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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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일본군의 한국 상륙
2.2. 제물포 해전
2.3. 뤼순항 해전
2.4. 압록강 전투
2.5. 진저우-남산 전투
2.6. 히타치마루 사건
2.7. 모티엔 전투
2.8. 텔리수 전투
2.9. 대석교 전투
2.10. 시무청 전투
2.12. 203고지 전투
2.13. 황해 해전
2.14. 울산 해전
2.15. 코르사코프 해전
2.16. 요양 회전
2.17. 사하 전투
2.18. 산데푸 전투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러일전쟁의 과정에 관한 문서.

2. 상세[편집]



2.1. 일본군의 한국 상륙[편집]


1904년 2월 6일 오전 4시 일본 해군은 부산항에 정박한 러시아 상선을 나포하고 이후 부산에 상륙, 오후1시 30분에는 부산의 대한제국 전신국을 점령한다. 이어 울산 앞바다에서도 러시아 상선 1척을 나포하고 마산에도 상륙해 점령한다. 이어 일본 해군은 인천과 원산으로 이동한다.


2.2. 제물포 해전[편집]


1904년 2월 8일부터 9일 사이에 대한제국의 제물포와 주변 해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천 해전', 또는 '인천 전투'라고도 한다.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첫 전투였으며,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을 가한 것이 특징이었다. 청일전쟁, 태평양 전쟁진주만 공습도 그러했다.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던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제물포, 뤼순항에 이르기까지 제1태평양 함대를 주둔시킴으로써 군사적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일본 연합함대의 제독인 우류 소토키치는 뤼순항을 공격하려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명령을 받아 6척의 순양함과 2,500명의 병력으로 제물포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기로 했다. 특히 일본의 방호순양함 지요다는 10개월 동안 제물포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주둔한 러시아의 방호순양함 바랴크과 포함 코리에츠[1]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투 직전인 1904년 2월 7일, 일본 연합함대의 대규모 무력 전단을 본 러시아의 포함 코리에츠는 뤼순항에 지원 요청을 보냈다. 2월 8일 이른 아침 코리에츠는 외해로 나가려 했으나 일본 해군이 이를 저지한다. 이때 코리에츠와 순양함 지요다가 접전하여 서로 포와 어뢰를 쏴 화재가 발생했다.[2] 코리에츠는 항구에서 퇴각했고, 지요다는 우류 제독의 소대와 접선했으며, 영국의 HMS 탤봇, 프랑스의 파스칼, 이탈리아의 엘바, 미국의 USS 빅스버그 등 정박한 중립 국가 함선에서 일본 해군에게 항의했으나 오히려 위협을 받고 피신했다.

우류 제독은 경순양함 지요다, 다카치호, 아사마, 나니와, 니이타카, 아카시와 어뢰정 4척을 이끌고 3,000명의 군사들을 제물포에 상륙시켰으며 일본 군대는 제물포로부터 이동하여 서울을, 그리고 대한제국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했다. 그리고 2월 9일 오후까지 14:2로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전투를 벌여 일본군은 바랴크에 올라타 사관생도인 알렉세이 니로드를 포함한 승조원들을 학살했으며 남은 함대는 대포와 어뢰정을 이용, 두 전함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바랴크과 코리에츠의 승조원들은 나포당할 것을 우려해 두 전함을 자침시켰다.[3]

이어 일본군은 제물포 항에 55,0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켰고, 서울과 경운궁을 점령하고# 용산에 주둔하였다. 대한제국 각지의 요충항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반도를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3일 후인 2월 12일에 러시아 공사가 철수함에 따라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국교가 단절되었고, 침몰한 러시아의 함정은 뒤에 일본군에게 인양되어 일본군 함정으로 개조되었다.

전투 소식을 들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정부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진 않을것이라 전망했지만 이틀 뒤인 2월 10일에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고,[4] 러시아는 2월 16일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2.3. 뤼순항 해전[편집]


2월 8일 2개의 어뢰정 전대가 뤼순항에 도착, 2월 9일 새벽에 공격하여 러시아 해군은 3척의 전함이 파손된다. 일본 해군의 재차 공격에 러시아 해군은 해안포대와 파손되어 정박중인 상태의 함선에서도 포를 쏴 일본 해군의 재차 공격을 방어한다. 이후 러시아 해군은 기뢰를 부설해 방어한다.

2월 14일 일본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시멘트를 채운 선박 7척을 침몰시켜 뤼순항을 봉쇄하려 하였으나, 예상보다 배가 깊이 가라앉아 실패한다. 2월 24일 아침에는 러시아 전함 레트비잔이 탈출하려 하나 실패한다.

3월 8일 러시아 제독 러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가 뤼순항에 부임해 전함 아스콜드를 수리하고 3월 10일 일본군 함대를 공격했으나 봉쇄를 뚫진 못했다. 3월 10일 일본 구축함 4척이 접근해 유인하였고 러시아 구축함 6척이 추격하다가 매복 공격을 받아 침몰한다.

3월 22일 일본군 후지급 전함 야시마와 네임쉽 후지가 마카로프 제독의 함대에게 공격을 당해 후지 함은 반파되어 퇴각하고 도고는 3월 27일 다시 오래된 선박 4척에 콘크리트를 채워 봉쇄를 시도하나 침몰 지점이 멀어 실패했다.

4월 13일 러시아해군은 전함 페트로파블로브스크, 폴타바, 세바스토폴, 퍼레스비트, 포베다와 순양함 아스콜드, 노비크, 다이나가 다롄 북쪽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기뢰에 걸려 기함인 페트로파블로브스크가 침몰하고 마카로프 제독과 635명이 사망하였다. 포베다함도 기뢰에 피해를 입어 항구로 견인된다. 5월 3일 도고는 또 다시 노후한 전함 8척을 자침시켜 봉쇄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반면 상륙한 일본군 제2사단이 남산 전투에서 승리한다.

5월 15일 일본군의 시키시마급 전함 하츠세와 후지급 전함 야시마가 러시아군의 기뢰에 걸려 야시마함이 폭침하여 450명이 사망하고 하츠세함은 견인된다. 이후 일본군은 다시 3개월 동안 뤼순항을 봉쇄했으며 전투는 뤼순 공방전과 황해 해전으로 이어진다.

2.4. 압록강 전투[편집]


1904년 4월 30일부터 5월 1일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압록강 하중류 일대, 평안도 의주부 주변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투이다. 구로키 다메모토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육군 제1군 42,000명이 첫 번째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는 도중에 이를 저지하고자 기다리고 있었던 러시아 육군 동방 파견대 24,000명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이며 '압록강 도하 작전'이라고도 부른다.

자신들의 무기가 일본군 병사보다 우수한 것으로 과신하고, 병력을 분산 배치한 러시아군의 미하일 자술리치 장군에 대해 일본 육군은 충분한 화포를 갖고 공격하여 러시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 러시아 육군이 전군을 이용한 결전을 피하고 조속히 퇴각했기 때문에 일본 육군은 도강을 별다른 손해 없이 완료할 수 있었다.


2.5. 진저우-남산 전투[편집]


1904년 5월 25일~5월 26일에 랴오둥 반도의 뤼순 북방, 진저우 성 남쪽 근교의 남산으로 불리는 곳에서 양군이 격돌했는데, 러시아군이 기관총 등을 장비하여 남산을 어느 정도 요새화시켰기 때문에 중반 참호전, 공성전이 되었다. 일본 육군의 제2군은 적보다 수배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 병력의 10%를 넘는 병력을 잃었다.

압록강 전투 이후 양군은 요동 반도에서 전역을 진행했다. 러시아 육군은 요동 반도의 중심이었던 남산에 야포 114문 및 기관총을 장착하고, 참호와 철조망 지뢰를 갖춘 근대적 진지를 구축했다. 일본 육군이 이런 근대적인 진지에 공격을 펼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청국인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해 요새의 구조를 이미 파악했다.

제4사단의 공격이 진저우 성에 대해 시작됐지만 실패로 끝났다. 제1사단에서 증원 2개 대대를 더한 3차 공격으로 진저우 공략이 완료됐다. 그 뒤 남산에 대해서 공격이 가해졌고, 진저우 만에서 해군의 함포 사격이 공격을 지원했지만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끈질긴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포탄이 다한 러시아군은 철수를 개시하여 제2군은 남산을 점령하고 일단 승리를 거뒀다.

양군은 그 후 탄약 보급을 받고 만주로 향했다. 철수한 러시아군은 약간의 저항을 하면서도 뤼순으로 철수하고 배수의 진으로 일본군 제3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또한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도 제2군에 소속되었던 장남 노기 카츠노리를 이 싸움에서 잃고 말았다.


2.6. 히타치마루 사건[편집]


1904년 6월 15일,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대한해협을 건너 서쪽으로 가던 육군 징용 운송선박 3척이 러시아 제국 해군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이하, 블라디보스톡 함대) 소속의 3척의 장갑순양함 로시야, 류리크와 그루모보이에 의해 잇따라 공격을 당하면서 항복 거부 등의 이유로 격침되어 파괴된 사건이다.

특히 육군 징용 운송선박 히타치마루(常陸丸)의 격침은 일본 내 여론을 들끓게 했다. 연합함대 특히 동해의 해상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이끌었던 제2함대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서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제2함대는 사건 발발 두 달 후인 8월 14일에 일어난 울산 해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사실상 괴멸직전까지 몰고 갔다.

6월 15일 8시경 방호순양함 쓰시마로부터 오키노 섬 근해에서 블라디 함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2함대는 어뢰정 부대를 급파하는 동시에 왕래 선박에게 다케시키 등지로의 대피를 명령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일본 측의 움직임에 상관없이 쓰시마 해협에 도달하여 먼저 수송선 이즈미마루를 발견했다. 이즈미마루는 6월 13일에 요동 반도의 얀다이오를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이즈미마루를 정선시켜 승선자에게 퇴거를 권고하고 퇴거를 확인한 후 포격을 가해 격침시켰다. 이즈미마루에 대해 일본은 정보를 거의 얻지 못했는데, 4명이 사망하고 해산시켰던 승선자의 대부분은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에 수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사에서 육군 병사 2명, 해군 병사 1명의 편승자 3명을 포함한 112명 중 전사자 7명, 쿠라야 이헤 해군 상등병을 포함한 83명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 22명이 생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전당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 마주친 것은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로 보인다. 함대는 처음에는 공포탄을 발사하다가 곧 실탄 발사로 전환했으며 히타치마루는 전속력으로 후방 도주를 하다가 포탄 1발이 히타치마루의 기관부에 명중된 것을 시작으로 근접 사격을 통해 약 100발의 사격을 받아 전사자가 속출했고, 기관은 파열되었으며, 곧이어 제3갑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히타치마루 선내는 피바다가 되었고, 남아있던 제1연대 병사들은 소총으로 반격을 했지만 압도적인 공격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고 치열한 전투끝에 군기를 받들고 있었던 후지사키 히토 육군 이등병이 살아남아 과정을 자세히 보고하도록 명령했지만 직후에 그도 포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후 할복했다. 군기는 오쿠보 다다시(大久保正) 소위가 깃대를 부러뜨리고 불을 질러 소각했다.

연대 깃발과 중요 서류 소각을 지켜보며 남아있던 장교들도 할복 및 권총 자살과 바다에 투신하여 자살하며 히타치마루에서 순직했다. 히타치마루는 세번째 일제사격을 받고 15시쯤에 침몰했다. 이날 히타치마루의 전사자는 육군 958명, 해군 3명, 승무원 130명 총 1,091명에 이르렀으며, 남아있던 생존자 중에서 무사히 탈출한 후지사키 히토 이등병을 포함한 37명은 어용선 토사마루 (일본우선, 5,402톤)에 구조되어 무쓰레 섬에 상륙했다. 생존자는 예비근위 보병 제1연대 본부 96명, 제10사단 취사병 32명, 해군 관계자 1명, 각종 승무원 18명 등 총 147명이었다.


2.7. 모티엔 전투[편집]


1904년 6월 27일, 표도르 켈러 중장이 이끄는 러시아 제국 육군과 구로키 다메모토가 이끄는 일본 제국 육군의 소규모 군대가 전략적 요충지인 모티엔 고개에서 벌인 충돌적인 전투로 만주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모티엔 고지에서 일어났다.

표도르 켈러 백작은 압록강 전투 이후 러시아군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25,000명을 이끌고 단둥과 랴오둥 반도 사이의 주요 도로들이 교차하는 모티엔 고개에 주둔시켰다. 당시 러시아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파트킨과 미하일 스코벨레프의 친구였던 켈러는 텔리수 전투에서 이미 많은 병력을 손실한 탓에 쿠로파트킨으로부터 2개 연대를 지원받아 방어선을 강화했다.

한편 보급품을 보충받은 구로키 다메모토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6월 19일~6월 25일까지 랴오닝성에서 진격이 중지되었다. 이에 6월 26일 켈러는 쿠로파트킨으로부터 다른 연대 병력들을 더 빼내 당일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모티엔 고개에 3개 러시아군 보병 연대와 3개의 포병 진지를 구축하고, 서쪽에 여단 규모의 병력과 예비 보병 연대가 주둔했다.

이에 일본군은 6월 25일 ~ 6월 26일 밤에 러시아군의 우측면 뒤쪽으로 돌아갔으나 러시아의 맥심기관총과 포병들에게 들켜 러시아군의 좌측면에서 우왕좌왕했다. 전투는 6월 27일 5시 15분 일본군이 정면을 공격함에 따라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은 7시까지 강력한 대포 사격으로 어느 정도 공격을 막아냈지만 8시에는 일본군의 측면 공격에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밤 10시까지 서둘러 시무청(析木城)으로 후퇴했다.

6월 30일 일본군은 모티엔 고개를 함락시켰고, 이 전투의 지휘관인 표도르 켈러는 일본군 포병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7월 13일 모티엔 고개를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으며 양측의 사상자는 비교적 적었지만 유능하다고 알려진 표토르 켈러 장군이 왜 전략적이고 방어하기 쉬운 진지를 그렇게 형편없는 저항으로 포기를 했는지 심도있게 분석했다. 켈러 장군은 일본군 포병이 모티엔 고개를 탈환하기 위해 쏜 산탄의 파편으로 인한 상처로 인해 사망을 했고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2.8. 텔리수 전투[편집]


1904년 6월 14일~6월 15일, 양일간에 걸쳐 만주 뤼순 항 북부에서 벌어진 전투로 일명 '와팡구 전투'라고도 한다.

뤼순항에 틀어박혀 있던 러시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득리사(得利寺, 일본어로 도쿠리지)에 진지를 구축중이던 시베리아 제1군단과 그들을 공격한 일본 육군 제2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만주 뤼순항 북쪽 130km 떨어진 작은 촌락에서 벌어졌다. 오늘날 이 촌락은 드리시(중국어: 得利寺 Delisi)로 알려져 있으며 랴오닝 성 와팡뎬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일본 육군 제2군이 남산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시아군 주력은 뤼순 요새의 2개 사단 및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떨어지게 되었다. 다시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게오르기 스탁겔베르크 중장이 이끄는 시베리아 제1군단이 남하하여 득리사 부근에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당초 일본 제2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러시아군의 공세를 요격한 후 공세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대본영에서 적의 진지 구축이 완료되기 전에 공격하도록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에 득리사의 러시아군 진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6월 14일에 득리사 부근에 도착한 일본 제2군은 다음날 15일에 화포로 진지 공격을 시작했다. 러시아 군대도 응전을 했지만 일본 육군은 화포를 200문 이상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100문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한 지형을 살릴 수 없었다. 러시아군이 득리사역에 불을 지르고 웅악성(熊岳城)으로 철수하면서 일본 제2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투 후 추격하지 않았던 일본 제2군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러시아군은 이후에도 뤼순항의 부대와 합류하지 못했다. 러시아군 사상자수는 33,500명중에서 적어도 3,500명(477명 전사, 2,240명 전상, 754명 실종)에 이르렀으며 일부는 10,000명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공식 기록은 3,500명이었다. 일본군 사상자 수는 40,000명중에서 1,163명 (217명 전사, 946 전상)이었다. 쿠로파트킨 장군의 군대에 의한 습격 위협이 이 전투로 사라졌기 때문에 일본군의 뤼순항 진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텔리수 전투가 벌어지던 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러시아 순양함은 2척의 일본 수송선을 일본 근해에서 격침시켜 2,000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내게 했고, 꽉 막힌 뤼순항 포위에 필수적인 여러 포병대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했다.


2.9. 대석교 전투[편집]


1904년 7월 24일~7월 25일까지 만주 라오양과 뤼순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로 중국어로 '타이시차오 전투'라고도 한다.

잉커우와 남만주 철도 본선을 연결하는 대석교에 자리를 잡은 러시아 제국 육군의 시베리아 제1군단과 시베리아 제4군단을 일본 제국 육군 제2군이 공격하여 승리한 싸움으로 텔리수 전투를 마친 제2군은 보급을 위해 공격을 피했지만 대본영에서 조기 공격 명령을 받아 대석교에 진을 친 러시아 제국 육군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에 7월 24일 5시 30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진저우 방면에서 3개 사단으로 진격하는 일본 제2군에 맞서 러시아군은 대석교 북동쪽 구릉지에 대포병 진지를 만들고 포격을 시작했다. 맹렬한 포격으로 일본 제2군의 진군이 저지되었지만 러시아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으며, 7월 25일에 일본 제2군은 대석교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날 오쿠 야스카타 대장의 제2군은 약 64,000명중에서 1,000명이 전사했고 러시아의 게오르기 스탁켈베르크 중장과 니콜라이 자루바에프 중장이 지휘한 시베리아 제 1, 4군단의 약 60,000명은 1,200명이 전사했다.


2.10. 시무청 전투[편집]


1904년 7월 31일에서 8월 1일까지 발발한 교전으로 일본군 제2군에서 분리된 노즈 미치쓰라 장군이 지휘하는 제4군 휘하의 제5사단과 10사단이 랴오양 시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이 진군은 미하일 자술리치 중장이 지휘하는 러시아 제국 제2시베리아 군단에 의해 가로막혔다. 러시아군은 파벨 미시첸코 중장이 이끄는 포병 부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대고산에 상륙한 제4군은 독립 제10사단을 모아 랴오양 시로 진격했다. 그 도상에 있는 요충지였던 하이청 시 근교에는 시베리아 제2군단이 포진해 있었다. 일본 제국 육군 제4군은 7월 30일에 진지에 도착하여 다음날 공격을 시작했다. 제4군은 포위를 하며 접근하는 일본 제2군 소속의 제3사단과 공동으로 전투를 수행하지만 전황은 유리하지 못했다. 이에 미하일 자술리치 중장이 북쪽으로의 퇴각을 결정하자 전투는 8월 1일 새벽에 끝났다. 시베리아 제2군단은 요양에 있는 러시아 만주군 주력과 합류했고, 일본 제국 육군 제4군은 제2군과 함께 요양 남쪽에 진을 쳤다.

이날 일본군은 836명의 피해가 났고, 러시아군은 약 1,21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 육군 제4군은 대규모 작전을 펼치기 위해 랴오양 시로 향하게 되었다.


2.11. 뤼순 공방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뤼순 공방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2. 203고지 전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3고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3. 황해 해전[편집]


1904년 8월 10일, 황해, 산둥 반도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로 일본이 전략적인 승리를 차지한 전투이다.

1904년 8월 10일 12시 30분에 연합함대는 뤼순 서남쪽 23해리 부근에서 남하해 온 뤼순함대를 확인하고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뤼순함대는 교전을 하지 않고 시종일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의 도주에 충실하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뤼순함대와의 7km 거리에서 정자전법을 실행하기 위해 함대 행동을 시작했지만 뤼순함대의 후방을 따라잡지 못했다. 15시 20분부터 추격을 시작했지만 포격을 재개할수 있었던 것은 17시 30분에 이르러서였다.

18시 40분, 뤼순함대의 기함인 체사레비치의 함교에 2발의 포탄을 직격했고 이때문에 빌헬름 비트게프트와 조타수가 전사했으며 이바노프 함장이 의식을 잃었다. 조타수가 조타 장치를 왼쪽으로 끌어들인 후 엔진에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체사레비치가 왼쪽으로 급선회했고 함대의 열에 돌진한 결과 전체 함선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합함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남하하는 뤼순 함대를 공격했고 야간에는 어뢰 공격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뤼순 함대는 전함 페레스베트의 차석 지휘관 파벨 우크톰스키 소장이 임시로 지휘하게 되었으며, 5척의 전함 (체사레비치 제외)과 1척의 순양함, 9척의 구축함이 침몰되지 않고 간신히 뤼순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함 체사레비치와 구축함 3척은 독일령 자오저우 만에서, 방호순양함 아스콜드와 구축함 1척은 상하이에서, 방호순양함 다이아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에서 프랑스 당국에 억류되었다. 또한 구축함 1척이 좌초되고, 자침한 다른 구축함 레시테리누이가 즈푸(현재의 옌타이 시)에 입항한 일본군에 노획되어 구축함 아카츠키(暁)로 편입되었다. 뤼순은 각 함의 피해를 복구할 수 없었으며 이 결과 뤼순 함대는 그 이후 대대적인 작전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

출격의 보고는 즈푸에 있던 러시아 영사의 손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전달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가 뤼순 함대를 엄호하기 위해 출격했다. 출격 30분 후에는 레시테리누이에서의 보고에 따라 출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함대는 오지 않았고,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이끄는 제2함대에 의해 울산 앞바다에서 포착되어 격파되었다

일본함대는 미카사, 아사히, 시키시마, 야쿠모가 참전했고 러시아는 체사레비치, 포베다, 페레스베트, 폴타바, 레트비잔, 세바스토폴이 참전하여 거의 7시간에 걸친 해전을 펼치며 쌍방 약 7,382발의 포탄을 주고 받았다. 이 해전 후 뤼순 함대의 주력함 중에서는 전함 세바스토폴이 지상공격을 위해 몇 차례 출격했을 뿐 그것도 어뢰를 맞은 이후로는 제대로 된 출동을 할 수 없었다.

이후 연구를 통해 해전 이후의 뤼순 함대는 함대포를 분리하여 육상 요새로 돌려놓았고, 승무원을 육전 부대로 배치하여 함대로서의 전투 기능을 상실한 것을 발견했다. 그 결과 연합함대는 뤼순 함대를 괴멸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측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뤼순 함대의 작전 능력이 아직 건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군에게 뤼순 요새 공략을 조기에 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또한 정자작전이 사실상 실패(적함과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한 것이나 적함을 침몰할 수 없었던 것이 큰 과제로 남았다. 이 해전에서의 교훈을 얻어 쓰시마 해전에서 대승을 거둘 때 활용되었다.


2.14. 울산 해전[편집]


1904년 8월 14일에 대한제국 동해안 울산 앞바다에서 일본 제국 해군과 러시아 제국 해군 사이에 벌어진 교전이었다. 이 해전은 황해 해전이 벌어진 지 4일 후에 도주한 러시아 함정을 추격하면서 일어난 교전이었다.

8월 14일 오전 4시 25분, 울산 남부를 남하 중이던 히코노조 지휘하의 장갑순양함 이즈모, 아즈마, 도키와, 이와테로 이루어진 제2전대는 좌현 전방에 등불을 발견하고 4시 50분에 그것이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임을 확인했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도 4시 30분에 북쪽으로 일본 함대를 발견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남쪽을 향해 도주를 시도했지만 적 발견 소식을 보고받고 남쪽에서 북상하고 있는 방호순양함인 다카치호, 나니와를 발견하고 나서는 일전이 불가피함을 깨닫고 북북서로 배를 돌렸다. 그들의 반응에 대응하여 제2전대도 동쪽으로 변침했다.

양국 함대의 거리가 좁혀지자 5시 23분, 거리 8,400m에서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격을 주고 받으며 모두 피해를 입었지만 5시 36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오른쪽으로 변침하면서 맨 후미의 류리크가 집중 포화를 받았고, 6시에 그로모보이와 로시야는 16시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려 류리크와 함께 북서쪽으로 향했다. 따라서 제2전대도 북서쪽으로 약간 변침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6시 30분 류리크는 피해를 만회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이후 그로모보이와 로시야는 류리크를 엄호하려고 일본 제2전대와의 교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로시야의 피해만 더 커졌고 류리크도 피해를 떨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7시 54분경에 북쪽으로 도주했다. 한참후에 이 두 함선은 다시 제2전대와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류리크가 발사한 포탄이 이와테에 명중하여 75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지만 에센 소장은 류리크 구원을 포기하고 8시 22분에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이때 제4전대 소속 나니와와 다카치호가 접근해 오고 있었지만 에센 소장은 제2전대를 나머지 두 함으로 끌어들이면 손상된 방호순양함 두 척을 물리치고 귀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히코노조는 제4전대에 류리크를 맡겨두고, 그로모보이과 로시야를 추격했지만 이즈모의 탄약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10시 4분에 추격을 중단했다. 이때 지나친 소음으로 옆 사람과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히코노조에게 탄약 부족을 전달한 참모가 칠판에 '우리에게 남은 탄환이 없음'이라고 써서 전달했다. 그것을 본 히코노조는 억울함 때문인지 칠판을 참모로부터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그것을 여러번 짓밟았다. 그러나 이즈모의 탄약은 탄약고가 적어서 대부분은 탄약 통로에 있었다는 말도 있다. 제2전대의 추격이 중지되자 그로모보이와 로시야는 이틀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보고에 의하면 두 함선의 인적 피해는 전사 140명, 부상 319명이었는데, 반면 일본 해군 제2전대의 피해는 전사 45명, 부상 55명이었다.

우류 소장이 이끄는 나니와와 다카치호는 8시 42분에 류리크에 포격을 시작했다. 류리크는 어뢰를 발사하고 충각 공격을 시도하는 등 저항을 계속했지만, 10시경에는 침묵했고 지휘를 했던 콘스탄틴 이바노프 대위는 자침을 명령하고 류리크는 침몰했다. 류리크의 침몰 후 일본 측은 구조 작업을 실행하여 626명을 구출했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한 두 척은 선체 자체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일본군의 포격으로 갑판이 뚫려 수리를 해야 했지만, 물자와 노동력의 부족으로 지지부진했다. 해를 넘긴 1905년에 수리를 마친 두 척은 1905년 4월 25일, 일본 열도 근해로 군사 임무를 띤채 출발했다. 그러나 그로모보이는 5월 11일에 어뢰를 맞고 다시 수리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대국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일본 해군은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 소속으로 태평양에서 별도의 행동을 취한 보조순양함 레나는 황해 해전, 울산 해전 등의 소식을 듣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까지 도주하다가 억류되었다.


2.15. 코르사코프 해전[편집]


1904년 8월 20일, 사할린 코르사코프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일본에서는 '소야 해전(宗谷沖海戦)'이라고 부른다.

일본 제국 해군은 순양함 2척(지토세, 쓰시마)을 이끌고 타카기 스케이치 대좌, 타케나카 타케테루 중좌가 작전을 지휘하여 러시아 제국 해군의 막시밀리안 폰 슈리츠 소령의 방호순양함 1척 (노비크)을 맞아 싸웠다.

이등보호함 노비크는 이전에 벌어진 황해 해전에 참가한 구축함 중 1척이었다. 해전에서 일본에 패한 후 일본 함대에 쫓겨 뤼순항으로 퇴각할 수 없자 독일령 자오저우 만에서 석탄을 보급받은 후 일본 열도를 우회하여 태평양을 북상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연료가 부족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석탄을 보급받기 위해 사할린의 코르사코프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일본 해군의 순양함과 해전이 벌어진 직후 일본 순양함의 포탄에 맞아 노비크는 쾌속을 살리지 못하고 이내 좌초되었다. 승무원들은 군함을 버리고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이 해전은 러시아 해군의 전력을 어느정도 줄이는 데 기여했으며, 또한 당시 러시아 제국 해군이 벌이고 있었던 통상적 파괴 작전의 위협도 감소시켰다. 이 해전 이후 노비크는 일본 해군에 의해 인양된 후 수리되었고, 일본 해군에 편입, 통보함 스즈야(鈴谷)가 되었다.


2.16. 요양 회전[편집]


'요동 전투'라고도 하며 러일전쟁 중기인 1904년 8월 24일~9월 4일까지 중국 랴오닝 성 요양 부근에서 진행되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요동 반도 및 심양 근처 철도에서 만주, 한반도 등의 권익을 놓고 1904년 (메이지 37년)에 발발한 러일전쟁 최대의 전면전이었다. 양군의 주력이 처음 충돌한 이 싸움에서 러시아군은 15만 8,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방어망을 전개했고, 일본군은 12만 5,000명의 병력으로 공격해 도합 28만명의 군사가 충돌했다. 압록강 전투와 함께 일본군에게 있어 최초로 근대 육군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전투였다.

일본군은 8월에 거의 요양에 집결했고, 동쪽에서 제1군, 제4군, 제2군을 전개하며, 제1군이 태자강을 건너고 동쪽을 우회하면서 러시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작전을 계획할 생각이었다. 8월 3일에 아키야마 요시후루 소장이 이끄는 기병 제1여단(나라시노)은 적정 정찰을 하도록 명령받고 전투 전까지 적정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이 아키야마 소장이 이끄는 부대는 기병 제1여단을 중심으로 그 밖에 보병 제38연대 (후시미), 야포병 제14연대, 기포병 중대, 공병 제4대대 등, 제3중대의 복합형 집단을 구성했으며 '아키야마 지대'로 불렸다.

8월 26일, 일본 제1군이 홍사령에 진공하여 이날 오후에는 제2사단이 야습를 감행했고, 이에 러시아군이 구축한 일선 진지였던 이곳을 철수했다. 제2군도 8월 25일에 진격해 러시아군을 후퇴시켰다. 이어서 28일에는 만주군 총사령부가 1군과 2군에 총면적 209제곱미터의 평지이기도 한 수산보 진지에 대한 공략을 명령해 30일에는 진지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전황이 막힌다. 30일 심야에는 제1군이 랴오둥 반도에서 태자하를 건너 랴오양을 우회하면서 우메자와 여단과 함께 러시아군의 두번째 진지를 공격했다. 러시아측은 일본 제1군의 공격을 예상했지만 정찰의 미비도 있어 일본군의 행동을 포착하지 못했고 각 군단으로부터 파병된 부대에서 응전했다. 제1군은 만주산을 확보했고, 주력전투에서 러시아측 병력 추출의 영향으로 9월 1일에는 수산보 진지 부근을 확보했다.

9월 4일에 쿠로파트킨은 퇴로가 차단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전선 기지로부터 봉천에 철수를 명령했다. 일본측은 병력 소모나 연전의 피로가 있는 추격은 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하얼빈을 공략할 수 없게 되면서 기본 전략의 변경이 불가피했다. 랴오양 회전에서 일본군은 무혈 입성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쿠로파트킨 장군은 전략적 후퇴라고 주장하여 양군이 승리를 선언했다. 사상자는 일본 측이 23,500명이었으며, 러시아측이 20,000명 정도로, 양군 모두 40,000명 이상에 달했다. 일본군에서는 8월 31일에 랴오양 회전의 수산보 쟁탈전에서 보병 제34연대의 세키야 메이지로 연대장, 타치바나 슈타 제1대대장(소령)이 전사했다. 특히 타치바나 소령은 해군의 뤼순 철수 작전에서 전사했다. 그 후 히로세 타케오 소령과 함께 자기 이름을 딴 군가까지 만들어지며 전후 군신으로 알려졌다.


2.17. 사하 전투[편집]


사하, 봉천 남쪽을 중심으로 하여 1904년 10월 9일부터 10월 20일까지 전개된 전투. 러시아 육군이 일본 육군에 대해서 반격으로 시작된 회전으로 이 싸움 이후 겨울에 돌입하면서 사허 대진으로 불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회전의 계기는 러시아가 러시아 만주군을 알렉세이 쿠로파킨 휘하에 있던 것을 그리펜 벨크 장군과 쿠로파킨 장군의 쌍두 체제로 이행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쿠로파킨은 일본 육군을 공격하고 위신을 제시하려 했다.

10월 9일에 러시아 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그것을 일본 육군이 요격하는 형태로 싸움이 시작됐다. 일본 육군은 러시아군의 공격을 간파한 것으로 압도적인 병력 차이가 있으면서도 러시아군에 대해서 효율적인 방어를 함으로써 큰 손해를 끼쳤다. 그리고 일본군은 러시아 군에게 공격을 하면서 러시아군은 사허 북안에 퇴각했다. 일본군은 더 공격하다고 하더라도 러시아군의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만주군이 속한 대본영은 여순항 포위에 우선하고 탄약을 그쪽으로 보내는 것과 겨울에 돌입하고 탄약이 다 떨어져 행동이 어렵게 되자 만주군은 참호에서 다음의 공세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또한 이 회전에 있어서 특필해야 할 존재로는 우메자와 미치하루 소장이 이끄는 근위 후비 혼성 여단 (우메자와 여단)이 있다. 근위 후비 혼성 여단은 후비 병(예비역)의 병사들로 구성된 2급의 부대며 우메자와의 탁월한 지휘 아래 최전선에서 정예 부대에 못지않은 맹렬한 분전을 보이며 승기의 일단을 담당하는 활약을 보인 일로 현재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2.18. 산데푸 전투[편집]


1905년 1월 25일~1월 29일에 러시아 만주군의 대공세로 일어났던 일본 육군과 러시아 육군의 전투. 러시아 측의 기습으로 시작되는 병력에서 열세였던 일본군은 초반에는 고전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유럽 육군에는 러시아 육군의 작전 목표가 시마키라 보 부근 강강에서 싸웠다고 해서 일명 심 아키라 보 부근의 전투라고도 한다. 여담으로 일본군이 기관총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전투이다.


2.19. 봉천 전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봉천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0. 쓰시마 해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쓰시마 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관련 문서[편집]



[1] 이 함선의 이름이 좀 아이러니한게, 직역하면 고려인 남성이란 뜻이다. 당시 고려인 또한 러시아 내에서 점차 수가 늘어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이름을 딴 것.[2] 일본은 러시아가 먼저 포를 쏘기에 어뢰를 쐈다고 주장하고 러시아는 일본이 먼저 어뢰 3발을 쐈기에 포로 대응사격하며 후퇴했다고 주장한다.[3] 심지어 이 당시 부상을 입은 러시아군 병사들을 돕던 한국인들까지 일본군이 전부 학살했다.[4] 이때 일본의 선전포고문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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