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묵(독립운동가)

덤프버전 : r20210301



성명
김관묵(金寬默)
자/호
직부(直夫)/경재(敬齋)
본관
선산 김씨
생몰
1894년 5월 26일 ~ 1967년[1] 11월 14일
출생지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사망지
대구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김관묵은 1894년 5월 26일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에서 김태동(金太東)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살 때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로 이주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20일 가조면 장기리에서 김병직(金秉直)·어명준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구타당하여 반죽음 상태로 거창 일본군헌병대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이 석강리에도 전해졌다. 이에 오문현(吳文鉉)[2]·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어명철·이병홍(李秉洪)·김호등 여섯 사람이 추진위원이 되어 3월 21일 가조면과 가북면 일대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3월 22일 아침 거창 주둔 일본헌병분대가 주동인물들을 체포하여 취조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김관묵은 가조면·가북면 사람 3천여명과 함께 이날 오후 2시 30분경, 몽둥이를 가지고 장기리 만도정(晩嶋亭) 앞에서 대형 독립기를 세운 후,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며 거창읍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시위대열이 사포현에 이르렀을 때 거창 일본군헌병대와 용산 일본군 헌병분견대가 합세하여 진로를 차단하고 공포를 발사하며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군중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헌병들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67년 11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김관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에는 1976년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2] 독립유공자 오문현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