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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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형(樂亨)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90년 1월 20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초면 송천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2]
사망
1967년 9월 12일[3]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82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창시자 권신찬(權信燦) 목사는 그의 차남으로, 세모그룹 유병언 전 회장은 그의 손녀사위이다.[4]


2. 생애[편집]


1890년 1월 20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초면 송천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권영복(權永復)과 어머니 벽진 이씨 이옥윤(李沃允)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영해면 성내리에서 처음 전개된 시위에 참가했던 시위군중들이 병곡면 병곡리로 시위 장소를 옮기자, 그는 남조홍과 함께 앞선 시위에 참여했던 2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그 날 오후 2시경 영해면 장터를 출발하여 병곡 경찰관 주재소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영해면 시위에 미처 참가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동참하면서 그 수가 4백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시위군중들이 병곡주재소 앞에 이르러 만세운동을 벌이자, 경찰들이 이를 제지하였다. 그러자 권유동을 비롯한 시위군중들이 돌, 곤봉, 낫 등을 들고 주재소에 침입하여 기물과 서류 등을 파기하고 벽까지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주재소에 있던 경찰 3명이 총을 휴대하고 백석리로 도주했고, 시위대들은 병곡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사무소까지 파괴했다. 달아났던 일본 경찰 3명은 평해면 헌병분견소로부터 지원 받은 3명의 헌병들과 함께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시위대를 지휘하던 정규하는 일본 경찰들을 향해 "조선인 순사들을 전부 데리고 오라"고 호통쳤다.

그러자 일본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도리어 발포하려 했고, 결국 정규하는 시위군중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산을 종용하고 오후 7시 30분 무렵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4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경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는 처분을 받아# 3개월 20여 일 간 구금되었다가, 그 해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7년 9월 12일 별세했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0년 8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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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정공파 복여(復輿)계 33세 태(泰) 항렬. 족보명은 권태동(權泰東).[2]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3]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65년 12월 19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유병언은 권신찬의 장녀 권윤자(權允子)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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