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페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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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가족관계
3. 생애


Rui Peres
(? ~ 1597)

1. 개요[편집]


포르투갈의 상인.
루이 페레스라는 이름으로 가명으로 추정되고 페르난데스라는 가명도 사용했다고 한다.

2. 가족관계[편집]


아들로는 안토니오 로드리게스, 프란치스코 로드리게스, 주앙 로드리게스라는 가명을 쓴 1571년 출생의 장남과 마누엘 페르난데스, 루이스 로드리게스라는 가명을 쓴 1575년 출생의 차남이 있다.

3. 생애[편집]


1520년대 말 1530년대 초에 비세우에서 유대계 일족으로 태어났고 1557년에 포르투갈에서는 개신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으며, 1560년에는 고아에 이단심문소가 설치되었다. 이단심문소의 추적을 받아 아들 두 명을 데리고 인도로 여행을 떠나 고아를 거쳐 나가사키로 이주했다가 가스팔 페르난데스 하폰을 노예로 샀다.

1587년에 마카오로 갔다가 마카오의 가톨릭 교구가 추적하자 동향 사람이자 카피탄 모르인 제로니모 페이라의 보호를 받고 차남인 마누엘과 함께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 1588년 8월 16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3년간 나가사키에서 머물렀고 일본인 가톨릭 교도들은 유대인 혈통에 대한 혐오감이 있어서 차별을 당했고, 페레스가 사순설에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예수회에 고발당한 적이 있으나, 늙고 병들었기에 신부의 허가를 받아 먹었다고 한다.

1591년 8월 19일에 말라오의 카피탄 모르를 지낸 롯케 데 메로 페레이라가 마카오의 카피탄 모르로 임명되어 나가사키로 오자 페레스는 차남과 함께 히라도로 떠났고, 1592년에는 필리핀으로 갔다.

마닐라에 도착해 머무르다가 1596년 9월 9일에 도미니코회 선교사로부터 이단심문소에 고발당했으며, 상인들도 페레스 일가를 고발하기 위해 자신의 노예를 심부름꾼으로 보내 조사하면서 페레스 일가의 생활, 일본에서 유대교의 의례에 따라 암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을 파악되어 고발당했다. 페레스의 노예들로부터 증언을 확보한 이단심문소로 인해 1597년 6월 11일에 체포되어 형무소로 보내지고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유죄 판결이 내려졌지만 아카풀코에서 출항한 지 이틀 만에 선상에서 병사했고, 그 시신은 11월 29일 안식일에 바다에서 유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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