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급 잠수함/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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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77척의 가토급 잠수함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실전 배치되어 주로 태평양 해역에서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6척의 가토급 잠수함은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에 파견되어 작전을 수행했다.
이들의 주 임무는 미국 동부 해안에 출몰하는 유보트의 경계였고 횃불 작전에 동원되어 북아프리카 북서쪽 해역이나 비스케이 만 일대에서 상륙작전 지원 임무에 투입되었지만 전과 자체는 미미한 편이어서 43년기에 전 함정은 태평양 전선으로 전장을 옮기게 된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이후, 가토급 잠수함은 단 한척인 드럼만이 완공되어 조정 훈련중에 있었으며 1942년기동안 총 8척이 실전 배치되어 태평양에 투입되었으나 1943년 후반까지 신형 어뢰인 Mark.14의 오작동과 불발, 당시로서는 원할하게 할수 없었던 공격 전술과 기타의 이유들로 인해 전과가 상당히 미미했다.
1942년 가토급을 포함한 미 해군 잠수함들이 세운 격침전과가 미미한 데에는 나름대로 그 이유가 존재했다.
흔히 미국 특유의 생산량 덕분에 미 해군 잠수함 역시도 건조척수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1941년 12월 7일 기준으로 보아도, 전쟁 말을 보아도 미 해군의 잠수함 척수는 극히 모자랐다. 2차대전 동안 건조/보유 및 실전배치된 모든 미해군 잠수함은 총 340척 정도인데, 진주만 공습 당시 미 해군 잠수함의 보유량은 다음과 같다.
O급 잠수함 8척. 이들중 2척은 사고로 손실하여 실질적으로는 6척이 배치 중.
R급 잠수함 27척. 이들 중 3척은 나중에 영국 해군에게 대여되었으며 2척이 전쟁 전에 사고로 손실되었으며 7척이 퇴역해 해체되었으므로 총 18척.
S급 잠수함 51척. 이중 4척은 전쟁 전 사고로 손실하였으며 전간기 동안 6척이 퇴역해 해체되었고 전쟁 발발 이후 6척이 영국 해군에게 대여되었기에 41척.
바라쿠다급 3척.
아르고너트급 1척.
나왈급 2척.
돌핀급 1척.
카샬롯급 2척.
포퍼즈급 2척.
퍼치급 6척.
샤크급 2척.
새먼급 6척.
사르고급 10척.
탬버급 6척.
거급 6척.
매크럴급 2척.
대강 110척이고 가토급 약 73척이 한창 건조 중이거나 예산을 인가받을 예정이었다. 여기에 대서양에서 U보트를 경계하기 위해 파견되어 있는 배들까지 제외하고 나면, 실질적으로 진주만 공습 이후로 태평양전선에서 패트롤을 수행할 수 있는 잠수함의 척수는 훨씬 떨어지게 된다.
일단 O급 잠수함은 전부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태평양에서 작전하질 않았으며 대서양에서도 훈련용 잠수함 및 예비로서 운영되었다.. 그래서 태평양전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잠수함으로선 완전히 제외되며 R급 잠수함 역시도 전 함정이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완전 제외.
S급 잠수함의 경우 18척이 태평양에 배치되어 있었고 나머지 23척은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바라쿠다급 역시도 3척 전부 대서양 배치로 완전 제외. 매크럴급 2척 모두 대서양 배치로 제외.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개전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 작전이 가능했던 잠수함은 58척 정도였다. 이 숫자로는 넓었던 태평양을 커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여기에 체급이나 임무 등으로 인해서 장거리까지 나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잠수함 역시도 제한이 된다.
우선 S급의 경우 순항 속도인 10노트를 기준으로 5천노티컬마일, 즉 9천3백km정도의 항속거리밖에 내질 못해 실질적으로 연안작전이나 매복, 수송 임무에나 투입할 수 있었던 수준이었고 함령이 15년을 넘은 배들이 많아 실질적인 가동률은 훨씬 떨어지는 편이었다.
아르고너트급과 나왈급의 경우 미해군 최대의 덩치를 자랑하는 잠수함 답게 2만5천 노티컬마일, 약 4만6천km에 달하는 장대한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잠수완료시간 및 중성부력 유지능력, 잠수시간 등에 많은 결함과 문제점이 있었고 역시 함령이 상당히 지난 상태이기에 안심하고 패트롤을 보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워낙 다급했던 터라 수송임무나 패트롤을 보내는 상황이었으며 카샬롯급의 경우 1번함인 카샬롯은 시험함 성격이 매우 강해 실질적으로 시험/훈련용 잠수함으로 쓰였고 초반을 제외하면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기에 남은 1척인 커틀피쉬만이 패트롤을 수행할 수 있었다.
사르고급의 경우 개전 당시에도 최신형 잠수함으로서 일선에서 임무를 기대해 볼 수 있으나 1척인 씨 라이온이 1941년 12월 10일 케비테 항에서 정박중 일본군의 폭격으로 항내에 착저, 전손 처리되어 폐기되었으므로 운영 가능한 잠수함은 총 9척.
이런 제한사항들을 종합해 볼 경우, 전쟁 초반 일본군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가 가능했던 잠수함은 약 39척. 연안작전 및 매복만을 주로 수행하는 상황이라도 58척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용가능 전력이 부족한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가토급의 경우 앞서 서술했듯 개전 당시 단 1척, 드럼만이 완공되어 조정 훈련중에 있었고 9척 포함 10척이 1942년기에 실전 배치되어 태평양으로 전속이동이 되었기에 1942년 말 기준으로도 10척만이 추가 배치되는 상황이었으며 총 8척의 미국 잠수함이 작전 중 격침당하거나 좌초, 사고로 손실되었다.
개전 이후 밀리던 연합군의 사정에 따라, 일부 잠수함들은 지상군에 대한 물자 지원과 수송임무, 퇴각 작전 지원 등에 투입되어서 일본 해군의 군함이나 수송선단에 신경을 쓸 겨를이 많이 없었다. 실제로 1942년기에 가토급 잠수함을 포함한 미국 잠수함들의 전과부족의 이유는 어뢰결함보다도 이 점이 가장 컸었는데,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 대신 정찰 및 수송임무와 함대 지원임무, 특수임무에 주로 편중된 임무들 때문에 실질적으로 전과를 세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으며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선 상황 때문에 수송선단 및 함대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일본 함대의 본격적인 침공에 대비해 초계임무까지 수행해야 했으며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도 주력 함대의 정찰 지원을 위해서 19척의 잠수함들이 배치되었기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도 잠수함대의 적극적인 공세는 무리에 가까웠다. 이것은 가토급 10척이 1942년 말까지 태평양 전선에 배치되면서도 지속된 상황.
또한 194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이 개시될 시점, 미 해군 정보부에서 얻어낸 암호 해독및 도청을 통한 정보를 통해 미 해군 잠수함들은 적은 척수임에도 불구하고 조기에 일본 수송선단의 예상 이동 위치에 매복해 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1]
하지만 전쟁 초반의 사정은 달랐는데, 당장 진주만 공습 이후 긴급하게 패트롤 임무를 수행한 잠수함들도 1941년동안 꼴랑 3척 격침시키고 돌아오는데에 그칠 정도였는데 이유는 일본 수송선단 및 함대에 대한 정보 부족의 이유가 매우 컸으며 당시에는 미국의 정보력이 차마 미치질 못했으며 이에 따라 무작정 나가보고 발견하면 대응하는 식의 잠수함 운영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전간기 시절 미해군은 잠망경 관측을 통한 사격제원 획득보다는 음탐 접촉을 통한 사격제원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대강 음탐접촉으로 적함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다면, 분당 스크류 회전수를 통한 속도 예상, 음탐사[2] 의 감을 이용한 적함과의 거리, 적함의 침로 등을 예상을 해야했으며 설령 오차가 난다 하더라도 자기기폭장치가 있으니 직접 명중하지 않더라도 이게 제대로 터져주어 손상을 입히리라 믿었었다.
나름 선진적인 공격 개념이긴 했으나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이상적인 상황에서나 이루어질까 말까한 공격전술이었다.
잠수함이 목표에 대해 어뢰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선 자함과 적함과의 거리, 적함 방위, 자함 속도, 적함 속도, 적함 침로 등의 사격제원을 얻어내 TDC에 입력해 사격제원을 송출해 어뢰에 입력해야 했는데, 일단 적함과 자함간의 거리에서 상당한 오차가 발생하게 되며 소나 조작 요원의 감으로는 적함의 거리가 멀다, 가깝다 정도만 어느정도 확인 가능했고 정확한 거리는 파악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소나 핑을 통해 적함과의 거리를 정확히 잴 방법이 있으나, 소나 핑으로 인해 생기는 소음은 잠수함의 정체를 드러내는 행위이기에 호위전력이 있을 경우 소나 핑 역시도 상당히 제한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초반에 이 공격방법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후 미국 잠수함들은 독일식의 "잠수하는 어뢰정" 개념의 공격방식으로 꽤 빠른시간 내에 전환하게 되었다.[3]
이렇듯, 어뢰 문제는 분명 심각했으나 가끔은 이 어뢰도 본래 목적대로 제대로 작동해준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렇듯이 전과 부족을 어뢰 결함만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당시 미 해군 잠수함대가 전체적으로 처한 상황이 매우 복합적이었던 상황이었으며 1943년 말기에 일본 수송선단의 주요 루트로 잠수함을 보내기 시작하며 전반적인 잠수함 장교들의 대대적 교체가 이루어지고 어뢰 역시도 이후 개량을 거쳐 높은 신뢰성을 가진 Mark.23 어뢰는 물론이고 독일의 G7e 어뢰에 이은 두 번째의 잠수함 발사 유도어뢰인 Mark.27 음향유도어뢰를 사용하는 등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후기에 들어서자마자 가토급을 포함한 미 해군 잠수함은 52척을 손실, 잠수함대 소속 장병들과 동승한 육군, 해병대, 민간인 총합 3,630명이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 실종되거나 사고로 사망하고 포로로 잡혀 포로수용소에서 병사하거나 처형당했으며 원인 불명의 사유로 실종되었다. 이들 잠수함들은 미해군 전체의 약 5%의 척수만 존재했으며 JANAC기준 201척 540,192톤의 일본해군 군함을 격침시키고 1,113척 4,779,902톤의 일본 상선을 격침시켰다. 이 수치는 일본 전체 선적 손실의 54.6%에 달하며 항공모함 함재기들과 마찬가지로 미 해군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창이었으며 태평양 해저전의 대승리에 큰 축을 담당하였다. 활동 해역은 주로 필리핀 일대, 북태평양, 남서태평양 해역 거의 전체, 동중국해, 일본 근해와 한반도 주위의 황해, 남해, 동해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평소에는 단함 혼자서 초계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은 특이 단함 작전 사례.
이후 1943년기부터 U보트와 유사한 늑대 떼 작전을 구사하기도 했는데 미국 해군 잠수함대가 최초로 감행한 울프팩은 1943년 8월 1일, 미드웨이 일대를 바탕으로 가토급 잠수함 14번함 SS-225 세로(Cero)와 24번함 SS-235 샤드(Shad), 거급 잠수함 3번함 SS-208 그레이백(Grayback) 3척으로 기록된다.
주요 목표는 일본의 각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자원, 특히 석유를 수송하던 유조선들 및 일본 본토에서 태평양 지역으로 파견되는 병력 수송선들이 주요 타겟이 되었으며 사르고급, 발라오급 등의 주력 잠수함들과의 늑대 떼 작전 등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혀 일부 수송선단의 경우 수송작전 와중에 공격을 받아 평균 2000명에서 히-71선단의 예처럼 수송선 및 해군 승무원들 포함 파견 병력의 사망자들만 7천명에서 거의 8천명에 육박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다음은 일본 수송선단 역사상 미국 잠수함들의 늑대 떼 작전중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71선단의 사례.
이렇게 수송 도중에 공격을 받아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부대 건재조차도 유지 못하는 일본군 부대들은 안 그래도 미군의 화력에 압도되는 마당에 병력조차 적어 찬란하게 옥쇄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지상군의 작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셈.
거기에 미친 것 같은 무장능력을 바탕으로 웬만한 소형 선박들은 덱건이나 기관총만으로도 상대할 지경이었으며 가끔 일본 수송선들에 대해서도 덱건을 쏴대는 등의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특히 잠수함 잡겠다고 멋모르고 달려드는 배들이 주로 당했다. 다음은 실제 사례.
수송선단을 노리는 통상파괴전뿐만 아니라 일본 해군 군함들에 대한 공격도 서슴없었으며 이에 상당한 전과를 얻어냈다. 그 중 일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 중 4척 격침이 가토급 잠수함의 작품. 당장 태평양 전쟁 쪽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 중 알 사람은 알 만한 유명한 일본 군함들이 가토급 잠수함에게 사냥당했다. 좀 더 하자면, 전함 빼고 안 가라앉혀본 군함이 없다. 한 술 더 뜨면, 안 건드려본 배가 없다.
단함 순찰이나 늑대 떼 작전중이 아니더라도, 함대전에 참가하여 정찰 및 적 함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사례도 다수인데, 가토급 잠수함 4번함 알바코어와 33번함 카발라는 필리핀 해 해전 중 일본 해군의 정규 항공모함 두 척을 격침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기록했다. 가뜩이나 공중전에서 압도적인 스코어를 기록하며 우주 너머로 날아가고 있던 일본군에게 있어 지옥과도 같았던 순간을 장식해냈다.
또한 레이테 만 해전의 전초전에서 가토급 잠수함 두 척의 합동 공격으로 일본 수상함 전력의 핵심이었던 중순양함에 대한 격침/피해 전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가토급 잠수함의 공격은 이런 주력함들에 대한 공격 외에도 잠수함의 천적이라는 대잠 해방함들과 구축함에게도 가해졌는데, 이는 일본 해군의 낙후된 대잠 전력과 대잠작전에 대한 낮은 인식, 갈수록 정상적인 표적을 찾기힘들어 뭐라도 잡고보자는 미 해군 잠수함 함장 및 승조원들의 욕심까지 겹쳐 잠수함에게 역으로 당해버리는 구축함과 해방함이라는 기괴한 기록을 만들고 말았다. 실제로 가토급 잠수함과 일본 구축함, 대잠 해방함과의 교환비는 가토급 잠수함이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가토급 잠수함은 항공모함 2척, 호위항공모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4척(1척은 공동격침), 구축함 22척, 잠수함 5척, 대형 어뢰정 및 해방함, 호위함 총 26척, 기뢰부설함 8척 등 다수의 일본 해군 군함을 격침시켰다.
함대전에서도 정찰 및 지원 임무를 톡톡히 해냈는데,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곳곳에 매복해 있던 가토급 잠수함들 때문에 거의 실시간으로 일본 함대의 위치가 보고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일부 가토급들은 기습적인 게릴라식 공격을 가해 일본 함대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이하는 상세.
또한, 태평양에 있는 각종 섬에 대한 지상군 및 게릴라들에 대한 물자 지원, 불시착하거나 추락한 항공기에서 탈출한 조종사들을 구조하는 임무 등에서도 맹활약했다. 꼴랑 조종사나 항공승무원 구조하는게 뭐 대수냐 하겠지만, 교육하는 데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귀중한 인력인 파일럿을 구조 잘 하는것만으로도 인원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중 하나다. 대표적인 파일럿 구조 사례로 전 미국 대통령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19번함 핀백(Finback)에게 구조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침몰하는 일본군 선박에서 탈출한 연합군 포로의 구출작전에도 동원되었으며 조난자가 발생하거나 연합군 소속 함정이 피해를 입어 좌초하거나 침몰을 한 경우에도 구조작전에 투입되어 활약했다. 아래는 13번함 SS-224 코드(Cod)의 네덜란드 해군 잠수함 O-19 승무원들의 구조 동영상.
일부 배들은 덱건이나 로켓탄 등의 무장으로 일본군의 주요 거점에 포격을 가하는 등 테러 공격을 가하기도 했으며 일부 가토급 잠수함은 아예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 폭탄 공격을 하는 등의 특수전 임무도 기꺼이 수행해 내 잠수함의 범용성을 뽐내고 특수전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도 공헌했다. 다음은 실제 사례.
전쟁 말기에는 더 가라앉힐 상대가 없어 목재 선박들이나 범선, 어선들에 대한 공격도 가할 정도였으며 이들을 침몰시키는데에 쓰는 어뢰가 아깝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심지어 어뢰가 아깝다는 이유로 부상해서 덱건이나 기관포, 기관총 등으로 직접 공격을 해버리는 사례도 늘어났고 어선 같은 소형선의 경우엔 이조차도 아깝다며 들이박아서 가라앉히는 일까지 벌어졌다.
거기에 일본의 거의 전 해역에 기뢰를 도배해 보급선을 원천 봉쇄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으며 그나마도 유일하게 남아있던 조선/만주국-일본 간의 수송 라인을 끊어버렸는데, 일본은 이때의 뼈아픈 경험 때문에 미국 잠수함과 기뢰에 그야말로 학을 떼다시피 했다. 45년도 일본의 거의 모든 해안에는 물에 퉁퉁 불은 시체가 떠밀려왔다는 괴담을 만들고 근 최근까지도 이 기뢰들이 발견될 정도이며 현 해상자위대가 가공할 대잠수함 전력과 기뢰전 능력을 갖추게 하는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기도 했다.[14]
반면, 이렇다 할 활약도 하지 못하고 가라앉아버린 가토급 잠수함도 있으며 코비나, 도라도, 골렛 3척이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가토급은 총 20척이 일본군의 공격이나 사고, 기뢰접촉 및 원인불명의 사유로 침몰했으며 살아남은 가토급 잠수함들은 한창 일본을 굶겨죽이던 도중 종전을 맞게 된다.
1. 개요[편집]
총 77척의 가토급 잠수함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실전 배치되어 주로 태평양 해역에서 활동했다.
2. 대서양 전투[편집]
태평양 전쟁 발발 후, 6척의 가토급 잠수함은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에 파견되어 작전을 수행했다.
이들의 주 임무는 미국 동부 해안에 출몰하는 유보트의 경계였고 횃불 작전에 동원되어 북아프리카 북서쪽 해역이나 비스케이 만 일대에서 상륙작전 지원 임무에 투입되었지만 전과 자체는 미미한 편이어서 43년기에 전 함정은 태평양 전선으로 전장을 옮기게 된다.
3. 태평양전쟁 초반[편집]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이후, 가토급 잠수함은 단 한척인 드럼만이 완공되어 조정 훈련중에 있었으며 1942년기동안 총 8척이 실전 배치되어 태평양에 투입되었으나 1943년 후반까지 신형 어뢰인 Mark.14의 오작동과 불발, 당시로서는 원할하게 할수 없었던 공격 전술과 기타의 이유들로 인해 전과가 상당히 미미했다.
1942년 가토급을 포함한 미 해군 잠수함들이 세운 격침전과가 미미한 데에는 나름대로 그 이유가 존재했다.
흔히 미국 특유의 생산량 덕분에 미 해군 잠수함 역시도 건조척수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1941년 12월 7일 기준으로 보아도, 전쟁 말을 보아도 미 해군의 잠수함 척수는 극히 모자랐다. 2차대전 동안 건조/보유 및 실전배치된 모든 미해군 잠수함은 총 340척 정도인데, 진주만 공습 당시 미 해군 잠수함의 보유량은 다음과 같다.
O급 잠수함 8척. 이들중 2척은 사고로 손실하여 실질적으로는 6척이 배치 중.
R급 잠수함 27척. 이들 중 3척은 나중에 영국 해군에게 대여되었으며 2척이 전쟁 전에 사고로 손실되었으며 7척이 퇴역해 해체되었으므로 총 18척.
S급 잠수함 51척. 이중 4척은 전쟁 전 사고로 손실하였으며 전간기 동안 6척이 퇴역해 해체되었고 전쟁 발발 이후 6척이 영국 해군에게 대여되었기에 41척.
바라쿠다급 3척.
아르고너트급 1척.
나왈급 2척.
돌핀급 1척.
카샬롯급 2척.
포퍼즈급 2척.
퍼치급 6척.
샤크급 2척.
새먼급 6척.
사르고급 10척.
탬버급 6척.
거급 6척.
매크럴급 2척.
대강 110척이고 가토급 약 73척이 한창 건조 중이거나 예산을 인가받을 예정이었다. 여기에 대서양에서 U보트를 경계하기 위해 파견되어 있는 배들까지 제외하고 나면, 실질적으로 진주만 공습 이후로 태평양전선에서 패트롤을 수행할 수 있는 잠수함의 척수는 훨씬 떨어지게 된다.
일단 O급 잠수함은 전부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태평양에서 작전하질 않았으며 대서양에서도 훈련용 잠수함 및 예비로서 운영되었다.. 그래서 태평양전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잠수함으로선 완전히 제외되며 R급 잠수함 역시도 전 함정이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완전 제외.
S급 잠수함의 경우 18척이 태평양에 배치되어 있었고 나머지 23척은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바라쿠다급 역시도 3척 전부 대서양 배치로 완전 제외. 매크럴급 2척 모두 대서양 배치로 제외.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개전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 작전이 가능했던 잠수함은 58척 정도였다. 이 숫자로는 넓었던 태평양을 커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여기에 체급이나 임무 등으로 인해서 장거리까지 나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잠수함 역시도 제한이 된다.
우선 S급의 경우 순항 속도인 10노트를 기준으로 5천노티컬마일, 즉 9천3백km정도의 항속거리밖에 내질 못해 실질적으로 연안작전이나 매복, 수송 임무에나 투입할 수 있었던 수준이었고 함령이 15년을 넘은 배들이 많아 실질적인 가동률은 훨씬 떨어지는 편이었다.
아르고너트급과 나왈급의 경우 미해군 최대의 덩치를 자랑하는 잠수함 답게 2만5천 노티컬마일, 약 4만6천km에 달하는 장대한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잠수완료시간 및 중성부력 유지능력, 잠수시간 등에 많은 결함과 문제점이 있었고 역시 함령이 상당히 지난 상태이기에 안심하고 패트롤을 보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워낙 다급했던 터라 수송임무나 패트롤을 보내는 상황이었으며 카샬롯급의 경우 1번함인 카샬롯은 시험함 성격이 매우 강해 실질적으로 시험/훈련용 잠수함으로 쓰였고 초반을 제외하면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기에 남은 1척인 커틀피쉬만이 패트롤을 수행할 수 있었다.
사르고급의 경우 개전 당시에도 최신형 잠수함으로서 일선에서 임무를 기대해 볼 수 있으나 1척인 씨 라이온이 1941년 12월 10일 케비테 항에서 정박중 일본군의 폭격으로 항내에 착저, 전손 처리되어 폐기되었으므로 운영 가능한 잠수함은 총 9척.
이런 제한사항들을 종합해 볼 경우, 전쟁 초반 일본군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가 가능했던 잠수함은 약 39척. 연안작전 및 매복만을 주로 수행하는 상황이라도 58척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용가능 전력이 부족한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가토급의 경우 앞서 서술했듯 개전 당시 단 1척, 드럼만이 완공되어 조정 훈련중에 있었고 9척 포함 10척이 1942년기에 실전 배치되어 태평양으로 전속이동이 되었기에 1942년 말 기준으로도 10척만이 추가 배치되는 상황이었으며 총 8척의 미국 잠수함이 작전 중 격침당하거나 좌초, 사고로 손실되었다.
개전 이후 밀리던 연합군의 사정에 따라, 일부 잠수함들은 지상군에 대한 물자 지원과 수송임무, 퇴각 작전 지원 등에 투입되어서 일본 해군의 군함이나 수송선단에 신경을 쓸 겨를이 많이 없었다. 실제로 1942년기에 가토급 잠수함을 포함한 미국 잠수함들의 전과부족의 이유는 어뢰결함보다도 이 점이 가장 컸었는데,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 대신 정찰 및 수송임무와 함대 지원임무, 특수임무에 주로 편중된 임무들 때문에 실질적으로 전과를 세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으며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선 상황 때문에 수송선단 및 함대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일본 함대의 본격적인 침공에 대비해 초계임무까지 수행해야 했으며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도 주력 함대의 정찰 지원을 위해서 19척의 잠수함들이 배치되었기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도 잠수함대의 적극적인 공세는 무리에 가까웠다. 이것은 가토급 10척이 1942년 말까지 태평양 전선에 배치되면서도 지속된 상황.
또한 194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이 개시될 시점, 미 해군 정보부에서 얻어낸 암호 해독및 도청을 통한 정보를 통해 미 해군 잠수함들은 적은 척수임에도 불구하고 조기에 일본 수송선단의 예상 이동 위치에 매복해 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1]
하지만 전쟁 초반의 사정은 달랐는데, 당장 진주만 공습 이후 긴급하게 패트롤 임무를 수행한 잠수함들도 1941년동안 꼴랑 3척 격침시키고 돌아오는데에 그칠 정도였는데 이유는 일본 수송선단 및 함대에 대한 정보 부족의 이유가 매우 컸으며 당시에는 미국의 정보력이 차마 미치질 못했으며 이에 따라 무작정 나가보고 발견하면 대응하는 식의 잠수함 운영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전간기 시절 미해군은 잠망경 관측을 통한 사격제원 획득보다는 음탐 접촉을 통한 사격제원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대강 음탐접촉으로 적함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다면, 분당 스크류 회전수를 통한 속도 예상, 음탐사[2] 의 감을 이용한 적함과의 거리, 적함의 침로 등을 예상을 해야했으며 설령 오차가 난다 하더라도 자기기폭장치가 있으니 직접 명중하지 않더라도 이게 제대로 터져주어 손상을 입히리라 믿었었다.
나름 선진적인 공격 개념이긴 했으나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이상적인 상황에서나 이루어질까 말까한 공격전술이었다.
잠수함이 목표에 대해 어뢰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선 자함과 적함과의 거리, 적함 방위, 자함 속도, 적함 속도, 적함 침로 등의 사격제원을 얻어내 TDC에 입력해 사격제원을 송출해 어뢰에 입력해야 했는데, 일단 적함과 자함간의 거리에서 상당한 오차가 발생하게 되며 소나 조작 요원의 감으로는 적함의 거리가 멀다, 가깝다 정도만 어느정도 확인 가능했고 정확한 거리는 파악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소나 핑을 통해 적함과의 거리를 정확히 잴 방법이 있으나, 소나 핑으로 인해 생기는 소음은 잠수함의 정체를 드러내는 행위이기에 호위전력이 있을 경우 소나 핑 역시도 상당히 제한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초반에 이 공격방법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후 미국 잠수함들은 독일식의 "잠수하는 어뢰정" 개념의 공격방식으로 꽤 빠른시간 내에 전환하게 되었다.[3]
이렇듯, 어뢰 문제는 분명 심각했으나 가끔은 이 어뢰도 본래 목적대로 제대로 작동해준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렇듯이 전과 부족을 어뢰 결함만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당시 미 해군 잠수함대가 전체적으로 처한 상황이 매우 복합적이었던 상황이었으며 1943년 말기에 일본 수송선단의 주요 루트로 잠수함을 보내기 시작하며 전반적인 잠수함 장교들의 대대적 교체가 이루어지고 어뢰 역시도 이후 개량을 거쳐 높은 신뢰성을 가진 Mark.23 어뢰는 물론이고 독일의 G7e 어뢰에 이은 두 번째의 잠수함 발사 유도어뢰인 Mark.27 음향유도어뢰를 사용하는 등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4. 태평양 전쟁 중후반[편집]
태평양 전쟁 중-후기에 들어서자마자 가토급을 포함한 미 해군 잠수함은 52척을 손실, 잠수함대 소속 장병들과 동승한 육군, 해병대, 민간인 총합 3,630명이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 실종되거나 사고로 사망하고 포로로 잡혀 포로수용소에서 병사하거나 처형당했으며 원인 불명의 사유로 실종되었다. 이들 잠수함들은 미해군 전체의 약 5%의 척수만 존재했으며 JANAC기준 201척 540,192톤의 일본해군 군함을 격침시키고 1,113척 4,779,902톤의 일본 상선을 격침시켰다. 이 수치는 일본 전체 선적 손실의 54.6%에 달하며 항공모함 함재기들과 마찬가지로 미 해군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창이었으며 태평양 해저전의 대승리에 큰 축을 담당하였다. 활동 해역은 주로 필리핀 일대, 북태평양, 남서태평양 해역 거의 전체, 동중국해, 일본 근해와 한반도 주위의 황해, 남해, 동해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평소에는 단함 혼자서 초계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은 특이 단함 작전 사례.
이후 1943년기부터 U보트와 유사한 늑대 떼 작전을 구사하기도 했는데 미국 해군 잠수함대가 최초로 감행한 울프팩은 1943년 8월 1일, 미드웨이 일대를 바탕으로 가토급 잠수함 14번함 SS-225 세로(Cero)와 24번함 SS-235 샤드(Shad), 거급 잠수함 3번함 SS-208 그레이백(Grayback) 3척으로 기록된다.
주요 목표는 일본의 각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자원, 특히 석유를 수송하던 유조선들 및 일본 본토에서 태평양 지역으로 파견되는 병력 수송선들이 주요 타겟이 되었으며 사르고급, 발라오급 등의 주력 잠수함들과의 늑대 떼 작전 등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혀 일부 수송선단의 경우 수송작전 와중에 공격을 받아 평균 2000명에서 히-71선단의 예처럼 수송선 및 해군 승무원들 포함 파견 병력의 사망자들만 7천명에서 거의 8천명에 육박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다음은 일본 수송선단 역사상 미국 잠수함들의 늑대 떼 작전중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71선단의 사례.
이렇게 수송 도중에 공격을 받아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부대 건재조차도 유지 못하는 일본군 부대들은 안 그래도 미군의 화력에 압도되는 마당에 병력조차 적어 찬란하게 옥쇄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지상군의 작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셈.
거기에 미친 것 같은 무장능력을 바탕으로 웬만한 소형 선박들은 덱건이나 기관총만으로도 상대할 지경이었으며 가끔 일본 수송선들에 대해서도 덱건을 쏴대는 등의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특히 잠수함 잡겠다고 멋모르고 달려드는 배들이 주로 당했다. 다음은 실제 사례.
수송선단을 노리는 통상파괴전뿐만 아니라 일본 해군 군함들에 대한 공격도 서슴없었으며 이에 상당한 전과를 얻어냈다. 그 중 일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 중 4척 격침이 가토급 잠수함의 작품. 당장 태평양 전쟁 쪽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 중 알 사람은 알 만한 유명한 일본 군함들이 가토급 잠수함에게 사냥당했다. 좀 더 하자면, 전함 빼고 안 가라앉혀본 군함이 없다. 한 술 더 뜨면, 안 건드려본 배가 없다.
단함 순찰이나 늑대 떼 작전중이 아니더라도, 함대전에 참가하여 정찰 및 적 함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사례도 다수인데, 가토급 잠수함 4번함 알바코어와 33번함 카발라는 필리핀 해 해전 중 일본 해군의 정규 항공모함 두 척을 격침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기록했다. 가뜩이나 공중전에서 압도적인 스코어를 기록하며 우주 너머로 날아가고 있던 일본군에게 있어 지옥과도 같았던 순간을 장식해냈다.
또한 레이테 만 해전의 전초전에서 가토급 잠수함 두 척의 합동 공격으로 일본 수상함 전력의 핵심이었던 중순양함에 대한 격침/피해 전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가토급 잠수함의 공격은 이런 주력함들에 대한 공격 외에도 잠수함의 천적이라는 대잠 해방함들과 구축함에게도 가해졌는데, 이는 일본 해군의 낙후된 대잠 전력과 대잠작전에 대한 낮은 인식, 갈수록 정상적인 표적을 찾기힘들어 뭐라도 잡고보자는 미 해군 잠수함 함장 및 승조원들의 욕심까지 겹쳐 잠수함에게 역으로 당해버리는 구축함과 해방함이라는 기괴한 기록을 만들고 말았다. 실제로 가토급 잠수함과 일본 구축함, 대잠 해방함과의 교환비는 가토급 잠수함이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가토급 잠수함은 항공모함 2척, 호위항공모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4척(1척은 공동격침), 구축함 22척, 잠수함 5척, 대형 어뢰정 및 해방함, 호위함 총 26척, 기뢰부설함 8척 등 다수의 일본 해군 군함을 격침시켰다.
함대전에서도 정찰 및 지원 임무를 톡톡히 해냈는데,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곳곳에 매복해 있던 가토급 잠수함들 때문에 거의 실시간으로 일본 함대의 위치가 보고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일부 가토급들은 기습적인 게릴라식 공격을 가해 일본 함대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이하는 상세.
또한, 태평양에 있는 각종 섬에 대한 지상군 및 게릴라들에 대한 물자 지원, 불시착하거나 추락한 항공기에서 탈출한 조종사들을 구조하는 임무 등에서도 맹활약했다. 꼴랑 조종사나 항공승무원 구조하는게 뭐 대수냐 하겠지만, 교육하는 데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귀중한 인력인 파일럿을 구조 잘 하는것만으로도 인원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중 하나다. 대표적인 파일럿 구조 사례로 전 미국 대통령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19번함 핀백(Finback)에게 구조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침몰하는 일본군 선박에서 탈출한 연합군 포로의 구출작전에도 동원되었으며 조난자가 발생하거나 연합군 소속 함정이 피해를 입어 좌초하거나 침몰을 한 경우에도 구조작전에 투입되어 활약했다. 아래는 13번함 SS-224 코드(Cod)의 네덜란드 해군 잠수함 O-19 승무원들의 구조 동영상.
일부 배들은 덱건이나 로켓탄 등의 무장으로 일본군의 주요 거점에 포격을 가하는 등 테러 공격을 가하기도 했으며 일부 가토급 잠수함은 아예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 폭탄 공격을 하는 등의 특수전 임무도 기꺼이 수행해 내 잠수함의 범용성을 뽐내고 특수전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도 공헌했다. 다음은 실제 사례.
전쟁 말기에는 더 가라앉힐 상대가 없어 목재 선박들이나 범선, 어선들에 대한 공격도 가할 정도였으며 이들을 침몰시키는데에 쓰는 어뢰가 아깝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심지어 어뢰가 아깝다는 이유로 부상해서 덱건이나 기관포, 기관총 등으로 직접 공격을 해버리는 사례도 늘어났고 어선 같은 소형선의 경우엔 이조차도 아깝다며 들이박아서 가라앉히는 일까지 벌어졌다.
거기에 일본의 거의 전 해역에 기뢰를 도배해 보급선을 원천 봉쇄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으며 그나마도 유일하게 남아있던 조선/만주국-일본 간의 수송 라인을 끊어버렸는데, 일본은 이때의 뼈아픈 경험 때문에 미국 잠수함과 기뢰에 그야말로 학을 떼다시피 했다. 45년도 일본의 거의 모든 해안에는 물에 퉁퉁 불은 시체가 떠밀려왔다는 괴담을 만들고 근 최근까지도 이 기뢰들이 발견될 정도이며 현 해상자위대가 가공할 대잠수함 전력과 기뢰전 능력을 갖추게 하는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기도 했다.[14]
반면, 이렇다 할 활약도 하지 못하고 가라앉아버린 가토급 잠수함도 있으며 코비나, 도라도, 골렛 3척이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가토급은 총 20척이 일본군의 공격이나 사고, 기뢰접촉 및 원인불명의 사유로 침몰했으며 살아남은 가토급 잠수함들은 한창 일본을 굶겨죽이던 도중 종전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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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런 면에 상당부분을 의존한 탓에 행간의 인식과는 달리 일본 수송선단을 완전히 막진 못했고 전쟁 말에도 미 선단과 같이 적지 않은 일본 수송선단이 미국 잠수함에 의한 공격을 어느정도 피하면서 수송임무를 완수하기도 하였다.[2] 2대전기 미 해군 잠수함은 음탐 직별이 따로 없었고 주로 통신 직별의 승조원이 소나 조작을 담당했다.[3] 이 공격방법은 1944년 초반, 가토급 잠수함 하더의 부장으로 근무한 프랭크 C. 린치 대위가 TMA공식을 만들어 발표하기 전까진 사실상 완벽하게 사용을 하질않게 되었고 그나마도 전쟁 말기에 시험적 성격으로 몇번 시도해봤을 것으로 추정되나 본격적인 사용은 전후 기술발전 이후에나 제대로 가능했다.[4] 모튼 소령은 해군 수훈십자장 4개와 맥아더에게 육군 수훈십자장 1개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특히 순찰 용도로나 써먹던(물론 여기엔 미국 어뢰가 못써먹을 물건인 점도 있었다.) 미국 잠수함대를 공격적인 전문 사냥꾼으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키워드를 제시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감 넘치고 틀에 얽메이지 않는 지휘관이었는데 후술하겠지만 결과적이게 이 과도한 자신감이 결국 모튼 소령과 와후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5] 문제는 이 교신인데, 이 과도한 자신감은 모튼 소령과 와후의 승조원 전원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와후의 동해상 작전 전개로 인해 2척의 선박을 손실하고 국회의원 2명이 사망한 사건이 터지자 일본군은 저 교신내용을 감청하고 위치를 파악한 다음 1943년 10월 10일경 일본 본토 소우야 해협에서 와후를 찾아내 대대적인 대잠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일본 해군의 대잠함들과 오오미나토 항공대는 근 16시간동안 맹추격을 하며 106발의 폭뢰와 폭탄을 던져 와후를 침몰시키고 말았다. 직접적인 침몰 원인은 함교에 항공폭탄이 정확히 명중한 것으로 추정. 당시 미 해군 잠수함대(COMSUBPAC)에선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고 와후가 저런 최후를 맞이한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아군의 지원을 받을수가 없을 정도의 일본의 안방이었던 일본 근해나 한반도 일대에서 설치고 다닌건 전략적으로 봤을때도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으며 상대적으로 동남아시아-일본 본토와 비교했을때 물자 운송의 중요성이 더 높았던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거기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다 라는 판단하에 1945년 6월까지 미 해군 잠수함대는 동해까지 잠수함을 투입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 본토랑 조선에서 작전하고 있는 잠수함이 평문으로 저따위의 교신이나 보내고 있는것도 어찌보면 한심하지만 일본군의 도청 위협에 대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단독 작전시 통신은 필요한것이 아니면 자제하고 한다 하더라도 통신 중계 등등의 각종 코렁코렁한 꼼수들을 동원해 최대한 위치가 발각되는 것을 억제하려 노력하고, 보고는 복귀후 돌아와서 보고서로 작성해서 보고할것을 지시하게 되었다.[6] SS-269 Rasher War Patrol Report, 290페이지[7] 당시 래셔의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어뢰 명중확인 후 테이아 마루에서 화염과 연기, 다수의 약한 불빛들을 잠망경으로 포착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불빛들은 구명정의 불빛으로 추정된다.[8] 여담으로 좌초한 다터는 본디 승무원들이 폭약으로 폭파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스의 처분사격과 일본군 항공기들의 공격으로 파괴되었고 근 최근까지 그 지점에 잔해가 남아있었다.[9] 이 감시망을 구성하기 직전 일본 해군 역시 잠수함으로 감시망을 구성해 미국 함대를 포착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엄청난 손실을 입었으며 필리핀 해 해전 내내 일본 잠수함들이 힘을 못 쓰던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선방을 한 셈. 당시 일본군 잠수함들은 일정 해역에 산개선을 편성해 잠수함들을 1열 종대로 쭈욱 늘려놓는 방법을 선호했는데, 이는 적 함대를 상대할 때에 잠수함 전력을 함대 공격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암호가 뚫리고 잠수함 한척의 위치가 파악되면 다른 잠수함들의 위치까지 손쉽게 발각당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후 일본군은 이 문제를 개선한답시고 산개면 전술을 세우게 되는데 당시 일본 잠수함 함장들의 평은 "산개선이나 산개면이나 그게 그거"였다고 회고했다.[10] 일본 해군이 왜 항공대 조종사 훈련을 하려고 했는지도 중요한데, 필리핀 해 해전 직전까지의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를 이은 라바울 항공전 등을 거치면서 베테랑 조종사들이 거의 갈려 나가서다. 결국 항공모함 항공대 경험이 있는 수병들을 다 긁어모아서 중대장급의 계급까지 주고 들어가야 했는데 이들 역시 필리핀 해 해전에서 갈려나간다. 결국 일본 해군의 배태랑 조종사들은 필리핀 해 해전이라는 한 번의 전투로 거의 몰살당한 것.[11] 같이 격추됐던 다른 전우들은 끔찍한 일을 겪고 모두 사망했다. 이 일로 인해 부시는 공적으로는 몰라도 사적으로는 일본을 굉장히 증오했다.[12] 이 잠수함은 1936년경 건조된 잠수함으로서 21형 유보트보다 훨씬 먼저 스노클을 장착한 잠수함이었는데, 이 배는 좌초되기 전까지 총 6척의 일본 선박을 격침시키기도 했다.[13] Rear Admiral Eugine B. Fluckey, 자서전 Thunder Below! 336~437 페이지[14] 사실 일본이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현재 해상자위대가 미태평양함대의 보조함대 역할을 하기 때문인 것이 더 타당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