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문사 (r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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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文思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의 아들 융(隆)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백제의 왕족. 의자왕의 손자로 부여융 또는 부여효의 아들이다.

여기서 부여효를 태자, 부여융은 왕자로 기록했고 문사는 '태자의 아들'이므로 효의 아들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효를 따라 웅진성으로 떠나지 않고 사비성에 잠시 남았다가 부여융과 상의하고 함께 뒤늦게 밧줄을 타고 탈출한다는 것이다. 원래 융이 백제 태자였다가 효가 태자 자리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융과 효의 사이가 좋았을 이유가 없으므로 의아한 대목인데 이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부여문사가 부여융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부여효의 아들이라고 보면 그만큼 백제멸망전 당시 상황이 예전의 악연 같은 건 신경쓰기 힘들 정도로 긴박했다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2. 생애[편집]


660년 사비성 전투에서 부여융과 함께 성을 빠져나와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당시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파천한 상태였고, 2번째 왕자인 부여태는 칭왕해서 사비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부여태는 부여융과 부여문사 및 백성들의 이탈을 막지 못했고, 결국 소정방의 당군이 사비성에 올라와 깃발을 세우자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3. 기타[편집]


  • 《삼국사기》 <백제본기> 660년조에서는 부여효가 태자로 나오지만, 중국 측 기록에서는 부여융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1]
  • 부여융의 아들이 맞을 경우, 부여문선부여덕장은 그의 형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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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당서》 <소정방전>에는 '적손문사(嫡孫文思)', 《신당서》 <소정방전>에는 의자왕의 손자(義慈孫), 《자치통감》에서는 (부여)융의 아들 문사(隆子文思)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