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라이드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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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ly Kristen Ride
1951년 5월 26일 ~ 2012년 7월 23일
세계 3번째이자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1. 커리어
2. NASA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3. 개인사
4. 기타


1. 커리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출신으로, 학위를 물리학 학사부터 박사까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만 땄다(...)[1] 대자보로 붙은 우주 프로그램 지원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합격했다고. 이 시기는 NASA아폴로 계획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시대였던지라 인원이 꽤 많이 필요했다.

2. NASA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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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계획이 폐지되며 NASA의 우주비행사 선발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 후 우주왕복선의 개발과 운용을 위해 35명(...)이 선발된 1978년 NASA 우주인단 8기 그룹에서 여성은 6명이었다. 사진의 좌측부터 섀넌 루시드[2], 마거렛 레아 세든, 캐스린 설리번[3], 주디스 레스닉[4], 애나 피셔, 샐리 라이드. 이들 중 NASA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라는 영예는 라이드에게 돌아가게 된다. 초기에 인터뷰를 하면서 여성 비하적인 어조의 질문공세를 받아내느라 스트레스가 많았다. 심지어는 동료들도 여자를 대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던 꼴마초들이 많았는데, 동기 우주비행사 마이크 멀레인[5]은 베스트셀러 회고록 <Riding Rockets: The Outrageous Tales of a Space Shuttle Astronaut[6]>에서 자신이 샐리 라이드가 듣는 자리에서 남자들끼리 얘기하듯이 젖통(...)이란 말을 썼다가 10년 간 서로간에 1마디도 나누지 못했다고 토로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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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STS-7 챌린저 미션의 승무원들. 가운데의 로버트 크리펜존 영과 함께 최초의 우주왕복선 미션인 STS-1을 수행한 파일럿이었지만 나머지는 전부 첫 비행이었다. 또한 STS-7은 우주왕복선의 최초의 5인 미션이기도 했다.[8] 통신 위성과 관계된 임무에서 로봇 팔을 정상적으로 조작하고 위성을 성공적으로 회수했다. NASA공돌이들은 1주일간 넉넉하게 쓰라고 탐폰 100개를 싸줬다 카더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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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챌린저호 STS-41-G 승무원들. 마찬가지로 크리펜과 함께 참여한 이 미션은 캐스린 설리번도 함께하며 최초로 여성이 2명 참여한 미션으로 기록되었고, 설리번은 이 미션에서 NASA 여성 우주비행사로서는 최초로 EVA를 실시했다.
하지만 1986년 초의 STS-51-L 챌린저호 폭발사고로 그 해 7월의 STS-61-M 미션 승무원으로 예정되었던 샐리 라이드는 대신 로저스 위원회의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NASA 본부에서 활약하게 된다. 이 당시 멤버들이 굉장히 쟁쟁한 인물들인데,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척 예거, 닐 암스트롱이 있었다. 이 당시 발사 전날에 발사 취소해야 한다고 우겨댔던 부스터 담당 엔지니어 로저 보이숄리(Roger Boisjoly)의 제보로 초기에 원인 파악을 했지만 NASA 내부의 정치적인 알력이나 내부고발로 인해 자신과 NASA의 동료들이 입을 엄청난 대미지를 생각하여 친분이 있던 도널드 쿠티나 공군소장[10]에게만 진실을 털어놓고 쿠티나 장군이 머리를 써가며 파인만을 진실로 다가가게끔 유도한다. 파인만이 챌린저호 사고의 주 원인이었던 O링 실험을 즉석에서 해내며 원인 규명을 마무리한 것이 유명하지만, NASA의 실무자들은 심증부터 이것이 원인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누구라도 실토하면 그 사람은 사실상 숙청될 것이라 걱정했다고. 이 때 라이드가 원인 규명에 있어 큰 공헌을 했음은 사후에 밝혀진다.
그렇게 샐리 라이드는 1987년 NASA를 나와 스탠포드의 안보 연구소로 옮긴다. 이후 1989년 모교를 떠나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UCSD)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주 프로그램 홍보에 나섰다. NASA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와 UCSD의 주도로 이뤄진 ISS EarthKAM에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11]했고 2010년대의 달 중력장 연구 프로젝트인 GRAIL에 있어서도 초등학생들이 탐사선의 이름을 짓고 중학생들이 만든 카메라를 탑재하는등 대중 홍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과학교육 재단 샐리 라이드 사이언스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의 과학에 대한 친근감을 키우고 과학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3년 STS-107 컬럼비아호 폭발사건이 터지자 다시 조사위원회에 참가했는데, 챌린저와 컬럼비아 두 사고의 조사위원회에 모두 참여한 인물은 샐리 라이드가 유일하다. 2008년에는 버락 후세인 오바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성명을 냈고, 오바마 행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부문에 차기 유인 우주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대중 강연도 많이 다니고 연구와 홍보를 활발히 하던 샐리 라이드였지만, 말년에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19개월간 투병을 이어갔지만 췌장암 자체가 원체 꿈도 희망도 없는 암이라... 2012년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12]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있었지만 화장하여 고향의 아버지 곁에 묻혔다.
NASA에서는 2012년 12월 임무를 마친 GRAIL 달 탐사선 Epp과 Flow를 달 표면의 골드슈미트 크레이터 주변 산에 충돌시킨 NASA는 충돌 지점을 샐리 라이드라 명명한다고 발표했다. 미합중국 해군에서는 닐 암스트롱급 해양조사선 시리즈의 2번함에 샐리 라이드의 이름을 붙였다.

3. 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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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천문학자 출신의 동료 우주비행사인 스티븐 홀리(Steven Alan Hawley)와 결혼했지만 1987년 이혼하였다.[13] 그렇게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다들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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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라이드는 사실 레즈비언이었으며, 홀리와 별거에 들어간 1985년 이후 어릴 적 만난 여자친구와 평생을 해로했음이 사후 알려졌다.[14]업계에서는 이에 쇼크 먹은 이들이 꽤 되었고, 우주덕들과 동성애자, 성 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핫이슈가 되었다. 사실, 21세기에도 미국인들은 기독교적인 보수적 사고관을 견지한 이들이 꽤 많다.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샐리 라이드라는 이름은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이자 청소년 과학교육의 멘토로서 선구자와 같은 인물이었는데, 그런 인물이 동성애자였다고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황[15]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사실을 인정한 샐리의 여동생 캐런 라이드는 목사였으니... 나의 샐리 쨔응은 이렇지 않아! 물론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이를 계기로 샐리 라이드를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상 최초의 LGBT 우주 비행사라는 타이틀이 그녀에게 기록되었다. 정작 본인은 이런 것을 평생 숨겨야만 했건만...[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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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유명한 우주 비행사 치고는 사생활이 매우 적게 알려진 편이었기에 동성의 배우자 탬 오쇼너시(Tam O'Shaughnessy) 역시 라이드와 같은 학교 심리학 교수이자 동업자 정도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라이드의 사후에 이 둘이 어릴 적 소꿉친구로 만나[17] 1985년 이후로 평생을 함께 해왔지만 성적 지향을 숨기고 살아야 했음이 밝혀지고, 그러면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업적을 남긴 점에서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은 라이드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추서하여 탬이 미망인으로서 대신 받았다.[18] 이 때문에 오바마는 개독들에게 또 욕 먹었다(...)
한편 동성결혼을 결혼으로 보지 않는 연방결혼보호법의 존재로 탬 오쇼너시는 20년 이상 사실혼 관계에 있었음에도 라이드의 유족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에 동성결혼에 대한 찬반논쟁이 다시금 격해지기도 했다. 라이드의 타계로부터 3년이 지난 2015년 여름에야 미 전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지방 정부의 반발이 심했는데, 그 중 캔자스 주지사 샘 브라운백(Sam Brownback)은 대변인을 통해 연방정부에서 뭐라 한다고 주 정부가 꼭 따라야만 하는건 아니라는 발언으로 합법화를 사실상 부정했다. 문제는 이 입장표명을 한 대변인이 라이드의 전 남편인 스티븐 홀리가 재혼한 아내 아일린 홀리(Eileen M. Hawley)였다는 거(...) 대변인이란 일 자체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 노릇을 하는 자리니까 대변인 본인의 생각과는 전혀 무관한 발언이었을 수도 있으나 어찌됐든 고인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에 동성애 단체에서는 이를 구실로 브라운백 주지사를 비판했다.

4. 기타


2015년 5월 26일 구글 두들은 샐리 라이드 탄생 64주년을 기념했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유니버시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 STS-7 미션 당시 우주선에서 틀어주는 신청곡으로 스탠포드 마칭 밴드의 "Stanford Hymn"을 신청했다. 부심 돋네 [2] 1990년대에는 미르-우주왕복선 합작 미션에서 활동했다. 미르 엑스퍼디션의 역대 유이한 여성(다른 한 명은 러시아의 옐레나 콘다코바)으로, 우주 명예 훈장을 받았다.[3] NASA 여성 우주비행사 중 최초로 EVA를 수행했다. 2014년부터 연방해양대기청장으로 재직 중.[4] STS-51-L 미션의 희생자. [5] 12년 간 가톨릭 미션스쿨에서 구시대적인 교육을 받고 미국육군사관학교를 나왔던 군인 출신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남중-남고-공대-군대(...)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6] 한국에는 '우주비행, 골드핀을 향한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7] 다만 마이크 멀레인의 이 회고록은 라이드의 사후에 샐리 라이드를 아웃팅한게 아니냐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여자(그것도 겁나 이쁜 여신들!), 유대인(자기가 친하게 지낸 주디스 레스닉), 동양인, 박사 후 연구원 하던 민간인(스티브 홀리), 흑인, 가톨릭(멀레인 본인), 원리주의 예수쟁이, 무신론자 등 너무나도 다양한 배경과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쏟아져 들어와서 외계인 정모라도 연 것 같았다는 얘기인데, 그 과정에서 "와 씨바 얘네들 중 동성애자도 있을듯 ㄷㄷ해" 식으로 넘어갔던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멀레인이 라이드의 동성애 지향성을 알았더라면 흠좀무, 몰랐더라도 더욱 흠좀무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멀레인은 훗날 철 들고 나서야 그 시절에 대해 후회하며 라이드와 동기 여성들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꼈다고... [8] 우주왕복선은 최대 탑승 인원 수가 7인이었지만 그것은 그저 이론상 '최대'일 뿐, 우주정거장 장기체류 프로그램의 교대인원 셔틀 역할도 해야 하고 1명 태울 때마다 발생하는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았던지라 5~6인 선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다.[9] 웃을 일은 아닌게 이 시절 NASA는 우주에서 월경이 일어날 경우 몸에 일어날 변화에 대해 초보적인 수준의 연구에 그치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소행성 탐사 화성 탐사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지만, 이는 모두 라이드를 비롯한 초창기 여성 우주비행사들이 온갖 수치심을 감내한 덕분이다.[10] 이후 NORAD 겸 우주사령관까지 지내며 대장으로 예편.[11] 학생들이 참여하는 부분은 우주선에 탑재하는 카메라 제작.[12] 1달 후 닐 암스트롱이 세상을 떠났다. NASA는 이로 인해 2012년 여름 내내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13] 이 이혼은 라이드가 NASA를 나온 원인이기도 하다. 홀리는 라이드와 달리 매우 오랫동안 활동하며 1999년 STS-93 미션(NASA 최초의 여성 우주왕복선 조종사 아일린 콜린스가 처음 사령관을 맡은 미션이다)까지 5회의 우주 미션에서 허블과 찬드라를 설치하고 여러 나라의 관측위성을 테스트하는 등 천문학자로서 크게 활약했다.[14] 다만 인맥 풀이 좁은 우주공학 업계의 특성상 알음알음 카더라는 있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후배들이 30년에 걸쳐 배출되었음에도 세간에 유출되지 않은 것을 보면 동기 동년배들조차도 정말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는 2008년까지 매우 오랫동안 NASA에서 근무한 홀리의 존재 덕에 라이드의 성적 지향이 더욱 철저히 숨겨질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NASA에서 손꼽히는 베테랑 우주비행사가 레즈비언이랑 결혼했다가 소박맞았다는 말은 카더라로라도 절대 못 할 말이니...[15] 호모포비아가 아니더라도 이런 사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유명인이 동성애자라고 하면 "이 사람이 게이였어? 레알?" 하는 것이 현실의 대다수 이성애자들의 입장에서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16] 정확히 말하자면 알려진 최초의 LGBT 우주 비행사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전에 LGBT 우주 비행사가 있었을런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 시기 인물들 사이에 설령 동성애자가 있었다 해도 이 세대는 나이를 먹고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판이라 고인드립 방지(...) 차원에서라도 묻힐 가능성이 높으니 라이드의 사상 최초(...)라는 타이틀이 변할 가능성은 낮다.[17] 정확히 말하면 테니스 강습에서 만나서 친해졌다. 둘 다 어릴 때는 테니스 선수가 되려고 했다나.[18] 이 시상식은 또다른 의미로도 유명한데, 라이드와 함께 자유 훈장을 받은 어니 뱅크스를 기리는 과정에서 희대의 시카고 컵스 디스가 터져나왔다. 그 영상(...)에서 깨알같이 웃는 아줌마가 이 분.
오바마: 512호 홈런을 쳤던 어니컵스가 언젠가 반드시 정상에 오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청중: 웃음.
오바마: (참으로 안타까운 표정으로) 진심으로요.
청중: 웃음.
오바마: 화이트삭스 팬인 저도 이 점을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