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네이션즈/역사적 설명/건물(유니버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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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오나르도 다 빈치[편집]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기초적인 정규 교육만 받은 후 14세의 나이에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베로키오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1482년에 다빈치는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및 여러 주요 이탈리아 도시 국가 궁정에서 화가이자 기술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활동하다 1519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동시대의 예술가들처럼 다빈치 역시 미술과 과학을 분리하지 않고 두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다수의 걸작을 그렸습니다.

수백 년 후에나 발명된 잠수함, 헬리콥터, 전차, 자전거 등으로 보이는 기계의 설계도를 그렸고 해부학, 광학, 건축, 지질학, 식물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를 연구했으며,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지 각 분야에서 실제로 남긴 업적은 극히 적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인 다빈치의 그림은 20여 점에 불과합니다. 또한, 뛰어난 발명가임에도 당시로서는 소재를 구할 수 없거나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 대부분의 설계를 구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빈치의 업적이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빈치는 온 인류가 인정하는 천재이자,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일 것입니다.


2. 카타리나 여제[편집]


1762년부터 1796년까지 러시아를 통치한 카타리나 여제는 독일의 공주 출신으로, 남편인 표트르 3세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습니다. 독일인 남편이었던 표트르 3세와는 달리 카타리나 여제는 통치 대상 국가였던 러시아를 받아들였으며 그로 인해 백성들의 숭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타리나 여제는 계몽주의를 표방하며 통치 초기에 근대 헌법의 토대로 인정을 받는 교서인 헌법을 공포했습니다. 이 헌법을 통해 여제는 특히 농노, 즉 농장을 자유롭게 떠날 수 없었으며 사실상 지주의 소유물이나 다름없던 소작농 계급에게 자유를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헌법 적용에 반대했습니다. 이처럼 국내 정세가 혼란해지자 카타리나 여제는 러시아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외국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평생에 걸쳐 폴란드의 3개 영토를 점령합니다.

카타리나 여제가 즉위했던 시대는 오늘날 제정 러시아의 황금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카타리나 여제는 영토를 확장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으며, 무역을 장려하고 지방 통치 체제를 재편했습니다. 문화 측면에서 볼 때 카타리나 예제는 50년 전에 러시아를 변방에서 예술과 문화 중심지로 바꿔 놓은 표트르 1세의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 여제는 백성의 대다수였던 농노의 삶을 개선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파벨 1세의 왕위 계승 과정도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업적을 이루어 냈기에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통치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3. 세종대왕[편집]


세종대왕은 조선의 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년~1450년입니다. 4명의 아들 중 셋째임에도 뛰어나게 총명하여 세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성리학적 신념으로 자신이나 소수의 양반이 아닌 백성을 위한 통치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리하여 엄한 형벌을 금지했으며 보릿고개가 되면 비축해 둔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한글을 발명한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왕의 자문 역할을 하고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만든 학문 기관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그 전까지 한국어는 한자로 기록되어 왔는데, 한문은 배우기가 어려워 소수 귀족만이 익힐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일반 백성들도 읽고 쓰는 법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글을 새롭게 발명했습니다. 그리하여 중세 사회인 조선 시대에 이미 양반 가문의 여성들과 평범한 백성들도 글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현재도 한국어는 한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은 활자 기술, 시계, 나침반 등 기술 분야에서도 다양한 발명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박격포, 화창 기병 등의 화약 무기도 도입했으며 수군은 일본과 강제 교역을 하던 왜군 해적을 소탕했습니다.

왕위 승계 과정의 문제로 인해 업적이 다소 폄하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과학, 문화 및 전쟁에서 큰 업적을 이룬 세종대왕은 모범적인 통치자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4. 술탄 살라딘[편집]


1138년에 쿠르드족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살라딘은 군사 학교를 졸업한 후 삼촌과 함께 1169년의 이집트 정복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전합니다. 이집트 정복에서 삼촌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된 살라딘은 자신의 군대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살라딘은 자신의 멘토이자 통치자인 누르 알 딘에 맞섰습니다. 누르 알 딘은 반발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자 했으나 1174년에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이후 살라딘은 누르 알 딘의 영토를 점령하고 1175년에 압바스 왕조로부터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후 10여 년에 걸쳐 살라딘은 외교적 수단과 군사력을 모두 동원하여 무슬림 영토를 통합 통치하게 됩니다.

1차 십자군 원정 이후 많은 십자군 기사들이 성지에 영토를 확보하고 예루살렘을 상징적인 중심지로 선언합니다. 살라딘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루살렘을 재탈환하고 십자군을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십자군을 유인하여 하틴 전투에서 처치한 후 기독교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영토 몇 곳을 남기고 모두 탈환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에 대항해 3차 십자군 원정을 감행하며, 이때 살라딘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및 프랑스의 필리프 아우구스투스가 이끄는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 후 무슬림의 예루살렘 통치권을 인정하고 기독교 순례자들의 예루살렘 방문을 허용하는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십자군과의 전투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살라딘은 리처드 왕이 떠난 직후인 1193년에 사망했습니다.

살라딘은 무슬림 국가는 물론 서방 세계에서도 군사적 업적과 기사도 정신으로 매우 유명합니다. 하틴 전투 이후 그는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다'며 포로로 잡힌 예루살렘의 기 왕을 살려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재탈환했을 때에는 100년 전에 십자군이 무슬림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가 아닌 기독교인들은 살려 줄 것을 명령했습니다.

살라딘과 리처드 왕은 서로의 기백과 지휘력을 높게 평가했으며, 리처드 왕의 말이 죽었을 때에는 대신 탈 말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살라딘은 바른 품행과 뛰어난 무공으로 여전히 전 세계 쿠르드족, 아랍인, 무슬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자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5. 쉴레이만 대제[편집]


1520년에서 1566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쉴레이만 1세는 셀림 1세의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로,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에서 자랐습니다. 왕위에 오른 쉴레이만 1세는 즉시 제국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규모 해상 포위 공격을 통해 로도스 섬에서 기사간호단을 몰아내고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악천후로 인해 유럽으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1529년과 1532년에 비엔나에서 진격을 멈춰야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동쪽으로 진로를 변경하여 페르시아의 사파위 왕조 영토를 정복했습니다. 쉴레이만 1세는 장기간의 재임 끝에 71세를 일기로 헝가리 진격 중 사망했습니다.

쉴레이만 1세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포병대와 '친위 보병'이라는 정예 사수 보병대를 앞세운 현대화된 부대를 이끌고 제국을 확장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전통적으로 육지를 기반으로 하는 제국이었지만 술레이만의 함대는 지중해 서부에서 인도 해안까지 진출했습니다.

술레이만의 영토 확장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 왕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키기 위해 술레이만과 연합하게 됩니다. 유럽 국가들은 무슬림 제국과 연합을 한 프랑스를 비난했지만 이 연합은 나폴레옹 시대까지 수백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쉴레이만은 부강하고 광대한 제국으로 인해 서양에서 '대제'로 불립니다. 쉴레이만 제국의 투르크인들에게 쉴레이만은 법률과 통치 체제를 근대화한 '입법왕'입니다. 술레이만은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주도했으며 이 시기 동안 제국은 경제 문화적으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시인이기도 했던 술레이만은 건축가 시난과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후 오스만 제국은 여러 황제를 거치며 점차 서서히 쇠퇴했습니다. 그 이후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술레이만 시대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6. 무사 케이타[편집]


말리 제국은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서아프리카 지역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서아프리카의 풍부한 금과 소금 광산을 차지하여 축적한 막대한 부로 현대식 군대를 유지했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말리 제국 통치자인 무사 케이타는 만딩고어로 왕을 뜻하는 만사, 즉 '만사 무사'로, 아부 바크르 2세가 배 2,000척과 함께 대서양으로 원정을 떠나고자 왕좌에서 내려온 이후인 1310년경 권력을 차지했는데, 선왕이 원정에서 돌아오지 않자 제국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324년 그는 스스로 수천 명의 하인과 노예, 수행원과 함께 말리 제국의 막대한 부를 싣고 메카 순례를 떠났습니다. 무사 케이타는 그가 방문한 도시, 특히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를 나눠주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금을 너무 많이 나누어준 탓에 10년 이상 금값이 폭등하기도 했습니다.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국가에 방문하여 무역과 외교 관계를 강화했으며, 건축가와 학자를 등용하여 팀북투의 유명한 산코레 대학을 포함한 모스크, 궁전, 마드라스를 말리에 세워 말리 제국은 막대한 부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에서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도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사 케이타는 독실한 무슬림이자, 유능한 통치자이자, 뛰어난 정복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가오와 팀북투와 같은 도시를 포함한 많은 영토를 평화적이고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차지했습니다. 팀북투는 무사 케이타의 지원 아래 활기 넘치는 무역과 교육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성지 순례를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무사 케이타는 당시 유럽과 중동과 같은 먼 지역에도 말리 제국의 이름을 알렸으며, 지금까지도 중세 아프리카의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7. 히아와타 족장[편집]


전설적인 인디언 추장, 히아와타는 오논다가족 혹은 모호크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12세기 인물이라는 설이 있으나 1400~1600년경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히아와타는 '평화를 만드는 위대한 자'로 알려진 예언자 데가나위다와 함께 서로 앙숙이었던 5개 부족을 설득하여 하우데노사우니, 즉 이로쿼이 연맹을 창설했습니다.

그 후 이로쿼이족은 오늘날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권력을 확립하게 됩니다. 모계 사회인 이로쿼이족은 복합적인 통치 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이는 미국 헌법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또한, 진보된 조직 체계를 통해 더 큰 규모의 적대 세력도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유럽의 개척민들과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원주민 부족이었습니다.

위대한 추장 히아와타의 유산을 상징하는 히아와타 벨트는 권위를 대표하며 화폐로도 사용된 조개껍데기 구슬, 왐펌으로 만들어졌으며, 나무 문양 1개와 사각형 4개가 선으로 연결된 무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문양은 각각 서부와 동부를 연결하는 5개 부족, 세네카, 카유가, 오논다가, 오네이다, 모호크를 상징합니다. 선은 연맹의 유대를 나타내며 문양은 각 부족 고유의 정체성을 상징하고자 일직선이 아닌 분리된 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8. 몬테수마 황제[편집]


몬테수마 1세는 1440~1469년까지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서 제국을 통치한 황제입니다. 왕위가 세습되지 않았지만,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 삼촌이 선대 황제로 재위했고 몬테수마 1세는 장군으로서 마지막 두 황제를 섬기면서 아즈텍을 중앙 멕시코 전역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몬테수마 1세가 통치하던 때에 아즈텍 제국의 많은 주요 개혁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는 아즈텍 제국을 이루는 텍스코코, 틀라코판, 테노치티틀란 간의 전리품 분배를 개혁해 삼각 동맹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주변 영토를 성공적으로 정복한 결과, 그의 손자인 아우이트소틀이 통치하던 아즈텍 왕국이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회 계층 간의 구분을 법전으로 편찬했고 포츠테카라 불린 장거리 교역 상인과 첩자 계급의 부흥을 장려했습니다.

몬테수마 황제는 텍스코코의 시인이자, 건축가이자, 왕인 그의 사촌 네사우알코요틀과 함께 여러 건축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1449년 테노치티틀란이 범람한 후 거대한 둑을 건설해 재해 피해를 줄이고자 했으며, 이후 큰 송수로를 건설해 도시에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했습니다. 테노치티틀란은 이러한 대규모 혁신 사업을 통해 인구와 규모 면에서 동시대의 유럽 도시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융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몬테수마 1세는 겸손하고 현명한 통치자였습니다. 자신의 친구와 고문, 특히 그의 형제 틀라카엘렐을 소중히 여겼으며, 국교의 수장으로서 태양과 전쟁의 신, 위칠로포치틀리를 모시는 대신전을 확장했습니다. 그의 형제와 대사제와 함께 당시 아즈텍 사회에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진 인신 공양 의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몬테수마 1세는 훗날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제국을 빼앗긴 동명의 후대 황제, 몬테수마 2세와 혼동되기도 합니다. 몬테수마 2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제국의 확장에 기반을 마련한 몬테수마 1세가 훌륭한 전사이자, 건축가이자,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9. 아멜리아 에어하트[편집]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미국의 선구적인 여성 비행사입니다. 1922년, 당시 여성으로서 최초로 고도 14,000피트 비행에 성공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자신의 비행기를 팔기도 했으나, 1928년 보스턴에서 항공 사업과 문화를 육성하며 유명해진 그녀는 같은 해에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여성이 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대서양 횡단 시 비행기를 조종하기보다는 비행 일지를 작성하기만 해 큰 아쉬움을 느낀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당당하게 비행사로 인정받길 원했습니다. 1932년 마침내 그녀는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면서 한 번 더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또한, 많은 비행 속도 기록을 세웠으며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멕시코 시티까지 최초로 비행하는 등, 새로운 비행경로를 개척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자신의 명성을 통해 여성 조직, 특히 여성 파일럿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사를 쓰고 강연을 하며 그녀와 같은 뜻을 가진 엘리너 루스벨트와 친분을 쌓았고 나인티 나인스라는 여성 비행사 협회를 비롯하여 항공사를 설립하고 경영하는 데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1937년 그녀는 인류 최초로 적도를 따라 세계를 일주하는 대담한 도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최초 서쪽으로 비행했지만 실패한 그녀는 5월 20일 다시 노련한 항법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록히드 엘렉트라를 타고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7월 2일 뉴기니에서 태평양의 작은 섬인 하울랜드 섬까지, 가장 멀고 험난한 여정을 떠난 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후 미 해군의 집중적인 수색 작전과 여러 조사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유해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바다에 추락해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인데, 여러 가설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그녀가 약 400마일 떨어진 가드너 섬에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대담한 업적과 선구자 정신을 남기고 수수께끼처럼 사라진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여성주의자의 상징이자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비행사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0.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편집]


하일레 셀라시에 (재위 1930년-1974년)는 타파리 마콘넨이라는 이름으로 189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당시 황제였던 메넬리크 2세는 14세의 그를 작은 지방의 관리자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1916년에 라스(일종의 '공작')라는 칭호를 받으며, 새로 즉위한 자우디투 여황제의 계승자로 섭정을 했습니다. 라스 타파리는 '삼위일체의 힘'이라는 뜻의 하일레 셀라시에라는 이름으로 1930년에 에디오피아의 225대이자 최후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젊은 에티오피아인들은 개혁을 주창하는 이 새로운 통치자에게 많은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는 이미 섭정 시절에 에티오피아를 국제 연맹에 편입시켰으며, 봉건 국가의 현대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35년에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침공으로 그의 야망은 좌절되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몇 달간 저항 세력을 이끌었으나 비상 협의회에서 그가 망명하여 국제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이 황제는 영국과 에티오피아의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를 1941년에 해방시킬 때까지 영국으로 망명해 있었습니다. 그가 에티오피아에 귀환하면서 현대화가 재개되었습니다. 그는 교육, 관광업, 특히 연극의 양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해외를 여행하며 세계 언론과 외교계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범아프리카 주의의 신봉자로써 그는 동료 지도자들을 설득해 1963년에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발족된 아프리카 통일기구에 가입시켰습니다.

하지만, 외국에게 점령 당했던 트라우마로 그의 독재 성향이 깨어나면서 결국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1955년에 제정한 헌법도 그의 절대적인 권위를 제한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의 문제에서 점점 더 멀어지면서 그는 결국 1974년에 데르그라는 사회주의 군부에 의해 축출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궁에 갇힌 채로 이듬해에 억류자의 손에 암살당했습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거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다른 세계의 지도자들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는 존엄한 아프리카 통치자로서의 이미지는 그를 메시아로 추종하는 라스타파리라는 새로운 종교를 낳았습니다. 그가 창설을 도운 아프리카 통일기구는 현재 아프리카 대륙의 주요 정치 포럼인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외교관이자 현대의 에티오피아를 확립한 '유다의 사자'는 20세기의 주요 인물로 꼽힙니다.


11. 한니발 바르카[편집]


한니발 바르카 (기원전 247년에서 183년~181년 사이)는 포에니 전쟁 기간동안 기원 전 2세기와 3세기 사이에 살았던 카르타고의 장군이었습니다. 한니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는 군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카르타고의 최대의 적인 로마에 대해 영원한 증오를 맹세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현재의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아인 카르타고를 파괴한 이후 한니발 역사의 대부분은 로마인들에 의해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보병, 기병, 전쟁 코끼리 부대를 단결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한니발을 뛰어난 전략가이자 저술가로 묘사했습니다. 한니발이 로마인에게 공포를 심어 주었기 때문에,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로마인은 무서움에 떨며 '한니발이 문 앞에 왔다'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했습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장군의 아들이었으며, 하밀카르 장군은 첫번째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 당했습니다. 한니발은 당시 카르타고의 혼합된 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던 자신의 매부인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암살되면서 군의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기원 전 219년에 한니발은 사군토를 손에 넣어 지중해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로마인들의 눈에 사군토에 대한 공격은 전쟁으로 비쳐줬고, 두 번째 포에니 전쟁의 불을 지폈습니다.

한니발은 두 번째 포에니 전쟁에서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네 호수 전투, 칸나에 전투 등에서 승리를 이어 나갔습니다. 한니발의 전술은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의 전력을 직접적으로 공격해 왔던 로마군 대열의 양쪽을 공격하는 양익포위작전을 펼치면서 빛을 발했습니다.

한니발의 손에 여러 번의 패배를 거듭하게 되면서 로마는 군수품과 병사가 더 많았던 이점을 활용해 소모전법만 사용하도록 군사 전략을 변경했습니다. 한니발은 최후의 로마와의 전투를 위해 군대와 여러 코끼리를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를 넘으며 전투를 거듭하며 진격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지중해를 장악하려는 그의 계획은 결실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로마의 군은 결국 한니발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트럼펫을 사용하여 한니발의 코끼리들이 아군의 병력을 짓밟도록 만들었습니다. 한니발의 군은 흩어졌고, 로마인들은 한니발의 병사를 하나씩 추적해 나갔습니다. 한니발의 군이 패배하자 로마는 카르타고와 그 군에 대해 무거운 제재를 내렸고, 카르타고 경제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한 한니발은 정치에 입문해 최고 행정책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군 재판관을 위한 법령을 제정하여, 재임 기간을 평생에서 2년으로 줄였습니다. 계속해서 로마의 추격을 받던 그는 결국 로마에 의해 잡히기 보다는 망명해 자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망명 중에 사망했지만 한니발은 여전히 가장 훌륭한 군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2. 샐리 라이드[편집]


샐리 라이드는 1951년에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운동에 재능이 있었던 그녀는 스탠포드에 다니기로 결정하기 전에 프로 테니스 선수가 되는 것을 고려했습니다. 스탠포드에서 그녀는 여러 학위를 받았으며, 1978년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그녀는 미국항공우주국 NASA의 우주 비행사 훈련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듬해 그녀는 우주 왕복선 임무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두 번의 콜롬비아호의 임무에 캡슐 커뮤니케이터로써 지상에서 근무했으며, 1983년에 챌린저호의 운항 승무원에 합류했습니다. 우주의 진출한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와 스베틀라나 사비츠카야에 뒤이어 샐리 라이드는 미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우주에 갔습니다.

라이드는 이듬해 챌린저호애 다시 탑승했으나, 그녀의 세 번째 임무 일정은 챌린저호가 1986년에 폭발하면서 취소되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녀에게 이 사고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2003년에 그녀는 콜럼비아 재난 위원회에 합류하여 우주왕복선과 위원회에서 모두 복무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1987년에 NASA를 떠났으며, 자신의 삶을 특히 여학생들을 위한 과학 교육 증진에 바쳤습니다. 라이드는 아동도서를 집필했고,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캘리포니아우주기관을 지휘했고, 샐리 라이드 과학이라 불리는 교육 기업을 창립했습니다. 2012년에 그녀의 사망 후 부고를 통해 그녀가 27년 간 여성 파트너와 지냈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최초로 알려진 성소수자 우주 비행사가 되었습니다. 과학과 교육의 뛰어난 공로를 인정 받아 그녀는 사후에 미국의 민간인에게 가장 큰 명예인 대통령 훈장을 받았습니다.


13. 해리엇 터브먼[편집]


해리엇 터브먼은 아라민타 로스라는 이름으로 1820년에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메릴랜드 동부해안 지역에서 자란 그녀는 어릴 때 부터 육체적인 어려움과 백인 주인의 폭력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 중 최악은 치명적인 머리 부상으로 평생 발작과 두통을 견뎌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1844년에 존 터브먼과 결혼했으며 이 무렵 자신의 이름을 어머니를 기리며 해리엇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자유로운 흑인이었으나 그녀는 법적으로 노예이었습니다.

그녀는 1849년에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라고 알려진 안전한 집으로 구성된 비밀 네트워크의 도움으로 필라데피아로 탈출했습니다. 1850년 도망노예환송법 통과 이후 북쪽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고, 결국 터브먼은 캐나다로 갔습니다. 이후 10년간 그녀의 주도로 최소한 70명에서 최대 300명의 노예가 국경선 북쪽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녀는 잡히거나 승객을 잃은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터브먼은 노예해방론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윌리엄 개리슨과 친구가 되었으며, 이들은 그녀에게 노예 해방을 이끈 '모세'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존 브라운의 하퍼즈 페리 습격까지 도왔으며 병세만 아니었어도 자신도 이 습격에 가담하려고 했었습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북군의 간호사이자, 정찰병이자 스파이로 활동했습니다. 1863년 6월 그녀는 미국 여성 최초로 무장 원정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습격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컴바히 강을 따라 700명의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노예해방선언과 북군의 승리로 터브먼의 노예제 종식의 꿈은 현실이 되었으나 그녀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명성과 존경 받는 지위가 재정적인 안정을 가져다 준 적은 절대 없었지만, 그녀는 자유를 위해 돈을 모아서 작은 돈이라도 계속 기부했습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적극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1913년에 자신이 뉴욕주 북부에 세운 양로원에서 사망했습니다.


14. 황후 측천무후[편집]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는 기원 후 624년에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조는 양질의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당 왕조 여성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당 태종의 세탁물을 관리하는 첩으로 입궁했으며 결국 태종의 아들과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의 새 남편을 통해서 이후에는 두 아들을 통해 섭정을 하면서 그녀는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690년에 그녀는 가식을 버리고 스스로 왕좌에 올라 측천무후가 되었습니다.

당대 및 이후의 중국 역사가들은 여성 황제의 즉위를 유교 질서의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녀가 권력을 잡은 시기를 폄하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그녀가 궁에서 신분을 높이기 위해 사용했던 교활하고 잔인했던 방책을 강조했습니다. 그녀의 후계자인 다른 아들은 그녀의 왕조를 종식시키고 당 왕조를 복구했습니다. 그녀의 업적이 기술되어야 하는 묘비는 텅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적대적인 역사가들조차도 측천무후의 통치자로서의 성공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과거 시험을 성적 중심으로 개편했으며, 농업 세제를 개혁했고, 실크로드를 다시 열었습니다. 그녀가 불교를 일찍 지지하면서 중국의 종교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녀는 비밀 경찰과 보호 받는 공공 정보원을 결합해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측천무후는 중국의 황금 시대를 가져온 황제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15. 손자[편집]


기원전 770년에서 476년에 이르는 춘추시대는 중국 역사 상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동주 왕조는 속방이 생존과 헤게모니를 위해 싸우면서 장악력이 미약했습니다. 하지만, 혼돈 속에서 과학과 지성은 꽃 피웠습니다. 농업의 발전으로 인구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중국은 석기 시대에 진입하며 석궁을 발명했습니다. 유가, 도가, 법치주의, 묵가 등 제자백가가 권위 있는 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훌륭한 사상가들 중 손자가 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그는 오나라 혹은 제나라에서 기원전 544년에 손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서양인에게 익숙한 손자라는 이름에는 대가를 의미하는 '자'라는 존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는 군 전략을 짜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을 겁니다. 그가 오나라 출신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결국은 합려왕을 위해 일했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손자는 506년에 오나라가 초나라에게 큰 패배를 안겼을 때 오나라의 주요 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실제 이력보다 후세에 더 중요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전략서인 손자병법입니다. 이 당시에는 손빈이라는 후손이 동일한 제목의 지침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손자의 이론은 춘추시대 이후의 전국 시대에는 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손자의 원칙을 따랐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한 진 시황제이었습니다. 그는 국가의 세력 확장 능력을 제한한 귀족의 세세한 규칙을 따르기 보다는 완전한 승리를 추구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손자의 영향력은 커지기만 했습니다. 한나라를 세운 이들은 손자의 가르침에 따라 싸웠습니다. 손견 등, 삼국 시대의 군벌은 손자의 책을 연구했습니다. 손자병법은 중세 일본에서 인기를 얻었고 통일을 이룬 3명의 위인도 손자병법을 애용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이를 자신만의 게릴라 전법으로 발전시켰으며, 그의 작은 빨간 책의 일부 내용은 압도적인 힘을 이용한 공격, 장기 포위전 피하기 등, 손자의 병법과 사실상 구분이 안됩니다.

손자병법은 서양에서도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손자병법은 나폴레옹의 전술 혁신에 지침이 되었을 수 있으며, 노먼 슈워츠코프부터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까지 현대의 미국 장군들이 직접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전세계의 군사 학교의 필독서일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벗어나 다양한 리더십과 갈등 상황에 적용되었습니다. 손자의 인생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으며, 그가 실제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딴 지혜는 2500년 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