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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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환관
高力士 | 고역사


이름
풍원일(馮元一) → 고역사(高力士)
부친
풍군형(馮君衡)
신장
195cm
국적
당(唐)
생몰기간
690년 ~ 762년 (향년 72세)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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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환관. 당현종의 측근으로 활약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편집]


본명은 풍원일(馮元一)로, 고역사라는 이름은 훗날에 개명한 것이다. 조부 이전에는 대대로 벼슬을 지냈던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풍군형(馮君衡)이 죄를 지어 관직과 가산을 몰수당했고, 풍원일은 10세의 나이로 노비가 되었다. 698년에 환관이 되어 궁으로 들어가 측천무후를 모셨다.

이름이 고역사로 바뀐 사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기록이 전한다. 신당서구당서에 의하면, 당태종의 셋째 아들 이각의 아들 이천리가 풍원일과 또 다른 환관을 궁에 바치면서 금강역사(金剛力士)에서 따와 금강과 역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어 풍역사가 되었고, 나중에 죄를 지어 측천무후에게 매를 맞고 궁에서 한 번 쫓겨났을 때 환관 고연복(高延福)이 양아들로 받아들여 고역사가 되었다고 한다.[1]

1971년 발견된 고역사의 신도비에 의하면, 고역사의 성과 이름은 측천무후가 고씨 성을 내리고 이름을 역사로 고치게 하여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역사의 아버지 풍군형의 묘지명에는 고역사가 어렸을 때에 고연복의 양자로 들어가서 성이 바뀌었다고 되어 있어 문헌의 기록과 일치된다. 한편 고역사의 양부 고연복의 묘지명에는 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이후 고역사는 당현종의 최측근 환관이 되어 당현종의 치세 동안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수많은 재상들이 뜨고 지던 당현종 곁에 머물며 그를 보좌하였고 이 때문에 사실상 당현종의 진정한 최측근으로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숙종의 측근이자 실권자였던 이보국[2]이 당숙종과 당현종을 이간질해서 현종을 사실상 유폐시켰을 당시에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고역사를 유배형에 처하여 당현종 곁에서 떼어내는 것이였다.

이후 고역사는 늘그막에야 유배형에서 풀려나 간신히 장안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때에는 이미 현종과 숙종이 모두 죽은 후였다. 이에 고역사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7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3]


3. 평가[편집]


고역사는 생전에 평생토록 현종의 곁을 지키며 충정을 지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면이 있다. 이임보, 양국충, 안녹산 등등의 간신배들이 말년에 암군으로 전락해가던 당현종을 철저히 이용하여 전횡을 일삼은 것과는 달리, 고역사는 이런 간신들과는 거리를 두며 황제를 보필하는 등 현종에게는 마지막 남은 충신이나 다름이 없었다.[4]

물론 고역사에게 어두운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현종이 암군으로 몰락해가는 와중에도 고역사는 황제를 위해 간언하기 보다는 그의 비위를 맞추는데 열중하며 자리보전을 하였으며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런 고역사를 시작으로 당나라에서 막강한 권력을 쥔 환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것이 당숙종 이래로 환관들의 전횡으로 이어진다. 당나라 말기에는 마치 후한 말기의 경우처럼 환관들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저들 마음대로 황제까지 갈아치울 지경이 되어 버렸다.[5]


4. 여담[편집]


환관임에도 불구하고 "역사(力士)"라는 이름 처럼 아주 덩치가 크고 힘이 셌다고 전해진다. 사실 환관들도 제아무리 남성이 제거되었다고 한들 결국은 궁중에서 여자들이 하기 힘든 일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인만큼 선입견과는 달리 제법 힘이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고역사 또한 이런 케이스에 속하는 모양이었던 듯 싶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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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고연복은 고구려 유민이며, 영류왕의 태자였던 고환권이 그의 증조할아버지라는 지적이 있다. 맞다면 고국에서 전쟁포로로 외국으로 끌려가 환관이 된 기구한 인생을 살았던 셈이 된다. 다만 그는 환관으로서는 출세하는 데 성공했다. #[2] 이 사람도 환관이었다.[3] 다만 사망했을때의 나이가 72세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했다.[4]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다른 부류의 간신들과 달리 환관의 권력은 오로지 황제의 총애에서 나온다. 황제가 약해지면 자신도 약해지는 셈이니, 환관들은 자신이 모시는 황제에게만은 절대적으로 충성하는게 보통이었다.[5] 간혹 전설적인 시인 이백과 불화한 끝에 그를 모함하여 쫓아낸 일 때문에 욕을 먹기는 하지만, 이는 사실 이백의 자업자득이 컸다. 시를 지으라는 황명에 술에 취한 채로 입궐해서 고역사를 보고 "내 신발 좀 벗겨봐라 이 고자 새꺄"라고 주정을 부린 것에 앙심을 품게 되었다고 하는데, 술에 취했다고 황제 최측근에게 신발을 벗기라고 주정을 부리는 게 말이나 되는가? 누가 봐도 지나치게 무례했고 이것이 화근이었다.[6] 보통 고대의 왕들은 암살이나 모반 위협때문에 겹겹이 자신을 호위할 기구와 장치를 많이 만들었다. 그중 환관(+궁녀. 궁녀들 중에도 키크고 덩치있는 자들이 있었다.)들은 24시간 왕과 붙어있다보니 전문 경호실보다 앞서 왕을 보호하고 책임질수 있는 최적의 경호인력이였다. 그래서 개중에 왕을 보호하기 위해 기골이 장대하거나, 입이 무겁고 인내심이 많거나, 무술을 익힌 환관들이 왕 옆에 항상 있었다. 오만석이 주연한 조선시대 환관들을 다룬 드라마 왕과 나를 보면 한 덩치하는 내시들이 무술을 익히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오는데 상기한 이유대로 고증에 꽤 부합한다.[7] 서경문화사출판 당현종이라는 책(p.216)에서는 그 키는 6척 5촌, 즉 195cm에 달한다고 보았다.출처 지금도 매우 큰 키지만 당시의 평균치를 생각하면 거인급 장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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