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혁(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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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문화예술부장, 내각 부수상 등을 역임하는 등 60년대 중반에 약진하던 인물이었으나 갑산파 사건으로 숙청당했다.


2. 생애[편집]


초기 이력은 거의 파악되지 않으나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선전선동부 부부장 자격으로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8년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고급당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당중앙위원회 기구에서 사업하였으며, 선전선동부 부부장, 과학 및 학교교육부 부부장으로 사업하였다. 1960년 3월, 중앙당학교 교장으로 조동된 하앙천의 후임으로 과학 및 학교교육부장으로 승진 임명되었는데, 국제부장 박용국은 고혁이 "경험 있는 당일꾼이며, 이론적인 측면에서 훌륭하게 준비된 일꾼"이라고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대회 집행부 및 대의원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11월, 체코슬로바카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원으로 파견되었다. 1964년 4월, 허석선에게 과학교육부장 자리를 물려주고 문화예술부장으로 조동되어 1966년 부수상 임명 이전까지 당 부장 직함으로 활동했다. 1965년 5월, 인도네시아 공산당 창건 45주년 기념식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원으로 파견되었다.

1966년 9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으며,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7년 5월까지도 각종 주요 행사에 참석했으나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벌어진 갑산파 사건 때 같이 숙청되어 이후 실종되었다.

3. 참고문헌[편집]


  • 北韓關係史料集 79.
  •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소장 북한 인물 자료 2.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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