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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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초기와 르노 창업
3. 비시 프랑스 이후의 말년

Louis Renault
(1877년 2월 15일 ~ 1944년 10월 24일)

1. 개요[편집]


루이 르노는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의 모체인 르노의 창업주이다.


2. 생애 초기와 르노 창업[편집]


1877년 부르주아 집안의 5남매 중 하나로 태어난 루이 르노는 어린 시절 공학과 역학에 관심이 많아 1899년 마르셀 르노, 페르낭 르노 형제와 함께 르노 형제 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하였다. 하지만, 10년이 안 되어 마르셀은 경주 중 사고로, 페르낭은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루이가 단독으로 경영하였다. 르노 형제가 6명의 직원과 90평 남짓한 작은 공장에서 처음 생산한 차량은 Voiturette (브와뛰레뜨) 1CV (르노 타입 A)이었다. 이 차량은 이듬해 세계 최초의 2도어 세단[1]인 르노 타입 B로 개량되었다.

르노 사는 세계 최초의 세단 설계에 이어 세계 최초로 차량 구동계에 기어를 사용하는 직접전동방식을 도입하였다. 직접전동방식을 사용한 르노의 자동차는 차량 조작성이 좋아 1909년 런던 택시의 절반, 파리 택시의 3분의 2가 르노사의 차량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3. 비시 프랑스 이후의 말년[편집]


독일의 프랑스 점령 후 비양쿠르(현 불로뉴비양쿠르)[2]에 있는[3] 르노 공장도 나치의 손에 넘어갔고, 독일군을 위한 군수물자를 생산하게 됐다. 나치는 탱크의 생산을 요구했지만 당시 르노를 경영하던 루이 르노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고용 유지를 위해 트럭 등의 생산을 했다. 결국 어쨌거나 나치에 적극 협력한 셈이니 레지스탕스에게 찍히고 연합군에게 제대로 얻어터졌다.[4][5] 덤으로 당시 르노 비양쿠르 공장에 가해진 폭격량은 2차 대전 최고량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공장을 복구했으나 1943년 4월과 9월에 걸쳐 미군에 2번이나 얻어터졌다.

이후 루이 르노는 1944년 프랑스 해방 후 나치 협력자로서 체포당하고 수감되었으나 이후 정신병원으로 이송,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수감된 지 4주 만에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불분명하나 공식적으론 요독증으로 되어 있으며, 수감 당시 학대당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 때문에 실제 프랑스의 일부 사람들은 '매국노, 변절자 르노' - '애국자 푸조'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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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개 자동차.[2] 파리의 교외 지역 중 하나다.[3] 여기에는 현재도 르노 본사가 있다. 공장은 운영 중단 후 보존 중이다.[4] 루이 르노는 1942년 3월 영국 공군의 첫 폭격 당시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리기도 하였다.[5] 제2차 세계대전 초반 프랑스 기업인들은 독일이나 영국이나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피점령지치고는 많은 기업들이 그냥 아무 생각없이 평소대로 경영했다. 단지 지금 자국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건 영국놈들이 아니라 독일놈들이니 독일에 대한 반감이 더 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