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제/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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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군주
2. 공/왕족 전(田)씨
3. 기타 이름있는 자
4. 기타 이름없는 자


1. 역대 군주[편집]


춘추시대 강제의 마지막 군주. 전제의 초대 군주인 전화에 의해 낙양으로 쫓겨났다.

  • 제태공 전화[1](AA:이치죠 세이야)
전제의 초대 군주. 원 역사대보다 일찍 제강공에게 제후 자리를 찬탈하고 즉위. 중원 국가들 중 맨 처음으로 조선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조선에 유학과 손자병법을 비롯한 중원의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는데, 이는 당시 노-송-월 3국이 힘을 합쳐 제나라를 견제하고 연나라 또한 사이가 좋지 않았던 통에 조금이라도 더 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주 천자를 통해 조선이 기자의 후손임이 확인 되었을때 이를 두고 기쁜 오산이라고 평했다.

전제의 2대째 군주. 전화의 장녀로 모략에 능한 아버지나 동생과는 달리 인덕을 갖췄다. 친조선 노선을 밟았으며 동맹국을 비롯한 인접국가들과의 도리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줘 스레민들의 호감을 산 유일한 제나라 군주. 다만 전오를 비롯한 제나라 귀족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영 눈에 차지 않았던지 결국 원 역사대로 동생인 전오에게 찬탈당했다. 다만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던 원 역사와는 달리 유폐생활[2]을 하다가 천수를 다했는데 자신을 군후의 자리에서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전오를 원망하지 않는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였다.[3]

전제의 3대째 군주. 전화의 차녀로 인덕을 갖춘 언니와는 달리 아버지인 제태공 전화를 쏙 빼닮은 천부적인 모략가. 조선과 월이 합세한 노나라 정벌을 총지휘한 것은 물론, 송나라와 진나라를 움직이게 해서 거의 중원대전 스케일로 확장시킨 것을 시작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또한 직문을 넓혀서 인재풀을 늘리고 전기와 순우곤을 등용하는 등 제나라 전성기의 밑바탕을 닦은 명군. 다만 그 과정에서 인접국가나 동맹국을 상대로 인성질[4]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제나라 혐성의 극을 달리기도 하였다.[5] 다만 조선과 관련해서 몇번 물먹은 적이 있는데, 조선이 제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위나라와 동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서 졸도한 적도 있었으며, 조선후의 장례식과 천도 건에서 월나라의 결례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제나라가 욕을 먹은 적이 있기도. 말년에는 의사를 믿지 못해 병세가 악화되어 병사했다.[6] 언니였던 전섬이 유폐되었지만 편하게 세상을 뜬 것과는 대조적.[7][8]

전제의 4대째 군주이자 제나라의 초대 왕.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최후의 패자, 전오의 아들로 능력은 뛰어난데 너무 뛰어나서 세상만사가 지루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게으른 니트성향을 지니고 있다. 다만 능력 하나는 원 역사 답게 진퉁이라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2차 중원대전에서 한, 위, 조선과의 전후처리협상을 주도하고 제나라의 패권을 확립하였다. 전오의 뒤를 이어 제나라의 군주가 된 이후에는 규구(葵丘)[9]에서 회맹을 열어 중원 열국의 제후들에게 패자로 추대되었다. 이후 주나라 천자로부터 정식으로 패자로 제수받음으로 제나라의 황금기를 열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제멋대로인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중원 제후들을 달래고 중재하느라 팔자에도 없는 고생길이 활짝 열렸다(...)[10] 추기와는 말이 잘 통하는 지 자주 붙어서 나온다.
진의 서하 완전 병탄 이후 조선을 참관인으로 내세워 위나라에게 요구한 조공은 철회시켰지만, 이후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조선-위 관계에 대해서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이후 초나라에 합종군을 동원해 완을 한에게 할양시키거나 진의 동진을 완에서 막아내는 등 패자로써 소위 전인제 체제를 유지했지만, 328년 낙양에서 트집을 잡아 굴욕을 줄려는 천자에게 종놈 자식이라고 욕하면서 패자 체제는 끝이 난다.[11] 이후에는 칭왕회동을 주최하거나 위나라의 내전에 관여하는 등 굵직한 일에는 참여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다 320년 12월에 사망한다.[12]

전제의 5대 군주이자 2대 왕. 호탕한 성격과 원역사에서 제나라 전성기를 이끌고 나간 군주답게 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 전인제를 대신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재위 초기를 잘 보냈지만, 패자 체제의 종언 이후 주변 정세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관성적으로 이어진 신뢰가 화근이 되어 푹풍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고요에서 대비를 할 거의 모든 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산동대전 이후로 믿었던 동맹에게 나라가 반토막 나고, 수도 임치를 빼앗긴데다, 곡부 전투의 패배로 자기 딸뻘에게 치욕을 당하고, 아버지가 맡겨놓은 동생들을 인질이나 희생양으로 쓰고 완전히 멘탈이 나가서 170어장 기준으로는 남자를 끼고 놀고 먹는 중. 어라 이거 순 웅장 아닌가
죽기 전 정신을 차리고 죄책감에 동생 전영에게 사과하러 갔지만 전영이 허물이 왕의 것이라면 공적도 왕의 것이라고 격려했고 이후 전문에게 죽기 전 고밀에서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조선이 합횡 때문에 위를 경계할 것이니 제가 안전할 것이라 했는데 그 예측대로 조선은 제의 움직임을 보고 위를 의심해 한단에 전력을 집중하면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 후 합횡과 조선의 전쟁이 벌어질 즈음 사망한다.

전제의 6대 군주이자 3대 왕. 산동 대전에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어맸지만, 곡부 전투의 결과로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어머니 전벽강을 대신하여 제나라의 실세가 되었다. 그의 치세 때에는 안 그래도 법가 위주였던 조선에게 나라가 반토막 난 뒤 그녀 자신부터 법가를 이러저러한 식으로 장려하는데다 이를 백성들이 쉬이 받아들이는 등, 제나라의 기풍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돌변한 시대였다.
이후 하남대전 시점에서는 제의 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하남대전에서 조선이 패한 후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바로 순우를 공격하지만 패배, 변법으로 간신히 긁어모았던 제나라의 공세 능력이 날아가버리고 그 동안 눌려 있던 유가와 도가를 비롯한 다른 제자백가 세력들이 변법을 비난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고 내부의 불만세력의 힘을 빼기 위해 가장 위협적이었던 맹자의 명성을 떨어트리기 위해[13] 조선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보낸다.
그러나 이후에도 거듭된 고토 수복의 사실상의 실패로 인하여 다른 제자백가들의 탄원으로 법가 기조의 지속에 대대적인 제동이 걸리고, 그 이후 합종대전의 결과로 소기의 성과로 정했던 원 수도 임치는 커녕 영토 교환 협정으로 도리어 사실상 영토를 내주는[14] 것을 쐐기로 제나라 백성들의 염전도와 눈앞의... 또는 전대 때부터 시작된 현실에 대한 체념이 극에 달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15]
그리고 산동대전 당시 재정부담을 타파할 수단으로 선택한 밀수가 연종체제가 성립된 이후에는 밀월관계 끝에 사실상 통제를 벗어나버려서 연종의 제재를 피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여파로 나름 단속을 해본다고 했는데 결국은 정규군(!)이 산적질을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러 안 그래도 기설의 눈 밖에 난 것이 더 단단히 나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연종회맹에서 태왕 기설의 규탄과 위, 송의 증언으로 조선에게 양보산 일대(양보, 양관, 성현 등), 위에게 사수 이서 대야택 일대(임성, 항보 등) 마지막으로 송에게 설 이서 우산 이동 일대(담현, 난릉, 양분 등)를 할양하였다.[16][17]
이렇게 일생을 조선에게 시달려온 전지는 기원전 280년 태자 전법장의 계승을 위해 반쯤 미쳐서 유폐된 전교사를 모살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에 죽는순간까지 시달리다 명을 달리하였다.

합종대전에서 제나라가 합횡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결국 전략목표인 임치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극현을 내주면서 조선에 숙이게 되면서 어차피 국내에서의 입지가 험악한 상황인 맹상군과 함께 조선에서 인질 생활을 하게 되었다.[18] 인질로 있는 상황에서도 조국의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일환으로 오환도호에서의 실정으로 파직당한 조선의 숙장 진개를 영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기원전 280년 어머니 전지가 병마로 졸하자 제나라로 복귀하여 왕위를 이어받지만, 어머니가 신양군을 모살할것이라는 의심과 조선에 오랫동안 인질생활한것 때문에 국내의 인식은 좋지 않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거지역 세력가 태사각의 딸과 결혼하여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한다.
영통의 난 당시 진나라를 정상화하기 위해 연종군을 소집했을 때 조선의 상승을 지켜보는 것이 싫어 내부사정상의 곤란함을 핑계로 파병을 거부한 것이 화근이 되어, 함양 회맹 당시 상황과 심리적으로 몰린 끝에 조선에게 절나라 지원을 위한 국제항구 건설을 허락하게 된다.[19]


2. 공/왕족 전(田)씨[편집]


제나라의 공족인 전씨 일족의 일원. 17세의 젊은 나이로 중앙군 원수가 되어 제나라의 군권을 잡았다. 방연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출연 빈도가 올라갔는데, 원 역사대로 손빈이 없어서방연에게 물먹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그러나 2차 중원대전에서 방연을 상대로 손빈 없어도판정승을 따낸 것을 보면 원 역사보단 나름 스펙이 올라간 듯. 추기와의 악연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이며 전인제가 추기와 가까이 하면서 슬슬 갈등이 불거질 조짐이 보이고 있다. 여담으로 위나라 내전 때 구원군을 이끌고 갔다가 조선의 대장군 악자와 잠깐 만난 적이 있었는데 기회만 된다면 한번 전장에서 겨뤄보고 싶다고 라이벌 플래그를 세웠나 싶었지만 악자가 먼저 세상을 뜨면서 없었던 일이 되었다. 전오 시절에 중용되면서 그녀의 파벌이 상당히 증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본인의 아랫사람 관리 소홀로 인하여 전인제가 작정하고 시도한 감찰 결과 파벌 구성원들이 털지 않았는데도 먼지가 떨어지는 정도로 부패가 있어 이에 대한 쓴소리 또한 들었다.
대 조선 주전론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인물로, 전인제가 이를 경계하는 것을 겸해서 군통수권 등을 제한하려는 것에 반발해 쿠테타를 시도했지만 너무 비상식적인 행동이라 호응하는 병사가 없어 그대로 좌절되고 역모의 죗값을 받는다.[20]

제선왕의 동생으로 제선왕과 일부 성향 차이는 보이나 대체적으로 제선왕의 브레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산동대전 직전 광장과의 대립으로 보급을 줄이는 보복을 하여 방비에 치명적인 차질을 주고 이후 곡부대전에서 제나라가 참패하면서 사태에 대해 최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물러난다.[21]
언니 벽강이 세상을 뜨기 전 쯤 서로 삶이 다해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렇게 전벽강이 아버지를 다시 만난 날과 그다지 멀지 않은 어느 날 유유히 졸하였다.[22]

제선왕의 동생. [23]초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귀국했다.[24] 제나라에 초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귀국시켰으나 본인이 제나라에 더 큰 마음이 있는 듯.[25] 제위왕과 어느 정도 닮아서 백성들이 따른다고 한다. 대조선 전투에서 전단의 상관으로 있었으며, 전단이 활약함에 따라 명성이 올라 실력에 비하면 무명도 제법 높아진 상태. 그러나 결국 전지의 주도로 어떻게든 이어가던 고토회복의 기조가 거듭된 실패의 결과로 모든 면에서 더 이상 지속이 불가한 상태까지 몰렸음에도 끝내 대 조선 강경론을 접어둘 수 없었다.[26] 결국 유폐되고 종국에는 태자 전법장의 계승에 방해될거이라 여긴 전지에게 모살된다.

정곽군 전영의 아들. 본거지인 설에서 송나라에 지원을 해주면서 명성을 얻었다. 위나라에 천거받아 상방으로 임명되기도 하는 등 잘 나갔으나 산동대전 이후 위나라의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다. 제선왕 칩거 후 다시 정국의 중심에서 제나라의 브레인이 되어 이끌고 있으나 제민왕이 일방적으로 견제하고 있다. 합종군을 주도하거나 했던 원역사와는 달리 군사적으로 묘하게 무능한 행보를 보인게 특징.
우선 산동대전 직전까지 위나라 재상으로 있다 귀국했으면서도 위나라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으며, 이후 조선장왕 기유가 사망한 뒤 조선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주장하다 조선의 공격으로 곡부 전투가 발발하고 제군이 패하면서 망신당한다.[27] 여기까지가 거시적인 전략적 식견에 관한 부분이라면, 하남대전 시기에는 미시적, 전술적인 부분에서의 미숙함을 드러낸다. 전지가 변법 추진 등을 통해 어떻게든 모아온 군세 3만을 이끌고[28] 임치 탈환의 교두보 마련을 위해 순우를 공격하지만, 조선이 하남대전 패배로 흔들리는 와중에도 고나가 이끄는 조선 중앙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패배하고 만다.[29]
이후 종횡대전 때 전단과 함께 전지가 오빠한테 군재같은거 안 바라니 전단 말대로 하라는 말을 듣는 수모를 당하며임치 공격군을 맡았으며, 분대를 이끌고 오현을 점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치수도하전에서 쓸데없이 총사령관 경리에게 명령을 받는 요식행위를 하는등 요상한 판단을 보이더니, 임치를 공략하는데 성공한 뒤 선봉에서도 최전열에 서서 성으로 진입하다가 유시에 맞아 경상을 입고 실신하는 추태를 보이며 다 이긴 전투를 그르치고 만다. 군사 영역만 들어서면 끝없이 저다이스를 받아서 원역사보다 군재가 상당히 너프되었다. 경리가 어리버리타는 맹상군을 보고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볼 정도. 심지어 경리는 임치의 일을 듣고 안평 전투에서 운수 사나워지니 전장에는 얼씬도 하지말라고 하는 대우를 받았다(…)
거듭된 군사적 실책의 결과로 종횡대전 종전 협정 시점에서는 이걸 만회하기 위해 조선에 사절로 가서 저자세의 끝에 어떻게든 영토 할양을 교환까지 끌어올렸으나, 그 전에 스스로 자신의 봉지인 설[30]을 완전히 반환한 뒤 나선 것이라 친조선 행보와 그 연결고리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다.[31]
이후 태자 전법장과 더불어 조선에서 인질생활을 하였고 내부에서 정보를 수집하며 태자를 보좌하였다. 제왕 전지가 죽자 태자와 더불어 귀국하여 새로이 왕위에 오른 전법장을 보좌하였고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합하기 위하여 유력 호족인 태사각과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기원전 274년 사망하였고 죽기전에 왕에게 조언을 고하는 서찰을 남겼는데 부차와 구천을 본받아 은인 자중하며 힘을 키우라는 내용이었다.

맹자를 스승으로 두고 있던 제나라의 장수. 제나라의 두 개의 칼 중 하나로 불린다. 산동대전에서 조선을 가장 고전시킨 장군이었으나,[32]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조선군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상상도 못한 타이밍에 새로 나타난 조선 기병대가 우군을 와해시키는 예상치 못하는 상황 때문에 결국 결정적인 순간 완전히 뒤를 잡혀 패배하였고, 최대한 많은 이들이 전장을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퇴로를 지키다 숨을 거둔다.
전사한 그녀의 시신은 조옹이 거두어 양지바른곳에 보검과 함께 묻어주었고 이 무덤은 훗날 임치 팔경중 하나로 꼽히며 유명한 관광장소가 되었다.[33]

제나라의 두 개의 칼 중 하나. 제위왕 대 제나라의 사실상 에이스로 오랜 기간 동안 대조선 방어를 맡고 있었다. 이후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남대전에 연합군에 군량대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군량대 200명[34]으로 종횡무진하며 대활약을 한다. 그러나 두현 전투에서 경취에게 패배하고 다리를 다치면서 사실상 은퇴 상태가 되었다가 313년의 산동대전에서 왕에게 즉묵으로 후퇴하라는 제안을 하는 식으로 등장했다. 곡부 전투 이후 위의 거짓공격을 받은 상구를 점검하다 검은 부러지면 다시 쓸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한다.

전반, 광장만은 못 하지만 매우 뛰어난 장군. 주로 제나라 남방[35]방면에서 활약하였으며, 산동대전 이후 천수를 다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태산 전역에서 제가 조선에게 패전한 후 암울한 상황에서 학생으로 등장한다. 이후에는 하남대전 후 순우를 공격할 때 전문의 백업으로 등장, 극신이 패주하는 전문을 잡으려고 무리하게 도하를 하려 하자 반대편에서 도하하는 조선군을 격파하기 위해 대기하고 잇었으나 순우성주였던 진개가 극신의 도하를 막아내 역습에 실패한다. 이후에도 조선이 위나라와 전쟁을 벌인 틈을 타 전교사와 함께 순우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임치공격군의 주력을 맡기도 하는 등 제나라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공성만 했다하면 크리를 내서 털어버리는걸 반복하는 군재를 보여주면서 경취에 이어 다갓의 딸 2호로 낙점, 어장가들의 공포를 사고 있었다.
허나 이미 조선과 다른 나라들의 전반적인 국가적 역량은 단순히 특출한 인재의 덕과 단순한 타국과의 연합으로 나름 단기간에 뒤집어 볼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고, 이는 그녀의 힘으로 어떻게든 거둔 제나라의 전술적 승리가 끝끝내 전략적 승리로 격상되지 못하고 종횡대전 때 총 동원된 6만여의 군세 중 3분지 1의 사상으로 화하여 버리는 비극으로만 남아버림으로써 조선의 격을 증명하는 증거 중 일익이 되면서 빛이 좀 바랬다.[36]


3. 기타 이름있는 자[편집]


전인제와 닌텐도DS거문고로 친해진 사이로 본래 전기에게 찍혀서 관직에 못나올 뻔 했으나 순우곤이 뒷배를 봐준 덕에 직하학궁의 학사로 중앙에 진출할 수 있었다. 전인제 즉위 이후론 둘이 자주 붙어서 나오며 전기와는 서로 혐오하는 관계이다.[37] 여담으로 조선의 어사대부 문인과 나름 연줄이 있다. 패자의 지음으로써 남은 평생을 보냈으나, 명이 다하여 죽기 전 본인이 아끼던 거문고를 연주하고 싶어했지만 끝내 때를 놓쳤다.

제나라의 외교 담당. 원 역사대로 달변가이며 타국과의 외교를 거의 성공시킨 유능한 외교관이다.[38] 다만 자신의 실책이 아닌 월나라의 심각한 외교적 결례의 결과로 제나라의 이미지가 망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직하학궁의 학사들이 유출되는 사건에서 고생을 했다. 이후 중원대전 때 조선에 선택을 강요하는 등 외교관으로 대활약했지만, 은퇴 이후에 훗날 제민왕이 되는 전지에 의해서 짤리고 나서는 맹자를 만나고 페이드 아웃.

장자에서 장자의 친구로 나오는 그 사람. 위나라가 비록 밀리고는 있지만 한때 크나큰 나라이기에 원역사에서처럼 자신이 임관해 다시 한번 부흥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위나라에 출사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위나라가 시간이 갈 수록 더욱 더 세가 줄어들고 있었던 탓인지 원 역사에서 재상까지 지낸 위나라 대신 제나라로 생각을 바꾸었다. 자기 이상이던 열국의 힘의 균형을 이용한 평화를 이루기 가장 적합한것이 전인제였다고 생각한 부분도 있는 듯. 이후 조선에서 형명론을 전파할려고 했고, 조선은 실용에 미친 귀신들이 붙었다고 질색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외교셔틀(...) 업무를 잘 수행하다 308년에 사망.

전인제 시기부터 등장해 여러 대담을 통하여[39] 안면을 튼 사이이며, 이 때문에 내치를 보는 시선 위주에 성선설 기반의 이상론이라는 논파도 당하긴 했지만 어찌되었던 당시 태자 전벽강의 스승(반강제...)까지 되었다.[40] 그러나 후일 산둥대전과 곡부대전을 통해 자신의 두 제자가 각각 죽고 폐인이 되었으며, 자신의 학당에서 가르치는 어린이들까지 본인이 제지를 하건 말건 하필왈인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볼 정도로 운수가 사납게 되었다.
하지만 하남대전에서 제가 패배한 조선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자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고 전지의 계략에 따라 조선으로 간 강의에서 조선왕 기설에게 깨달음을 이끌어내며 후한 대접을 받고 어느정도는 재기에 성공하였다.
이후 기원전 288년 고향인 추현에서 숨을 거두고 그녀의 학풍은 고향에서 그녀가 직접 키운 직전 제자들과 조선의 유가왕도론자들이 계승하였다.

제선왕 시기 제나라 상경으로 제위왕이 바라던 이상보다 제나라의 실질직 이익을 더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41]

2차 서하대전 이후 위나라측 사신으로 첫등장하였고 이후 별도 출연은 없었다.

원 역사에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라는 명언을 남긴 인물로 2차 중원대전에서 전단의 극현을 탈환해오자 극현태수로 임명되었고 이후 제나라로 이적한 위의 숙장 임홍에게 병법을 전수받아 실력을 올렸다.
기원전 281년 연종회맹이 개최되자 본래 국왕인 전지가 참석해야 했지만, 조선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오른 전지가 가기싫다면서 왕촉을 대리 출석시키며 상방에 임명하였다.
영통의 난을 진압한 이후의 함양회맹에서 제나라가 파병을 안 한 점을 빌미로 하여 조선의 문책을 피할 수 없음에 대해 제왕 전법장에게 계책을 간언하였으나, 급작스레 불리해진 형세와 제왕 본인의 우유부단함이 심리적 압박감으로 극대화하여 결국 빛을 보지 못하였다.

정곽군 전영의 식객으로 평상시에는 식충이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어 맹상군도 별쓸모없는 인재라며 비판한다. 그러나 진나라와의 외교에서 일부러 진나라측을 자극해 후일 제에 유리하도록 조장하였고, 산동대전 패전 직후 조선과의 교섭에 나오는것으로 보아 외교적 식견이 상당한것으로 보인다.

맹상군의 식객. 군사적 능력이 처지는 맹상군을 보좌하는 참모 역할을 주로 한다. 종횡대전당시 임치전선에서 맹상군에게 군사적 조언을 아끼지 않은것으로 보아 어느정도 능력이 있어 보인다. 맹상군 봉지를 반납했음에도 유일하게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인물

  • 진개 (AA: 카자나리 츠바사, 통/무/지/정/매: 96/91/53/31/70) 조선국 오환도호 → 제나라 장군 기원전 324년
전 조선국 장군이었지만 현재는 제나라로 이적하였다. 원 역사에서 조선과 동호를 쳐부수던 연의 명장으로, 본디 순우성주로[42] 순우로 쳐들어오는 맹상군을 극신과 협동(...)하여 막아내고 이후 판정에서 진개임이 확정되고 임치군수로 승진했으나, 임치군을 다스리는데 정치력 부족으로 실정을 저지르고 문책성 인사로서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농안으로 떠났다.
2차 중원대전에서 극현까지 제나라가 점령하며 임치가 위험해지자 진남장군으로 직책을 바꾸어 다시 부임, 전교사가 태산을 공격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291년 종횡대전에서는 치수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임치를 버리고 후퇴할 것을 권했지만 염파가 기설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남기로 한 각오를 보고 임치 방어전에 야전군을 맡으면서 동참했다. 이 전투에서 임치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지형이 불리한 상황임에도 2배수가 넘는 합횡군을 높은 숙련도를 앞세워 막아내는 대공을 세워내며 좌장군에 등극했다. 조선의 인물들 중 나라 바깥에서 임관 요청을 2번씩이나 받은 핫한 인물이기도 하다(?)[43]
도호부가 신설되자, 마침 좌장군의 임기가 다하여 오환도호로 보직이 변경된다. 그러나 장군으로서는 유능했지만 한지역을 다스릴 재능은 없었는지, 연이은 실정으로 결국 동호의 사주를 받은 오환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반란은 진개가 신속히 진압하였지만, 연이은 실정에 대한 문책으로 파직당하고 이후 조선의 인질로 있던 전법장이 스카웃하여 제나라로 이적하였다.

거의 지역 세력가로 딸인 군왕후를 태자 전법장에게 왕후로 보내면서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거지역 세력가 태사각의 딸. 전법장과 혼인하여 제 왕후가 되었다.


4. 기타 이름없는 자[편집]


공자의 적통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안회가 죽었으므로 딱히 정통 유가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일단 유가의 총본산에 해당한다. 다만 법가 계열은 철저하게 배척하여 제나라에 법가가 존재하기 힘들게 되었다... 만 조선이 제나라의 절반 이상을 빼앗아 간 후에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서문표를 암살하는 공을 세웠다. 끝(...)

강대가 축출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강제 쪽의 사람이었던 자. 결국 얼마 못가 세력이 일소되었다.

  • 제나라 귀족(AA:P헤드(아이돌마스터))

태도만으로 보면 제나라 제일의 충신이자 인망이 넘쳤던 인물. 당시 시대적 관념 상 성 하나의 국지전을 위한 규모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악자와 고거의 7만 군대의 도강을 목격하고는 조선이 황하를 건너 추가적인 영역 확보를 노리며, 부족한 방어 설비와 병력이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2차 방어선의 형성을 급박하게 요청한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결사의 의지로 모든 것을 불살라 고거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애초에 규모 차이에 방어시설 미비로 인해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모든 게 끝나자 주군을 뵐 면목이 없어 자결한다. 이후 그 인망의 영향으로 조선령이 된 무성 지역의 안정화에 즉각적으로 손을 보지 않으면 반란이 터질 정도의 상당한 차질을 주었으며, 평원현령의 친척이기도 해서 전기와 평원현령이 이 일을 만든 고거 등에게 악감정을 약간 가지게 하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위나라가 제나라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몇 번의 군사행동을 벌일 때 위나라에게 몇 안되는 성과를 안겨준(...) 인물. 능력 자체의 부족으로 충분히 합공으로 격퇴할 수 있었던 일을 성을 내주는 것으로 끝내서 제후 전오의 명에 의해 중앙군 원수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졌다.

직하학궁의 문하생들이다. 조선이 민간 풍문을 얻는 과정에서 자주 출현하는 편이며, 월나라의 외교적 결례 2연타로 인해 일부는 조선으로 빠져나갔다.

원 역사에는 아예 주도적으로 나라를 팔아먹다시피한 매국노이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좋은데 어딘가 모자라서 한나라의 공작에 속아넘어가 영역을 넘겨주기도 할 뻔한 것 등으로 인해 고의성과는 별개로 죄를 문책당하여 가택연금 당하는 결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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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역사의 시호로 불리는 경향이 강했던 다른 극초기 군주들(위문후/위무후 모녀, 한경후, 조무후/조열후 2대, 노목공, 제강공 등)과는 달리 거의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이유는 강제의 시조 강태공의 존재 때문.[2] 자식을 보는 것을 금지당했지만 인질로 잡혀온 노나라 공자와 교류할 정도로 감시가 느슨했다.[3] 사후 조카인 전인제는 추기의 "그 사람이 특정 대상을 진심으로 미워하는 것, 나는 본 적이 없으니까."라고 밝혔다.아, 눈물 좀 닦고[4] 특히 송나라의 경우는 아예 속국으로 삼아버렸다.[5] 더군다나 다이스가 잘나오던 제나라가 전오 시절부터 꾸준히 고다이스 행진을 밟아서 얄미울 정도로 스레민들이 짜놓은 판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망쳐놓는지라 제나라와 전오를 덮어놓고 싫어하는 스레민들도 있었다.[6] 원 역사에서도 신의라 불리던 진월인을 믿지 못해서 사망했다.[7] 이를 두고 아들 전인제는 "빼앗은 사람은 병으로 고통스럽게 죽었는데, 정작 빼앗긴 사람은 천수를 누리고 편하게 죽었나."라고 평했다.[8] 사후 추기는 '현실은 착한 본성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에 제나라의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며 제나라 바깥의 사람에게 죽임당할지도 모르는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오명을 뒤집어썼다'고 추측했다. 전섬이 아이를 낳는 것을 금지한 것은 누군가가 전섬이 낳은 아이를 내세워 반역을 일으킨다면 결국 전섬까지 죽일 수밖에 없기에 그럴 가능성을 방지한 것이라고 해석했고.[9] 강제의 제환공 소백이 회맹을 열어 첫번째 패자로 공인받은 장소. 사실 맨 처음 회맹을 연 곳은 견(甄)이지만 천자에게 정식으로 인정받은 때는 규구 회맹.[10] 게다가 340년의 회맹에서 파나라가 회맹에는 주최자인 패자 외에도 인정자인 주나라의 사자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점을 지적하자, 추기가 '천자께서 패자에게 재량권을 부여했으니 개최자인 동시에 인정자이다'라고 수습은 했지만 막후에서는 '파나라를 초대하자던 놈이 누구냐'고 구체적으로 AA의 문자 6개가 깨지면서 분노했다.[11] 참고로 천자한테 종놈자식이라 욕한건 원역사에서도 그런걸로 추정된다(...)[12] 죽기 전에 추기의 유품이던 그 거문고를 켜려고 했지만 줄이 끊어지자 거문고를 같이 묻어달라고 하고 사람들을 물렸다.[13] 조선은 중원에서도 법가의 나라로 이름이 알려져 있어 조선 내 법가세력들의 공격으로 맹자를 깎아내려 그의 학파를 약체화시킬 의도였다.[14] 이것도 맹상군이 총대 매고 원래는 그냥 극현을 가져갈 생각이었던 것을 어떻게든 태산 장성 동부와 교환하는 것으로 완화한 것이다. 여러 이유로 정세 변화를 제하고도 조선 입장에서도 장성지대 절반보다는 극현의 가치가 컸다.[15] 다만 원 역사의 본인 재위 기간과는 너무나도 다른 처참한 현실 속에서 왕이 된 반대급부인지 재위 내내 본인과 국가의 역량을 과신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쏟아붓는 행보를 보였고, 결정적으로 끝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기 직전, 또는 이미 들고 일어난 상황 속에서 합종대전에서 잔존한 군사적 역량이 그 칼끝을 백성에게 향하게 하는 것만은 직접 막았다.[16] 굉장히 중요한 회맹이었지만, 전지가 기설에 대한 두려움으로 본인참석을 거부하고 대신 대부 왕촉을 상방에 임명하여 대리 참석시켜서 기설의 의심에 기름을 부었다.[17] 이때문에 본래 제를 도와야할 초왕 웅횡도 긴가민가하여 제나라를 벌주는 의제에는 동의하였다.[18] 조선이 태자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 지 염려하였던 전지가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멀리 떨어뜨려놓는 것도 겸해서 붙인 것이다.[19] 왕촉의 대책에 응하였지만, 회맹 과정에서 원래 합동으로 의견을 내기로 했던 한나라와 위나라가 형세상의 이유로 도리어 제나라를 공격하면서부터 경험 부족이 겹쳐 침착함을 잃었다.[20] 참고로 전투는 잘하지만 정보통제능력이 개판이라 사전에 새어나갔다(...)[21] 원역사에서부터 자기 아들인 맹상군이 문설주만큼 자라거든 자신을 죽이게 된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결정적인 오판을 저지른 맹상군의 과를 포함해 모든 책임을 최대한 자신이 뒤집어써 정치생명을 스스로 끝내게 되어 실현되었다.[22] 아버지를 만난 순서는 오로지 상상 속의 영역이 되었다.[23] 언니인 전벽강과 전영과는 아버지인 전인제가 거의 죽기 직전에 얻은 늦둥이었던 탓에 촌수 상 본인의 아랫세대와 동갑내기 뻘의 나이차이가 있었고, 이 때문에 매우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 조선이 언니의 나라의 절반과 그에 비례한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 이전까지의 위상, 마지막으로 막내언니의 정치생명 등을 앗아가는 상황을 모두 눈 앞에서 보고만 있어야 했다. [24] 그 와중에 일어난 곡부 전투로, 이번에는 조선이 맏언니의 멘탈까지 날려버리는 상황에서 곁에 있어주지조차 못했다.[25] 작중 묘사상 정작 돌아왔을 때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을 언니들은 이미 천수를 다한 뒤였다.[26] 이제서야 동갑내기격이였던 조카들과 함께 거의 모든 것을 거는 노력 끝에 그 결실을 맺기 직전이었는데 너무 어처구니 없는 단 하나의 실수 때문에 모든 게 틀어져 여태까지의 축적된 실패가 기폭하기 직전의 도화선으로 화해버린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상처가 패여있었는데다 오랜 볼모 생활의 영향으로 조카들보다 국정 경험 및 국가에 대한 책임감 또한 부족했다. 결국 스스로가 그 심지에 옮겨붙을지도 모를 불꽃으로 입장이 변해버렸다.[27] 이 여파로 어머니 전영이 자신과 이모 전벽강에 돌아갈 책임 일부를 스스로 최대한 뒤집어쓰고 물러나 유폐되었다.[28] 선왕 전벽강의 죽음을 이유로 팔아가며 하남대전에 모인 합횡군에 참여하지 않고 결집시킨 영혼의 한타였다.[29] 심지어 상대는 삐걱대던 사이인 극신-진개의 지방군 콤비였다.[30] 이 지역은 후일 제나라 정규군 주축의 산적단을 후원하는 배후가 되었다.[31] 어차피 이 시점에서는 그의 실책이 가져온 결과들로 인해 사실만 퍼졌다간 역적과 종이 한장 차이까지로 그의 위상은 제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바닥이 될 판이었다. 그가 책정받은 능력치는 근거지에서의 수많은 식객들로 인한 특수한 보정이 있었기에 개인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은 셈이다.[32] 이러저러한 사정이 겹쳐 조선군 17만, 제군 15만에서 제군측의 총대장으로써 조옹을 상대하였다. 조선은 산동대전에서 공자의 입장이었기에 병력 또한 자연스럽게 가려 뽑은 것들이며, 수비측이 동일 규모였더라도 국력상의 부담 자체가 한 수 위인 상황이었다. [33] 무덤에 칼자루 모양의 돌이 있는데 그것이 광장의 보검이라 불리운다. 물론 실제론 아니고 장사치들이 무덤을 유명하게 만들어보려는 수작이었다.[34] 물론 전반의 최정예 부대였다.[35] 대초전선[36] 원 역사 기준으로 전단은 제나라가 거와 즉묵만 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혜성같이 등장하면서 그 강역만큼은 확실히 원상복구시키는데 성공한 점을 생각하면 확실히 다른 결과.[37] 전기를 아예 생물체 취급조차 해주기 싫은지 '저거'라고 부르며, 전기와 밥을 먹느니 시체를 앞에 두고 밥을 먹겠다는 소리까지 했다.[38] 왜 '거의'냐면 진헌공 재위기에 진나라에 간 적이 있는데 마침 간만에 위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시기였는지라 진헌공 본인을 포함한 진나라 관료 전체가 축하 파티를 벌이고 있어서...[39] 전인제 본인의 성향도 있어 특유의 거친 태도 또한 대충 넘어간 편이기에 가능했다.[40] 말년에 장주와의 회담에서 자신이라는 옥을 사줄만한 사람들은 그 두사람뿐이었다고 답할정도로 존경하였다.[41] 대표적으로 맹자가 너무 이상적이다라며 비판하였다.[42] 인덱스를 대리aa로 쓰는 모브[43] 각각 송나라와 한나라로 공통적으로 무관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어 나름 파격적인 조건을 주고 데려가려고 했었지만, 대기업 과장 -> 부장이 중소기업 임원보다 당연하게도 여러 모로 형편이 좋은 이치로 인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