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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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권원호.png[1]
성명
권원호(權元浩)
생몰
1904년 9월 14일 ~ 1944년 4월 13일
출생지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인유리
사망지
서대문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회 전도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권원호는 1904년 9월 14일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인유리에서 부친 권옥린(權玉麟)과 모친 이옥심(李玉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권원호는 부모를 따라 교회에 출석했고 특히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가족기도회에서 부모와 함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곤 했다고 한다. 1911년 4월, 그는 8살의 나이에 중화읍장로교회에서 운영하는 경의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최(崔)선생을 만나서 학업과 신앙을 지도 받았다. 3년 과정을 마친 후 그는 마을의 한문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익혔다.

1919년 9월 부친이 별세한 뒤, 15살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그는 과수원을 비롯한 농업에 종사하면서 모친과 형제들을 받들어야 했다. 이듬해인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10여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평양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1919년 9월 5일 중화읍장로교회에서 평양부의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교회 봉사에 힘쓰면서 평양시내의 기독교계 동절기 야학반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그는 20세가 되던 1923년 2월 17일에 중매를 통해 평양시 주교리 25번지 서촌의 부유한 신앙가정인 윤관호(尹寬浩)와 황선옥(黃善玉) 집사의 장녀인 윤순덕(尹順德) 규수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신부 윤순덕은 1906년 8월 16일생으로 신랑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그녀는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아 16세에 입교했는데, 조선의 유명한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시 사창동장로교회에서 봉사하였다. 이에 그녀를 눈여겨 본 김익두 목사가 권원호와 윤순덕을 짝지워준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3년만에 낳은 아들 권세환(權世煥)과 그 이듬해에 낳은 딸 권시화(權施花) 모두 각각 돌이 지나서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27년 1월, 권원호는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지하리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소작농으로 초원을 개간하면서도 농민들에게 선진 농법을 가르쳐주었다. 이후 11월에 황해도 신계군 사지면 막대리 주은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2년 후인 1929년 11월 16일에 권성준(權成俊)을 낳았고, 주은동감리교회에 다니면서 야학을 개설하여 청년들에게 농촌운동의 일환으로 농사강습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독립심과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1930년 3월, 권원호는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추동리로 이주하여 이진구 목사가 시무하는 고성감리교회를 섬겼다. 그는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서 청소년들에게 배일사상과 애국정신을 심어주었다. 또한 담임목사가 출타할 때에는 예배인도와 설교를 담당하여 경천애인의 신앙심을 북돋아주고 애국애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켜주려 노력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계 학교였던 덕성학원의 교사로 부임하여 1년간 젊은이들에게 신앙교육은 물론, 자주독립의 민족정신을 불러일으켜주었다. 어느 날엔 동료 여교사인 김진(金眞)의 창가집에서 ‘조선의 아들’, ‘인산곡가’, ‘애국가’등을 공책에 옮겨 적어서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청소년들에게 은밀히 가르쳐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그는 1931년 3월 재직한지 1년만에 덕성학원 교사직에서 권고 사직을 당해야만 했다. 그 후 작농으로 종사하던 권원호 열사는 조선 독립을 소망하면서 “교원생활 1년”이라는 한시를 18절 32구로 지어 설움을 달랬다. 그 내용은 공명정대한 세상을 염원하여 예수의 재림을 신앙하고 조선의 독립을 기원했다. 여기에 1932년 5월 어머니 이옥심이 병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32년 9월 고성읍 동리로 이주한 그는 그해 12월부터 기계 제면업을 시작하여 4년간 생계를 꾸려가면서 기업을 일궈보려고 힘썼다. 또한 그는 고성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로 헌신하면서 신성회(神聖會)를 조직하여 청장년들과 함께 문맹퇴치와 태극기 보급에 힘썼다. 그는 주일에 상점을 닫고 교회생활에 전념하면서 목회 활동을 서원했다. 1935년 5월 7일 그는 35세에 장녀 권성열(權成烈)을 낳았다. 그러나 1936년 7월 28일 고성지역에 대홍수가 일어나 제면기계를 비롯한 가재도구가 떠내려가 버렸고, 그는 가족을 이끌고 이진구 목사의 사택 방 한 칸을 빌려서 임시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신앙생활에 헌신하고 애국 애족의 독립운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권원호는 담임목사가 지역교회를 순회할 때 고성교회의 예배 설교와 심방 활동을 맡았고, 주일 학교와 청년회도 신앙생활과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성대가 굵고 목청이 고와서 신도들의 신망을 얻었다. 이후 1936년 9월 24일, 고성구역 장전예배당에서 개최된 제6회 원산지방회에서 고성구역 신천 전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청년들을 찾아가서 독립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조선 청년의 노래' 등을 가르쳤다.

1937년 원산지방회에서는 7개 교회로 조직된 협곡구역과 6개 교회로 조직된 통천구역에 목회자가 부족하여 파송하지 못 하였다. 이에 이진구 감리사는 1937년 6월 1일에 강원도 통천군 협곡면 명고리 42번지 협곡교회로 권원호 전도사를 파송하였다. 그는 협곡교회에 부임하여 설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7년 일제가 전국의 모든 교회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본격적인 시련이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통천경찰서 협곡지서의 형사가 권원호 전도사를 찾아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권 전도사는 “기독교의 십계명에는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것이 첫째 계명이오. 인간이 만든 것은 모두 우상임으로, 나로서는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며칠 후, 통천경찰서장의 출두 명령이 내려와서 권원호 전도사는 수십리 길을 걸어서 경찰서에 도착했다. 경찰서장은 “대일본 신민은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신사에 참배해야 한다. 앞으로 만일 참배를 거절한다면, 그 때는 용서할 수 없다.”고 책망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1938년 4월 서울의 김리교신학교에서 3개월간 신학강습을 받고 목사 안수를 준비했다. 1939년 5월 3~10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7회 연합연회에서 원산지방 회양구역으로 파송받아 6월 1일에 강원도 회양군 회양면 읍내리 561번지의 회양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 교회는 군청과 경찰서가 가까워서 일제 경찰의 감시와 박해가 심했지만, 그는 자원하여 파송을 받았다.

권원호 전도사는 6개 교회를 순회하면서 말세를 살아가는 신도들에게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일경의 감시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교인가정을 심방했다. 권 전도사는 ‘일경의 박해가 심하다는 것은 일본의 패망이 가까웠다는 증거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민족을 깨우고 정신을 가다듬게 해야 한다’는 신념과 주장이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전도와 심방에 힘쓰면서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교회봉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1941년 7월 10일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신도들을 비롯한 주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권원호를 체포하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1941년 8월 22일 권원호 전도사는 독립운동을 선동한 치안유지법 위반죄와, “천조대신과 일왕도 예수의 사자로 일본국만 지배하는 신에 불과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말한 황실모독 불경죄로 회양경찰서에서 철원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됐다. 그 후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6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고, 건장했던 그의 체격은 그로 인해 무너졌다.

1941년 8월 30일 권원호 전도사는 경성지방법원 제2부인 합의부로 이송되었다. 넉달이나 지난 1942년 1월 15일에 경성지방법원의 공개 법정에서 제1회 공판이 열렸지만, 공개금지를 선고하여 청중들을 퇴정 시키고 약식재판이 진행되어 정당한 법정 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1월 29일 제2회 공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여 1943년 11월 10일에 불경죄 1년형이 추가됐다. 그는 복심법원에 상고해도 별 효과가 없을 것’임을 알고 상소권 포기 신립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권원호는 옥중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이에 형무소 측은 그를 독방에 집어넣고 음식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고, 그는 점점 쇠약해졌다. 형무소 당국에서 병보석으로 출감시키려 했으나, 그는 “병든 몸으로 나가지 않겠다”면서 극구 거절했다. 결국 그는 1944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향년 39세.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권원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941년 9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