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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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곡명이 Paris인 노래들에 대한 내용은 Paris(동음이의어) 문서, 이름이 Paris인 사람들에 대한 내용은 패리스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If you are lucky enough to have lived in Paris as a young man, then wherever you go for the rest of your life it stays with you, for Paris is a moveable feast.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행운이 그대에게 따라 준다면,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처럼 평생 당신 곁에 머물 것이다.
프랑스의 수도이자 최대도시. 유럽 대륙 전체를 따지면 단일로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러시아의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이어 3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광역권으로 보면 모스크바 다음으로 큰 도시다. 영국 런던에 이어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과 함께 유럽에서 손에 꼽히는 금융 허브이기도 하다. 또 오랜 역사에서 비롯한 예술과 패션과 유행의 도시로서 첫 손에 꼽히는데 루이비통, 샤넬, 에르메스 등 유수의 명품 회사들의 본사들이 위치해 있다.What an immense impression Paris made upon me. It is the most extraordinary place in the world!
파리가 내게 얼마나 큰 인상을 줬는지,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루브르, 에펠탑, 개선문 등 유럽 여행을 대표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관광명소가 있기도 하다. 파리인을 지칭하는 파리지앵[5] 이나 파리 신드롬[6] 같은 파생 단어도 꽤 유명한 수준. 별명은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
2019년부터[7] 코뮌과 데파르트망의 성격을 가진 특별 집합체인 빌드파리(Ville de Paris)가 되었다. 코뮌이었다가 2019년에 데파르트망이 된 것은 아니고 이전에는 데파르트망 겸 코뮌이었다.
2. 발음[편집]
Paris의 's'는 묵음이다. 실제 프랑스어 발음은 '빠히' 또는 '빠리'에 가깝다. '히'와 '리'가 섞인 듯한 구개수 전동음이다.# 한국어식 연한 'ㅎ'이 아니라 거센 'ㅎ' 소리의 '빠히'이다. 'ㅋ' 또는 'ㄱ' 발음처럼 혀뿌리를 들어올리는 구개수 마찰음으로, 한국어 'ㅎ'과는 괴리가 있는 발음이다. 그래서 파리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들은 파리가 아니라 빠히라고 불러달라는 이들도 있으며 드물게 '빻히'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발음은 한글로는 정확하게 쓸 수 없으며[8] 된소리를 가급적 쓰지 않는다는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 따라 '파리'로 정해진 것이다. 프랑스어의 'r' 발음은 대다수의 언어에서 'ㄹ'에 가까운 발음으로 옮긴다. 구개수음 소리가 나는 'х'를 쓰는 러시아어에서는 'Пахи'라고 할 것 같지만 'Париж(빠리즈)'로 쓰고 있다.
원래 영어식으로 발음하는 경우 미국식은 '패리스', 영국식은 '파리스'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속물들은 원래 발음인 '패리스'가 아닌 '패리'라고 발음한다고 하는 유머가 있다. MTV에 보면 그러한 사람이 나올 때마다 "'파리'도 아니고 '패리'래"하는 농담이 흔히 나온다. 웃음의 포인트는 프랑스어 특유의 마지막 자음의 묵음처리와 a의 발음이다.
3. 기후[편집]
[ 1991-2020년 평균 | 펼치기 · 접기 ]
각종 매체에서 등장하며 낭만의 상징 같은 것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날씨 좋은 남부에 사는 프랑스인 중에는 파리를 별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이는 파리가 북부에 위치해 있는 만큼 전체적인 기후가 남프랑스에 비해 훨씬 칙칙한 편이기 때문. 런던,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등지와 비슷한 전형적인 서유럽의 기후를 보여준다. 여름에는 쾌적하나 겨울에는 런던처럼 안개가 짙게 끼고 음울한 풍경을 보여준다.
연 평균 기온은 12.8°C로 북위 37° 34'에 걸친 서울과 정확히 같으나 연교차는 북위 48° 51'이라는 높은 위도에 비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 위치한 지리적 특징과 난류의 시너지 효과로 15.5°C에 불과하다. 최저기온 극값은 서울보다도 낮다. 1879년 12월 10일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한파가 닥쳐 -23.9°C 의 최저기온을 기록했다. 서울의 최저기온 극값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C. 그나마 서울은 12월 말~1월에 -20°C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여러 번 있지 파리는 그날 혼자서 달랑 -23.9°C이며 다른 날보다 9°C이상 낮아 신뢰성이 서울보다도 훨씬 더 떨어진다.[9] 게다가 12월 말도 아닌 초반에 그런 기록이 나온다는 건 거의 오류가 확실해 보인다. 20세기 이후 파리에서 기록한 최저기온은 -14.7°C이며 이 기록이 현실적으로 신빙성이 높다.
파리의 1월 평균 기온은 5.4°C, 최난월 7월 평균 기온은 20.9°C로 연교차가 작아서 겨울은 부산보다 따뜻하고 일본 도쿄와 비슷하며 여름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강원도 대관령과 비슷한 시원한 날씨로 살기 좋은 기후에 속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634.3mm이지만 계절 상관없이 비가 고르게 오며, 1월 평균습도가 83%에 달한다.
서안 해양성 기후답게 겨울이 온화한 편이라 눈은 드물다. 그러나 한번 눈이 오면 폭설이 온다. 습하고 강수량이 많은 기후이기 때문이다.[10]
연평균 총합 일조량은 1,717시간이다. 7월 일조시간은 222.4시간으로 1년중 가장 높으며, 반대로 12월 일조시간은 56.9시간에 불과하여 런던(55.0시간)과 큰 차이 없다.
6월 하지 즈음하여 전국적으로 음악 축제(Fête de la Musique)가 열리는데 이때는 서머타임까지 겹쳐 밤 10시에도 환하며 밤 10시 40분까지 상용박명이 지속된다.
4. 기원과 역사[편집]
파리라는 이름은 고대에 이 지역에 살았던 갈리아의 일족 파리시(Parisii)에서 유래되었다. 역시 여기서 유래하여 이탈리아어로는 파리를 파리지(Parigi)라고 부른다. 파리시족은 주로 센 강의 하중도인 시테(Cité) 섬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테는 라틴어 'civitas'에서 왔으며, 도시를 뜻하는 '시티(city)'의 어원이다.
이때 고대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 파리시 족이 살던 곳에 도시를 건설한 것이 오늘날 파리의 기원이다. 로마 제국 당시에 이곳은 '루테티아', '루테티아 파리쇼룸(Lutetia Parisiorum; 파리시의 루테티아)'라고 불렸다. 현대 프랑스어로는 Lutèce(뤼떼쓰)라고 한다. 원소 이름 루테튬은 여기서 유래했다.루테티아라는 이름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늪', '습지'를 뜻하는 고대 켈트어 'luteuo-'에서 왔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쥐'를 뜻하는 'luco-'에서 왔다는 설이다.
로마 제국 당시 루테티아는 시테 섬에서 시작해 센 강의 좌안 지역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나가며 발전했다. 오늘날에도 파리 제5구역에는 루테티아 시절에 세워진 원형 극장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후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졌고, 결국 센 강의 좌안 지역을 포기하고 시테 섬을 요새화하게 되어 그 후 파리는 상당 기간 시테 섬을 중심으로 한 요새 도시로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루테티아'라는 이름이 빠지고 '파리'라는 명칭으로만 불리기 시작했다.
5세기 말, 클로비스 1세는 파리를 점령했고 508년, 파리는 메로빙거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절엔 아헨이 수도가 되었다. 885년에서 886년까지 파리에 바이킹족이 쳐들어왔는데 이때 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독일어로는 카를 3세)는 막대한 조공을 지불하고 바이킹과 강화를 맺어서 무마했다.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프랑크 왕국의 왕 대신 파리 백작인 외드와 로베르 1세를 더 따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센강의 우안 쪽으로 파리가 확장되었다.
989년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프랑스 국왕으로 추대되어 카페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파리는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필리프 2세 때에는 파리를 둘러싸는 성벽이 완성되어 파리는 강력한 요새 도시가 되었다. 11세기에 파리 대주교좌 부속 학교로 시작한 파리 대학교가 발전하여 스콜라 신학의 중심지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독특하게 센 강 좌안은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이 발전했다. 대표적인 대학 지역으로 꺄르띠에 라땅이 있다. 센 강 우안은 시장이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파리의 대체적인 구조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백년전쟁 당시에는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파의 치열한 혈전으로 파리는 상당한 혼란에 빠져야 했다. 그 후에 잉글랜드 왕과 동맹을 맺은 부르고뉴 측이 파리를 점령했고, 잔 다르크는 이를 탈환하려다가 붙잡혀서 마녀재판을 받은 후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를 처형한 건 잉글랜드군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이었다. 그러한 탓에 오늘날 파리에는 커다란 잔 다르크 동상이 세워졌다. 파리 시민들의 잔 다르크에 대한 속죄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군이 파리를 다시 탈환하여 파리는 다시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발루아 왕조의 왕들은 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루아르 강 유역(Val de Loire)에 세운 성을 더 좋아해서 파리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일례로 샤를 8세는 루아르 강 유역의 앙부아즈에서 태어나서 앙부아즈에서 죽었으며, 프랑수아 1세의 궁정에서 말년을 보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파리가 아닌 루아르 강 유역에 머물렀던 것이다.
위그노 전쟁 당시에 파리는 가톨릭 세력의 중심지였고 이로 인해 1572년에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그노 전쟁 이후 등극한 앙리 4세는 파리를 프랑스 왕국의 명실상부한 수도로 부활시켰고 이후 파리에는 튈리르 궁, 루브르 궁, 폐병원 등의 대규모 건물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파리의 다른 별명인 '빛의 도시'는 루이 14세 때 붙여졌다. 당시 왕은 파리의 범죄를 줄이고자 한밤 중에도 거리를 환히 밝혔다. 이른바 가로등을 두기 시작한 것인데 이 덕분에 파리는 밤에도 밝았고 그로 인해 '빛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로등은 처음에는 촛불을, 이후에는 점차 가스등, 전기등으로 교체되었다. 한편 파리는 계몽사상의 중심지가 됐고 그때부터 '빛'은 말그대로의 빛과 계몽이라는 중의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이 14세 때 사실상의 행정수도나 다름없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면서 파리는 수도의 위상을 잃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까지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파리 시민들의 불만거리였고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으로 루이 16세 일가가 튈리르 궁으로 끌려오면서 파리는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 왕가에 내건 조건 중 하나(3번 조건)가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환도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중요 사건들이 파리에서 일어났으며 파리에서 혁명이 과격해진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파리는 정치적으로는 잇달아 일어난 혁명과 파리 코뮌 등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산업화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837년에 파리와 생 제르망 안 레이 사이에 철도가 놓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파리에서 각처로 철도 노선들이 이어지게 되었다.
파리를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인물은 나폴레옹 3세 당시 센 현의 지사였던 조르주 오스만 남작(Georges-Eugène Haussmann, 조르주 외젠 오스만[11] )이다. 이 사람은 중세 이래 이어져 온 좁은 골목을 넓은 불바르(Boulevard)로 바꾼다. 불바르는 가로수가 놓인 넓은 도로를 지칭하는 단어로 오스만 남작의 개조 사업을 논할 때 꼭 등장하는 단어이다. 오스만 남작은 파리에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었으며 도심부를 재개발하고 사회 기반 시설들을 갖추는 파리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은 조르주 오스만에 의해 갖춰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12]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전하면서 파리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제2제정이 붕괴하고 제3공화정이 탄생했지만 파리는 프로이센군의 포위로 70여 일이 넘게 고립된 끝에 제3공화정의 보수파 정권은 프로이센 왕국에게 항복하게 된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권에 저항하여 파리 코뮌을 결성하여 봉기하였지만 결국 베르사유 정부군에게 진압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이때 코뮈니스트들의 의도적인 방화로 튀를리 궁전, 서청, 정부, 법원 건물 등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전까지 파리는 큰 발전을 이룩했다. 여러 차례의 엑스포가 개최되었는데 1889 파리 엑스포를 기념하여 에펠 탑이 건설되었고, 1900 파리 엑스포에는 파리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침공으로 파리는 함락 일보직전까지 놓였고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해 파리는 간신히 함락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 파리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몰려들어서 예술 도시로 세계적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그 당시 파리로 건너온 예술가들은 에콜 드 파리(파리 파)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베네룩스를 공격하는 척하며 강력한 기동 부대를 아르덴 산맥으로 보내 연합군의 옆구리를 두 동강 내버린 후 프랑스 북부를 휩쓸며 베네룩스의 연합군은 됭케르크에서 간신히 빠져나가 독일군의 정면 공세를 막아낼 정규군이 없어지게 된 프랑스는 6월 10일 파리를 무저항 도시로 선언, 독일군에게 6월 14일 저항 없이 내주게 된다.[13] 샹젤리제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본 시민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겪었던 수모를 또 겪게 되어서 참담했다고 한다. 그중 압권이 히틀러가 에펠탑에서 찍은 사진. 아직까지도 히틀러의 에펠탑 사진은 2차 세계대전 프랑스의 굴욕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자리잡고 있다. 히틀러가 에펠탑을 온다는 소식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프랑스 측에서 에펠탑의 전기를 끊어버렸다는 것도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독일 점령 하 파리 시민들 중에는 독일에 협력한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레지스탕스 활동에 뛰어들어 독일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944년 8월 15일에 파리는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파리가 함락당하기 직전,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보병대장[16] 에게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등 파리의 유명한 문화유산들에 폭탄들이 설치되어 콜티츠가 히틀러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면 파리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겠지만 콜티츠는 "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라며 히틀러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 이때, 콜티츠는 명령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콜티츠의 말을 들은 아내는 "당신이 자랑스럽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당시 히틀러는 9번이나 전화를 하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Brennt Paris?/Is Paris Burning?)"라고 질문했는데 이 말은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작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ule-t-il?)'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영화 제목이 되었으며 게임 코만도스 2의 마지막 미션 제목도 'Is Paris Burning?'다.
명령을 무시하고 항복한 콜티츠와 부하들은 파리 한복판을 끌려가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야유 및 욕설, 침까지 맞는 비참한 신세를 겪지만 레지스탕스와 경찰들은 그들을 지키면서 안전을 보장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 앙리 롤 탕기에게 항복 조건으로 자신과 17,000명 파리 주둔 독일군 목숨을 보장했기 때문. 물론 롤 탕기는 나중에 회고하길, "파리를 지켜준 그의 마음에 고마워하며 설령 그런 조건이 없었다 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콜티츠 중장은 종전 뒤에 전쟁포로로 2년 정도 복역했지만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을 높게 인정받아 풀려나게 되었고 파리 시를 무사하게 놔둔 것에 대한 감사장과 명예시민증까지 받았다. 콜티츠는 1956년에 파리를 조용히 방문했는데 바로 나치 독일군 지휘 본부가 있었던 바로 그 호텔 르 뫼리스를 잠깐 들러갔다고 한다. 당시 호텔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직원의 말에 의하면, 콜티츠는 아주 단정한 자세로, 하지만 세월의 경과에 조금은 놀란 듯한 눈치로 호텔을 둘러봤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호텔 매니저가 콜티츠에게 샴페인을 권했지만, 콜티츠는 사양한 채 몇 분을 둘러보다 호텔을 떠났다.
콜티츠가 1966년 숨을 거두자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 지도자와 프랑스 전현직 장군들과 외교관까지 콜티츠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명복을 빌었고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파리를 놔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2014년 7월 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Extreme Surprise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전후에 파리는 교외로 확장되어 원래부터 많은 인구를 가졌지만 계속 인구가 증가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1968년의 68운동은 파리에서 전 세계로 확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세계적인 문화, 예술, 패션의 도시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5. 경제[편집]
2021년 달러 기준으로는 9,341억 달러로 도쿄, 뉴욕, 로스앤젤레스 에 뒤이은 4위를 차지하였으며, 유럽연합 내에선 2위인 라인-루르 지역과 1.5배 차이로 압도적인 1위다. 루이 비통, 샤넬, 에르메스, 크리스챤 디올, 로저 비비에, 고야드, 발렌시아가, 셀린느, 생 로랑, 겐조 등의 프랑스의 대다수 명품 브랜드들의 본사와 LVMH[17] , 케링[18] , BNP 파리바, 토탈, 사노피, 다논, EDF 등 프랑스 굴지의 대기업 본사들은 거의 다 파리에 위치해 있다. 다만 파리시의 면적이 워낙 좁아 상당수의 대기업 본사들은 파리 근교 오드센 지방의 라데팡스에 많은 편.
6. 인구[편집]
자세한 내용은 파리(프랑스)/인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