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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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탄생과 초기 생애
3. 고문기술자로서의 삶
4. 사망


1. 개요[편집]


來俊臣(651-697)

당나라 측천무후 시기에 활동한 혹리[1]. 측천무후의 앞잡이로서 악명을 떨쳤으나 너무 자신만만하게 왕족을 모함했다가 권좌에서 끌어내려지고 죽음까지 맞이했다.


2. 탄생과 초기 생애[편집]


내준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채본이라는 인물로 여겨지지만 내준신을 키운 아버지는 내조라는 사람이며 본인도 그의 성을 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내조와 채본이 도박을 했는데 채본이 돈을 다 잃자 임신한 아내까지 담보로 걸었다가 그 도박마저 지며 아내를 내어주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내준신이라는 설이 있다.

내준신은 한량으로 살았다. 어느날 강도강간죄로 감옥에 갔다가 죄를 경감받기 위해 동료 죄수를 밀고하는 일을 자주 했는데 한두번은 그렇다쳐도 너무 자주 밀고를 하자 자사의 화를 사서 곤장 100대[2]를 선고받았다.

그런데 내준신을 처벌한 옹주자사 왕속이 역모를 꾸몄다가 사형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내준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이 왕속의 역모를 고발하려다가 도리어 처벌을 당했다는 내용의 밀고서를 측천무후에게 보내고 측천무후는 그런 내준신을 신뢰하여 조산대부에 임명한다.


3. 고문기술자로서의 삶[편집]


측천무후의 신임을 받으며 권력을 손에 쥔 내준신은 측천무후의 앞잡이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상한 쪽으로 머리가 빨리 도는 사람이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문도구를 만들었다. [3]

내준신은 이렇게 고문도구를 만들고 쓰는 것뿐만 아니라 심리전에서도 능력이 있어서 심문 전에는 고문도구를 죄수들에게 보여주며 그 쓰임을 일일히 말해줬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죄수는 겁에 질려 내준신이 원하는대로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관리들은 내준신의 사무실 문을 예경문이라 불렀는데 이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관직은 경친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높은 관리라도 내준신에게 찍히면 생명을 연장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내준신은 자신의 동업자였던 주홍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을 듣자 그를 심문했는데 그 방식이 상당히 교활했다. 먼저 그는 주홍을 집에 초대해 연회를 배풀다가 “최근 입이 무거운 죄수가 있어 심문이 어려우니 신박한 고문방법을 생각해달라”라고 부탁한다. 이에 주홍은 “솥에 넣어 삶으면 된다”라고 답했는데 그 말을 듣자 내준신은 “너가 역모를 꾸몄다는 것을 알고있으니 너가 솥에 들어가라”라며 본색을 드러냈다. 공포에 질린 주홍은 있지도 않은 역모사실을 전부 불었고 처형당했다.


4. 사망[편집]


내준신은 말년들어 고위관료를 모함하는 것을 넘어 측천무후의 친족들을 모함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그의 가장 강력한 뒷배였던 측천무후는 내준신에게 완전히 질려버렸고 점점 내준신은 견재를 받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내준신의 친구 위수충이 술에 취해 그를 욕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술에서 깬 위수충은 내준신의 보복이 두려워 측천무후에게 내준신이 모반을 꾀했다고 거짓 신고를 한다. 결국 697년 내준신은 처형되었다. 내준신이 죽던 날 장안의 모든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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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혹한 관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이나 측천무후 시기에 활동한 고문기술자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2] 곤장 100대는 거의 사형에 가까운 형벌이다[3] 내준신이 만든 고문도구로는 원심분리기인 돌지후, 머리에 씌우고 적절한 답을 듣지 못하면 송곳을 끼워 처형할 수 있는 모자인 철권룡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