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티보디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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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년부터 1688년까지 통치한 아유타야의 27대 왕. 나라이 대왕이라고도 한다. 탁월한 외교 능력과 무역 수완으로 후대에도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라이 대왕이 통치하던 이 시기, 아유타야의 국제화가 정점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나라이 대왕은 치앙마이를 아유타야의 영토로 존속시키고 또한 버마의 일부를 점령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넓힌 영토를 기반으로 인근 국가인 이란, 네덜란드, 영국, 중국, 인도 등과 교류를 하며 국제 사회 내 입지를 확장하며 여러 국가와 관계를 형성해나갔다.

이는 여러 나라와 무역하며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동시에 당시 식민지 확장 정책을 펼치던 서구 열강을 견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시기 아유타야는 도자기, 쌀, 향신료 등을 수출하고 해외의 우수한 과학 및 의료 기술과 교육 시스템을 들여와 발전해나갔다.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아유타야 내에서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수도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포르투갈 및 중국인들 등은 아유타야 내에서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다.

나라이 대왕은 콘스탄틴 팔콘이라는 그리스인을 고문으로 삼아 외교 정책과 관련한 많은 조언을 구했다. 콘스탄틴 팔콘의 도움으로 프랑스와 특사를 수차례 교환하는 등 당시 루이 14세와 외교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프랑스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나라이 대왕은 프랑스 군의 아유타야 주둔을 허가하고 일부 항구를 프랑스의 조언을 받아 서구식으로 재건설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는 불교도였던 나라이 대왕을 가톨릭교도로 개종시켜 아유타야를 가톨릭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고 그 때문에 프랑스 군대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외방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도 다수 아유타야에 파견했다.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불교 교리에 입각하여 종교적으로 관대했던 아유타야는 가톨릭 선교사가 아유타야 내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는 것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실제로 일부 아유타야 백성들은 가톨릭교도로 개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라이 대왕은 프랑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교도로 남았다.

이렇듯, 콘스탄틴 팔콘을 비롯한 여러 외국인들이 아유타야, 특히 궁중 내에서 전례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자 그에 불만을 품는 아유타야 각료들도 많아지게 되었는데 펫라차는 나라이 대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궁중 각료 중 하나였다.

펫라차는 마음이 맞는 주변 인물들과 함께 암암리에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고 1688년, 나라이 대왕이 회복이 불가능한 중병에 걸리게 되며 콘스탄틴 팔콘이 나라이 대왕의 후계자를 허수아비로 세워 조종하려 한다는 소문이 궁중 내에 돌기 시작하자 펫라차는 이 소문을 계기로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나라이 대왕은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던 중 사망하게 되고 팔콘 또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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