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앞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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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입향 경위
3. 현황 및 근세 독립운동 명문으로 발전
4. 인물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내앞김씨로 일컬어지는 의성김씨의 한 종파는 조선중기에 안동 입향조 김거두(金居斗)의 현손 김만근(金萬謹)이 14세기 말 임하면 천전리(내앞)에 정착한 후 청계 김진의 아버지 김예범이후로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을 중시조로하여 내앞마을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김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면서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 사족으로 발전한 가문이고, 일제침략기에는 독립운동에 앞장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손수 실천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경북지역에서는 그들을 내앞김씨라고 부르고 있다.





2. 입향 경위[편집]



고려 공민왕 12년 흥왕사 변란 때 화를 당한 문예부좌사윤 김태권(金台權)의 아들 공조전서 김거두가 화를 피하여 외향의 연고가 있는 안동으로 낙향하여 풍산현에 거주하였는데 김거두의 아들 김천(金洊)이 다시 부내 방적동으로 이거하였다. 김천의 아들 신령현감 김영명(金永命)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은 임하현에 살던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사위가 되어 내앞으로 이거하였고, 김만근의 동생 김만흠(金萬欽)의 후손은 일직면 귀미리에 정착하였다.

김예범(金禮範)의 아들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은 의성김씨 내앞시대의 개창조로서 곳곳에 서당을 세우고 후진양성에 힘써서 아들 5형제가 모두 입신하였다. 넷째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임진왜란시 진주성을 수호하여 국란 극복에 앞장섰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막내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도 문과에 올라 울산군수와 창원부사를 지내고 성균관(成均館)의 사예(司藝)와 풍기 군수를 지냈다.

첫째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은 문과를 거쳐 예조정랑을 지냈고, 둘째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과 셋째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숭정처사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1598~1669), 대사간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 학행으로 추중을 받는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 1649~1711), 영남 유학의 거장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은 김극일의 후손이다.

김수일의 아들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은 1590년 문과에 올라 임진왜란 때 안동수성장을 지내고 의주 행재소로 선조를 호종하면서 일상을 기록한 호종일기(扈從日記)』를 남겼다. 우리나라 서지학의 효시라 할 만한 해동문헌(海東文獻)』을 저술한 경와(敬窩) 김휴(金烋, 1597~1628), 가학전수와 후진양성에 힘써 손자 셋을 문과에 급제시킨 김임(金imagefont, 1604~1667)은 김용의 손자이다.

김임의 손자들 중 칠탄(七灘) 김세흠(金世欽, 1649~1720)이 1687년,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 1652~1720)과 김세호(金世鎬, 1652~1722, 호 귀주)가 1670년 문과에 올라 의성김씨 3학사로 일컬어지며 각각 홍문관교리, 사간원정언, 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66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학문으로 이름이 있는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 1628~1673)는 김명일의 현손이다.

운암 김명일의 후손은 임하면 신덕리와 임하리에 살고 있다. 병조좌랑을 지낸 김시권(金是權, 1583~1643), 이조정랑을 지낸 김기찬(金驥燦, 1748~1812), 귀양살이를 기록한 「북천가(北遷歌)」를 남겨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귀중한 자료 하나를 보탠 겸와(謙窩) 김진형(金鎭衡, 1801~1865)은 김성일의 후손이고, 조선 말기의 대학자로 퇴계학맥의 마지막 거봉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35~1899)은 김성일의 종손이다. 1657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 도승지, 한성부윤등을 역임한 김빈(1621~1694)은 김복일의 증손이다.

내앞의 의성김씨는 입향 이후 대대로 학문과 과한이 끊이지 않아 문과 급제자 24명, 생원 진사 66명, 문집을 출간하거나 유고를 남긴 이가 215명이다. 현재에도 산업계, 학계, 예술계등에 후손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3. 현황 및 근세 독립운동 명문으로 발전[편집]



김만근의 장자 김인범(金仁範)의 후손은 현재의 송천, 임하, 저전 등지에 흩어져 살았으며, 차자 김예범(禮範)은 임하면 천전리에 정착하여 그 후손이 500여 년 세거하면서 크게 번성하게 된다. 김극일의 후손은 임하면 천전리, 임동면 지례리, 길안면 오대리 등지에, 귀봉 김수일의 후손은 현재 임하면 천전리, 추월리, 서후면 태장리 등지에, 김성일의 후손은 현재 서후면 금계리, 봉화군 소천면 등지에, 김복일의 후손은 김복일이 처가인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로 이거한 이래로 세거하고 있다. 한편 김도화의 후손들은 일직면 귀미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현재까지 살고 있다.

일직면 귀미리에는 김만흠의 증손 김안계(金安繼, 1556~1599)가 구계(龜溪) 이중립(李中立)의 사위가 되어 정착하였다. 김안계의 7세손 귀와(龜窩) 김굉(1739~1816)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고, 김굉의 증손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는 퇴계학맥을 이은 대학자로 을미사변 이후 의병진을 결성하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안동내앞마을(천전리) 바로옆에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한 우국지사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 경상북도 안동인데 그 중심에 의성김씨 가문과 또한 내앞김씨들이 많다. 단일 성씨로는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며,

영남지역 의병활동의 시발점이 된 서산 김흥락을 비롯, 66세의 노령임에도 마을 청장년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이주 한인들의 정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하(白下) 김대락(1845)(大洛, 1845~1914),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등에서 활약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협동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파리장서의거에 참여했다 체포된 종손 김병식(秉植, 1856~1936), 김구 선생과 김일성이 만나는 남북연석회의 의장을 맡은 김월송, 서산 김흥락의 손자인 조선 3대 파락호 김용환(1887) 등 서훈된 독립유공자만 106명이나 된다.



4. 인물[편집]





5. 참고문헌[편집]



디지털 안동문화 대전
의성김씨 대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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