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베를리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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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작곡 배경
3. 악기 편성
4. 곡의 구성


1. 개요[편집]


1837년에 발표된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크고 아름다운 레퀴엠. 정식명칭은 죽은자들을 위한 대미사곡(Grande Messe des morts)이지만 레퀴엠 텍스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레퀴엠이라 부른다.


2. 작곡 배경[편집]


1837년, 프랑스 정부는 1830년의 7월 혁명과 1835년에 발생한 루이 필립왕 암살미수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식을 계획했는데 이 추모식에 쓰일 음악을 베를리오즈에게 부탁했다. 베를리오즈는 당시 33살밖에 안 된 젊은 음악가였는데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을 제치고 젊은 베를리오즈에게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를 의뢰한것. 이는 사실 베를리오즈에게 호감이 있던 당시 내무장관 아드리안 가스파랑이 손을 쓴 것이었다. 베를리오즈는 가스파랑에게 이 곡을 헌정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곡을 의뢰한 시점이 3월 말이라는 데 있었다. 추모식은 7월에 있을 예정이라 여러 여건을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후다닥 써내야 될 판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이전에 썼던 '장엄미사곡'의 주제도 일부 쓰면서 열심히 매달린 끝에 6월 29일에 전곡을 완성했다. 곡의 편성과 규모를 생각하면 3달만에 쓴 게 놀라울 따름.

그러나 추모식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는 바람에 앵발리드 대성당에서 초연될 예정이던 이곡의 연주가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열심히 곡을 쓰고 초대형 편성의 오케스트라 등을 구성하느라고 빚까지 낸 베를리오즈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 때문에 베를리오즈는 위기를 맞았으나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해 알제리에서 다무레몽이라는 장군이 전사하면서 알제리에서 전사한 다무레몽 장군과 전몰 장병들을 위한 추도식이 계획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베를리오즈는 이 추도식에서 이 곡을 초연하게 하려고 애썼다.

결국 이것이 성사되어서 그해 12월 5일, 앵발리드 대성당에서 육군 주도의 전몰장병 추도식에서 이곡의 초연이 이루어졌다. 이후 1852년과 1867년에 개정판이 출판되기도 했다.


3. 악기 편성[편집]


이 곡의 악기편성은 실로 크고 아름답다. 처음부터 초대형 행사에 연주될 곡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베를리오즈 자신이 크고 아름다운 편성을 좋아한 탓도 크다. 곡의 편성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 오케스트라: 변형 4관 편성으로 플루트 4, 오보에 2, 잉글리시 호른 2, 클라리넷 2, 바순 8, 호른 12, 코넷 4, 튜바 4, 팀파니 16 [1], 큰북 2, 탐탐 4, 심벌즈 10,현악 5부(최소한도로 제1 바이올린 25, 제2바이올린 25, 비올라 20, 첼로 20, 콘트라베이스 18)
  • 반다 1[2]: 코넷 4, 트롬본 4, 튜바 2
  • 반다 2: 트럼펫 4, 트롬본 4
  • 반다 3: 트럼펫 4, 트롬본 4
  • 반다 4: 트럼펫 4, 트롬본 4, 오피클레이드 5 [3]
  • 성악: 테너 독창, 혼성 6부 합창(소프라노알토 80, 제1,2 테너 60, 제1,2 베이스 60)

나중에 나온 구스타프 말러8번 교향곡 '천인의 교향곡'과 비교해도 엄청난 규모의 편성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저것은 최소한의 편성이며 합창을 700-800명까지 늘릴수도 있다. 이런 크고 아름다운 악기 편성 때문에 연주가 많이 되는 편은 아니며 실제로 연주할 때는 규모를 줄이는 경우가 많다.


4. 곡의 구성[편집]


텍스트는 레퀴엠의 텍스트를 따르고 있으나 베네딕투스(Benedictus)를 생략하고 상투스(Sanctus)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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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주는 10명이 한다[2] 오케스트라에서 따로 분리해서 다른곳에서 연주하는 소규모 앙상블[3] 현재는 튜바로 대신 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