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폴리스 전투(기원전 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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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
3.2. 폰토스 왕국군
4.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기원전 48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폰토스 왕국파르나케스 2세가 이끄는 폰토스군이 니코폴리스[1]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

2. 배경[편집]


기원전 48년 여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시리아 등 동방 속주들의 질서를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스 속주는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에게 맡기고, 일리리아는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에게 맡겼으며, 소아시아 속주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맡기고, 시리아 속주는 사촌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맡겼다. 그렇게 각지에 부하들을 총독으로 부임시킨 뒤, 이집트로 달아난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소아시아에 도착한 칼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고참병이었다가 카이사르에게 귀순한 이들로 구성된 제36군단을 포함한 3개 군단을 소집하여 그곳의 질서를 잡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폰토스 왕국의 군주 파르나케스 2세가 로마 공화국이 내전을 치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야망을 이룰 때가 왔다고 여기고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소 아르메니아를 잇따라 공략하여 영역을 확장했다.

로마의 동맹국이었던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군주들이 칼비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며 위태로운 지경에 몰려있던 카이사르의 구원 요청에 따라 2개 군단을 보내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당장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시간을 끌기로 하고, 파르나케스 2세에게 "당장 빼앗은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 후 제36군단을 이끌고 코마나로 이동했고, 최근에 현지인들로부터 징집한 1개 군단, 갈라티아 2개 군단, 카파도키아 보병 10,000명, 그리고 기병 1,000명이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파르나케스 2세는 카파도키아에서 철수하는 건 동의했지만 소 아르메니아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마땅히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협상 용의가 있다고 꾸준히 알렸지만, 칼비누스는 그가 수비하기 불리한 칼리키아에서 물러나 방어에 용이한 소 아르메니아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일 뿐 실제로 평화 협상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걸 간파하고 소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막대한 제물을 제시하며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청했으나 소용이 없자, 니코폴리스 인근으로 후퇴했다. 그는 도시 앞 평원에 주력군을 숙영시키고 인근 숲에 기병대를 매복시킨 뒤 적이 몰려오길 기다렸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하게 해, 칼비누스가 "적이 겁을 집어먹고 싸우길 꺼리는구나"라고 오판하여 방심한 채 쳐들어오길 기대했다.

그러나 니코폴리스 시에서 7마일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운 칼비누스가 의외로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는 바람에 로마군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자, 파르나케스 2세는 이러다 매복이 발각될 걸 우려해 매복한 군대를 본진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 후 협상이 결렬되자, 칼비누스는 니코폴리스 근처로 이동하여 또다른 숙영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적군이 도시 인근 고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았고, 파르나케스 2세 역시 유리한 지형을 버리고 적과 교전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양측은 서로 대치만 할 뿐 쉽사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사르가 칼비누스에게 보낸 2명의 전령이 폰토스 장병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상황이 위급하니 군대를 더 보내달라"는 카이사르의 메시지를 가져왔다. 파르나케스는 이 메시지가 로마군이 철수하거나 불리한 전투를 감행하게 하기를 희망하고, 그들을 풀어줬다. 칼비누스는 카이사르의 메시지를 받은 뒤 깊이 고민하다가, 폰토스군을 하루속히 격파하고 카이사를 돕기로 마음먹고 다음날 군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진군했다. 이리하여 니코폴리스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로마군[편집]



3.2. 폰토스 왕국군[편집]



4. 경과[편집]


파르나케스 2세는 전투 전에 적군이 전장을 우회하여 아군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걸 막기 위해 도시 성벽 근처에 깊이 4피트의 도랑 2개를 파고, 그 사이에 보병대를 배치했으며, 양 끝에 기병대를 배치했다. 폰토스군의 전면은 팔랑크스 대형을 갖췄고, 측면은 3개의 예비 부대로 강화했다. 같은 방식으로 3개의 전선이 편성되었는데, 중앙을 따라 오른쪽과 왼쪽으로 간격을 뒀고, 단순하고 직선적인 열로 이어졌다.

누가 봐도 이렇게 방비를 단단히 한 적을 무리하게 공격하면 큰 손실을 입을 게 자명했지만, 칼비누스는 어서 저들을 물리치고 카이사르를 돕고 싶었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우익은 제36군단이 맡았고 좌익은 카파도키아 보병이 맡았으며, 중앙엔 갈라티아 2개 군단이 맡았다. 또한 1,000 기병은 양측면에서 이동했고, 속주민 1개 군단이 예비대로서 후방에 배치되었다.

로마군이 접근해오자, 폰토스 경기병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군단병들은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꿋꿋이 전진해 적과 교전했다. 갈라티아 2개 군단이 전면에서 적군과 근접전을 벌이는 동안, 제 36군단은 도시 성벽으로 진격한 후 참호를 건너 후방에서 적 보병을 공격했다. 하지만 사전에 편성된 폰토스 예비대가 이들을 저지해서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좌익을 맡았던 카파도키아 보병대가 참호를 건너다가 적의 화살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다. 좌익이 무너지자 중앙에서 싸우던 갈라티아 2개 군단마저 동요하여 큰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전과 확대를 위해 제36군단의 오른쪽 측면과 중앙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칼비누스는 병사들에게 원형 방진을 평성하도록 했고, 그들은 수적으로 우월한 적의 맹공을 잘 막아내며 산기슭으로 후퇴했다. 폰토스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는 걸 단념하고, 대신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카파도키아와 칼라티아군을 추격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리하여 니코폴리스 전투는 폰토스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편집]


기록에 따르면, 칼비누스는 이날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2/3을 잃었다고 한다. 사상자 대부분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 보병들이었고, 제36군단의 사상자는 250명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칼비누스가 패잔병들을 이끌고 철수한 뒤, 파르나케스 2세는 카파도키아로 재차 쳐들어가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로마 시민들을 학살하고 소년들을 거세했으며, 국고를 약탈했다.

그러나 보스포로스 왕국에서 사위 아산드로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르나케스 2세는 더 이상 공세를 펼치지 않고 흑해를 건너 크림 반도에 있는 보스포란 왕국으로 진군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가 소아시아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카이사르를 먼저 처리하기로 하고 군대를 돌렸다. 이후 양자는 소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젤라 전투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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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터키 시바스 주 코율히사르(Koyulhis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