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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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6년 10월 30일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대화동
사망
1965년 10월 15일
전라남도 해남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생애[편집]


김동훈은 1896년 10월 30일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대화동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던 그는 1919년 3월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1919년 4월 1일, 같은 마을에서 명망높은 인사였던 안정석(安正錫)[1]·안유석(安儒錫)과 논의하였다.

이후 이형춘(李亨春)·안창석·손태옥(孫太玉)·남상권·손승옥(孫升玉)·조종운(曺鐘運)·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및 읍내의 유지 김경두(金璟斗)[2]·한창수·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과도 연락을 취해 뜻을 모았다.

김동훈은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자신의 집에서 목판을 제작하여 김경두 등과 함께 종이 태극기 800여 매를 인쇄하였고, 당목으로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구교리에 있었던 김양운(金良云)의 집에서 조종운·김흥봉·안창석·이형춘 등과 협의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 1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1919년 4월 6일에 있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사를 군민들에게 알리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거사 당일, 김동훈 등은 미리 제작해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했던 태극기를 해남로(海南路) 큰길로 운반하였고, 시장에 모여든 수백 명의 인파를 규합하여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며 해남읍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대열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다. 이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191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해남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5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김동훈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안정석과 동명이인이다.[2]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김경두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