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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백제의 인물들의 목록.
고대의
백제에는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수많은 인물들이 존재했을 것이나,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상세하지 않다. 대신
일본서기에 백제인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잘 보면 삼국사기보다 많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서 그 기록이 굉장히 부족하다.
[1] 일례를 들자면 삼국사기 인물 열전의 50여 편 중에서도 백제인의 열전은 고작 3개 정도에 불과하다.
덕분에 백제사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편이다. 그런데 어째 고구려보다 남아있는 인물 숫자가 많은데 그 이유는 일본서기 덕분이다. 일본서기가 없었다면...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실
발해,
가야의 인물 기록도 상당한 비중을 일본의 기록에 할애하고 있는 등 한국 고대사에 있어 일본 사료의 비중은 결코 무시 못한다.
구분기준은 가나다순.
왕은
백제/왕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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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가마
| 사신
| 6세기
| 일본서기
|
각가
| 귀족
| 7세기
| 삼국사기
|
각복모
| 귀족
| 7세기
| 일본서기
|
각종
| 승려
| 7세기
| 일본서기
|
겸익
| 승려
| 6세기 초반
| 조선불교통사
|
계백
| 군인
| 7세기 중반
| 삼국사기
|
고달
| 사신
| 5세기
| 남제서
|
고수
| 대신
| 3세기 중반
| 삼국사기
|
고안무
| 학자
| 6세기 초반
| 일본서기
|
고이만년
| 반역자
| 5세기 후반
| 삼국사기
|
고흥
| 학자
| 4세기 중반
| 삼국사기
|
곡나진수
| 부흥운동가
| 7세기
| 삼국사기, 일본서기
|
곤우
| 장군
| 1세기
| 삼국사기
|
곤지
| 왕족
| 4세기 후반
| 삼국사기, 일본서기
|
과야신라
| 사신
| 6세기 중반
| 일본서기
|
곽충
| 개국공신
| 1세기
| 전씨세보
|
관륵
| 승려
| 7세기
| 일본서기
|
구저
| 사신
| 4세기
| 일본서기
|
구태
| 시조
| ?
| 주서
|
국변성
| 귀족
| 7세기
| 일본서기
|
국수다
| 귀족
| 6세기
| 일본서기
|
국지모
| 사신
| 7세기
| 삼국사기
|
귀신
| 망명자
| 5세기
| 일본서기
|
귀실복신
| 왕족, 부흥운동가
| 7세기 중반
| 삼국사기
|
귀실집사
| 부흥운동가
| 7세기
| 일본서기
|
귀실집신
| 의사
| 7세기
| 일본서기
|
귀지
| 유민
| 7세기
| 일본서기
|
금강중광
| 건축가
| 6세기 후반
| 곤고구미 연혁
|
기마차
| 음악가
| 6세기
| 일본서기
|
기미
| 대신
| 7세기
| 일본서기
|
길선
| 망명자
| 2세기 중반
| 삼국사기
|
길의
| 유민, 의사
| 8세기
| 속일본기
|
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노리사치계[2] 일본서기에는 누리시치케이(ぬりしちけい)라는 훈이 달려있다.
| 승려
| 6세기 후반
| 일본서기
|
능귀문
| 기술자
| 6세기 후반
| 일본서기
|
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다리
| 조각가
| 6세기
| 무령왕릉 출토 은팔찌
|
다상
| 승려
| 시기 미상
| 본조고승전
|
단양이
| 학자
| 6세기
| 일본서기
|
달사
| 장군
| 6세기
| 삼국사기
|
담욱
| 승려
| 6세기
| 조선불교통사
|
담혜
| 승려
| 6세기
| 일본서기
|
덕래
| 의원
| 5세기
| 속일본기
|
덕자진
| 유민,의사
| 8세기
| 일본서기
|
덕정상
| 관료
| 7세기
| 일본서기
|
덕좌왕
| 왕족
| ?
| 일본서기
|
덕집득
| 부흥운동가
| 6세기 중반
| 일본서기
|
도령
| 승려
| 7세기
| 본조고승전
|
도림
| 승려, 첩자
| 5세기 중반
| 삼국사기
|
도모
| 시조(?)[3]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시조를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으로 보며, 근구수왕 이전에 도모왕을 제외하고 1명의 왕이 더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BC 1세기
| 일본서기
|
도미
| 평민
| 2세기
| 삼국사기
|
도심
| 승려
| 6세기
| 조선불교통사
|
도엄
| 승려
| 6세기
| 일본서기
|
도장
| 승려
| 7세기
| 일본서기
|
도침
| 승려, 부흥운동가
| 6세기 중반
| 삼국사기
|
도흔
| 승려
| 7세기
| 일본서기
|
동성도천
| 사신
| 6세기
| 일본서기
|
동성자막고
| 사신
| 6세기
| 일본서기
|
동성자언[4] 위의 동성자막고와 함께 동성子이름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성씨가 아닌 그냥 동성왕의 자손 누구를 표기한 거란 견해가 있다.
| 사신
| 6세기
| 일본서기
|
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마나
| 장군
| 6세기
| 일본서기
|
마나군
| 관료
| 6세기
| 일본서기
|
마려
| 개국공신
| 1세기
| 삼국사기, 전씨세보
|
마로
| 장군
| 6세기
| 일본서기
|
마무
| 장군
| 6세기
| 일본서기
|
마전련
| 왕족
| ?
| 신찬성씨록
|
마정안
| 학자
| 6세기
| 일본서기
|
막고
| 사신
| 4세기
| 일본서기
|
막고해
| 군인
| 4세기 후반
| 삼국사기
|
모리가좌왕
| ?
| ?
| 신찬성씨록
|
모유
| 사신
| 5세기
| 남제서, 해동역사
|
목간나
| 장군
| 5세기
| 남제서
|
목금
| 장군
| 5세기
| 해동역사
|
목라근자
| 군인
| 4세기 중반
| 일본서기
|
목리금돈
| 사신
| 6세기
| 일본서기
|
목리마나
| 장군
| 6세기
| 일본서기
|
목리문차
| 사신
| 6세기
| 일본서기
|
목소귀자
| 관료, 유민
| 7세기
| 일본서기
|
목만치
| 권신
| 4세기 후반
| 일본서기
|
무수
| 귀족
| 7세기
| 삼국사기
|
문고고자
| 기술자
| 6세기
| 일본서기
|
문휴대산
| 사신
| 6세기
| 일본서기
|
물부오
| 사신
| 6세기
| 일본서기
|
미마사
| 관료
| 6세기
| 일본서기
|
미마지
| 무용가
| 7세기
| 일본서기
|
미산군
|
미주류
| 사신
| 4세기
| 일본서기
|
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반량풍
| 의사
| 6세기
| 일본서기
|
방제
| 승려
|
백가
| 대신, 반란자
| 5세기 후반
| 삼국사기, 일본서기
|
백기
| 장군
| 7세기
| 삼국사기
|
백매순
| 예술가
| 6세기 후반
| 일본서기
|
법명
| 승려
| 7세기
| 일본서기
|
보과
| 왕비
| 3세기 후반
| 삼국사기
|
복부미신
| 사신
| 6세기 후반
| 일본서기
|
부여경
| 왕족, 유민
| 7세기 후반
| 구당서
|
부여교기
| 왕족
| 6세기 중반
| 일본서기
|
부여문사
| 왕족 ,유민
| 7세기
| 삼국사기, 신당서
|
부여선광
| 왕족, 정치가
|
부여설례
| 왕족, 정치가
| 4세기 후반
| 삼국사기
|
부여연
| 왕족, 유민
| 7세기
| 삼국사기, 구당서
|
부여용
| 왕족, 부흥운동가
| 7세기
| 구당서
|
부여융
| 왕족, 부흥운동가
| 7세기
| 삼국사기, 일본서기
|
부여자신
| 왕족
|
부여질
| 왕족
| 2세기 초반
| 삼국사기
|
부여충
| 왕족, 부흥운동가
| 7세기
| 문헌비고
|
부여충승
| 왕족, 부흥운동가
| 7세기
| 삼국사기
|
부여충지
| 왕족, 부흥운동가
| 7세기
| 삼국사기
|
부여태
| 왕족
| 7세기
| 삼국사기
|
부여풍
| 왕족
| 7세기
| 삼국사기, 일본서기
|
부여홍
| 왕족, 관료
| 4세기 후반
| 삼국사기
|
부여효
| 왕족
| 7세기
| 삼국사기, 구당서
|
부여훈해
| 왕족
| 4세기 후반
| 삼국사기
|
비류
| 왕족
| 1세기
| 삼국사기
|
비리막고
| 관료
| 6세기
| 일본서기
|
비타
| 관료
| 5세기 후반
| 삼국사기
|
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아비지
| 장인
| 6세기 중반
| 삼국유사
|
아이부인
| 왕족
| 4세기
| 삼국사기
|
아좌태자
| 왕족, 예술가
| 6세기 후반
| 일본서기
|
아직기
| 학자
| 4-5세기
| 일본서기,고사기
|
약엽례
| 외교가
| 6세기
| 일본서기
|
양무
|
억례복류
| 유민
| 7세기
| 일본서기
|
억인
|
여고
|
여곤
|
여기
|
여례
|
여신
|
연돌
|
연모
|
연문진
| 외교가
| 7세기
| 수서
|
연신
| 반역자
| 5세기
| 삼국사기
|
연회
|
영근
|
영위
|
영조율사
| 승려
| 6세기 말
| 일본서기
|
예군
| 매국노
| 7세기
| 삼국사기[5] 다만 이 인물이 백제인으로 밝혀진 건 묘지명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
예식진
| 매국노
| 7세기
| 삼국사기
|
오간
| 개국공신
| 1세기
| 삼국사기, 전씨세보
|
왕도량
| 학자
| 6세기
| 일본서기
|
왕무
| 사신
| 5세기
| 남제서
|
왕변나
| 외교가
| 6세기 말
| 삼국사기
|
왕보손
| 학자
| 6세기
| 일본서기
|
왕유귀
| 학자
| 6세기
| 일본서기
|
왕유릉타
| 의사
| 6세기
| 일본서기
|
왕인
| 학자
| 4-5세기
| 일본서기, 고사기
|
왕진이
| 학자
| 6세기
| 일본서기
|
왕효린
| 외교가
| 7세기
| 삼국사기
|
우두
| 대신
| 3세기 중반
| 삼국사기
|
우복
| 왕족, 반란자
| 4세기
| 삼국사기
|
우서
| 대신
| 5세기
| 송서
|
우소
| 군인
| 1세기
| 삼국사기
|
우수
| 왕족, 정치가
| 3세기
| 삼국사기
|
우영
| 군인
| 6세기
| 삼국사기
|
우태
| 시조
| 기원전 1세기?
| 삼국사기
|
원각
| 승려
| 6세기
| 본조고승전
|
원세
| 승려
| 6세기
| 본조고승전
|
유기
| 대신
| 3세기 중반
| 삼국사기
|
윤충
| 군인
| 6세기 중반
| 삼국사기
|
은고
| 왕족
| 7세기
| 일본서기
|
은상
| 군인
| 7세기
| 삼국사기
|
을음
| 개국공신
| 1세기
| 삼국사기,전씨세보
|
의각
| 승려
| 7세기
| 본조고승전
|
의직
| 군인
| 6세기 중후반
| 삼국사기
|
인사라아
| 화공
| 5세기
| 일본서기
|
인우
| 대신
| 6세기
| 삼국사기
|
일라
| 망명인
| 6세기
| 일본서기
|
임자
| 간신
| 7세기
| 삼국사기
|
임성태자(또는 임정태자)
| 망명인[6] 전국시대 다이묘 가문 중 하나인 오우치(大内) 가문이 이 사람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 7세기
| 오우치 가문 족보, 증보문헌비고
|
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찬수류
| 문신
| 5세기
| 남제서
|
찬불
| 유민
| 7세기
| 계유명삼존천불비상
|
창성
| 왕족, 유민
| 7세기
| 일본서기
|
축자국조
| 장군
| 6세기
| 일본서기
|
충상
| 장군
| 7세기
| 삼국사기
|
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태량미태
| 기술자
| 6세기
| 일본서기
|
태아랑왕
| 왕족
| 5세기
| 일본서기
|
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파가
| 대신
| 7세기
| 삼국사기
|
팔수부인
| 왕족
| 5세기
| 삼국사기
|
풍국
| 승려
| 6세기
| 일본서기
|
풍야부
| 대신
| 5세기
| 송서
|
이름
| 분류
| 시기
| 확인되는 사료
|
한세기
| 개국공신
| 1세기
| 전씨세보
|
해구
| 대신
| 5세기
| 삼국사기
|
해례곤
| 장수
| 5세기
| 남제서
|
해루
| 대신
| 1세기
| 삼국사기
|
해수
| 대신
| 5세기
| 삼국사기
|
해충
| 대신
| 5세기
| 삼국사기
|
행기
| 승려
| 7세기
| 속일본기
|
혜린
|
혜묘
|
혜지
|
혜총
|
혜현
|
회매
| 대신
| 5세기
| 남제서
|
훈해
| 왕족
| 5세기
| 삼국사기
|
흑치상지
| 군인
| 630~689
| 삼국사기 흑치상지묘지명
|
흑치준
| 유민
| 676~706
| 흑치준 묘지명
|
흘우
| 개국공신
| 1세기
| 전씨세보
|
흥수
| 대신
| 1세기 초반
| 삼국사기
|
- 당대의 2인자이자 오늘날의 총리나 수상 격에 해당하는 자리. 나열 순서는 재임순, ()는 재위기간.
- 260년 고이왕의 관등정비[7]
허나 이후의 기록이 앞당겨진것 이라며 추측되며 근초고왕 시기때 비로소 관등 정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자세한 내용은고이왕 문서를 참고 바란다.
이후 좌평[8] 현대의 장관에 대치되며 중국 6전제의 영향을 받아 6좌평제로 체계화되었다.
직이 신설되고 내신좌평[9] 왕명 출납을 담당했으며 현대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대치된다.
이 수석 좌평으로서 좌평들을 통솔했으나 408년 상좌평이 새로이 신설되어 좌평들의 좌장으로서 정사암 회의를 관장하고 나랏일을 총괄하였다.[10]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기존의 6좌평과 별개의 존재로 왕이 측근을 임명했다는 견해도 있고, 기존의 내신좌평 동일하게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후 사비시대 후반부터 언급되는 대좌평직은 일반적으로 상좌평과 동일한 관직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상좌평 문서를 참고하길 바란다.
- 부여우수(260~?)-최초의 내신좌평
- 부여우복(321~327)
- 진의(333~?)
- 진고도(376~?)
- 부여홍(394~407)
- 부여신(407~408)
- 부여신(408~429)-최초의 상좌평[11]
- 해수(429~455)
- 부여문주(455~475?)-훗날의 문주왕
- 사택기루(6세기 중반)
- 사택지적(?~654?)
- 사택천복(?~660)-백제의 마지막 대좌평(상좌평)
- 기록에서 얼마 남지 않은 백제의 인물 중 백제의 장수로서 주목할만한 군사적 성과가 기록된 인물
- 곤우
- 진과
- 목라근자
- 저근: 충성과 공로를 다하여 국난을 제거해서 사직을 견고하게 지킨 데 대한 논공이 있고 시무를 보좌하는데 무공이 뛰어났다는 공로로 백제로부터 중국 남제에게 관직의 제수가 요청되어 남제로부터 삭녕장군에 임명됐으며 백제의 제후왕으로서 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웅진 천도 당시 이탈한 지방세력들을 복속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리라 추측된다.
- 목간나외 3명(사법명,찬수류,혜레곤): 모두 490년 북위의 침공에 맞서 공을 세운 장수들이다. 이 중 목간나는 유일하게 과거에도 군공이 있고, 선박과 성문을 때려 부수었다는 구체적인 군공의 설명이 있어 북위와의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하였고 이전의 다른 전쟁에서도 공을 세웠던 명장으로 추측된다.
- 진로
- 달사
- 지충
- 사걸
- 윤충
- 계백
- 귀실복신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30 08:03:18에 나무위키
백제/인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