정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이 기념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대 조상을 능가하는 업적을 세운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왕이자 살아있는 신이며, 자궁에서 나온 아툼의 현신이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어머니도 배 속의 아이가 지배자이자 좋은 신으로써 라가 두 팔을 뻗어 안을 정도로 사랑하는 아들 피이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느니라.
피이의 승전 기념비 서문
그러나 피이는 두 번 다시 나일강 삼각주에 나타나지 않았고, 테프나크트는 한동안 쿠시 왕국에 복종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가 삼각주 지역이 정치적 공백 상태에 빠지자 재차 정복 전쟁을 단행해 삼각주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재차 확립했다. 그는 자신을 '셉세레 테프나크트 1세'로 칭하고 사이스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훗날 피이의 아들 셰비쿠가 하이집트로 진군해 테프나크트의 후계자인 바켄라네프를 격파하고 사이스를 공략한 뒤에야 쿠시 왕국의 이집트 정복이 완수되었다.
파일:피이의 피라미드.jpg
제벨 바르칼의 아문 신전에는 그의 통치 30주년을 기념하는 헤브 세드 축제가 개최되었음을 암시하는 부조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2006년 초 데이르 엘 바흐리의 하트셉수트 여왕의 기념 사원 인근에서 발견된 파디아모네트 총독의 무덤에는 피이의 치세 27년에 세워진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로 볼 때 피이는 최소 30년간 통치를 이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무덤은 엘 쿠루에 있는 쿠시 왕국 왕실 묘지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인 엘 쿠루-17 피라미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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