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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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32년 10월 18일에 중국에서 태어났다. 부주석 림춘추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1999년 6월 3일자 로동신문 기사를 보면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지하공청투쟁을 하다가 감옥에서 희생된 림수만 동지의 아버지 (...) 혁명을 하다가 먼저 간 아버지 대신 림수만동무를 맡아 키우시기 위해...'라는 표현이 있는것을 봐선 림춘추의 아들이 아닌걸로 보인다.

해방 이후 빨치산 2세대들을 김일성이 거두어오면서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하였고 이후 6.25 전쟁 중에 친위중대에 소속되었다. 전후 외국 유학을 다녀왔다. 1967년 10월, 함경남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1년 12월, 만 39세의 나이로 량강도 책임비서로 이임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김일성이 림수만을 직접 찾아와 량강도는 경제적으론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항일무장투쟁시기의 혁명 전적지와 사적지들이 많은 곳이라면서 백두산지기나 다름없다고 그를 격려하였다 카더라.

1978~1979년 사이에 량강도 인민위원장을 겸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1년 9월, 량강도 대표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50세 생일상도 내려받는 등 김일성, 김정일의 상당한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84년 10월 당 경제사업부 부부장으로 일했다. 1986년 4월, 최고인민회의 7기 5차 회의에 출석했다. 그런데 중간에 뭔가 사고를 쳤는지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해임된 것으로 보이며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도 탈락했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91년 12월부터 김기선의 뒤를 이어 개성시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1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9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 일각의 주장에 따르면, 도당 책임비서를 하다가 시당 책임비서로 강등된 이유가 사위가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이라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에 휘말려 강등당한 것이라고 하는데, 림수만은 이 사건 터지기 전에 이미 개성시 비서를 하고 있었고, 1992년 4월에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도 지냈다.

그렇게 지방직으로 그런대로 잘 지내던 중 1997년 11월 17일, 0시 30분에 65세를 일기로 급사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이제 앞으로 혁명은 더 간고해질 수도 있다. 그럴수록 우리 가족은 오직 한분 위대한 장군님만을 굳게 믿고 꿋꿋이 살아야 한다. 장군님만 믿고 장군님께서 하라고 하시는대로 하면 된다. 위대한 장군님을 더 잘 받들어 모시라."라고 후빨성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당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는 공동 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가 힘있게 벌어지는 시기 다년간 도당책임비서 겸 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의 중책을 지니고 당대렬을 조직사상적으로 공고히 하며 인민대중을 당의 두리에 묶어세우고 인민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라고 칭송해주었다. 후임 개성시 책임비서에는 1998년 김시학이 임명되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1999년 6월 3일, 로동신문은 림수만 추모기사를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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