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메 나가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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丸目長恵
(1540 ~ 1629)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일본]] 전국시대 말기와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검호. 타이샤류의 창시자.

통칭 쿠란도스케(蔵人佐), 이와미노카미(石見守), 마루메쿠란도(丸目蔵人). 본성은 후지와라(藤原), 호는 테츠사이(徹斎). 아버지는 마루메 요소우에몬, 어머니는 아카이케 이즈의 딸로 추정되고 있다.


2. 행적[편집]


1540년에 히고국의 야츠시로군 야츠시로에서 태어났고 1554년에 처음으로 출진해서 무공을 세워 아버지와 함께 마루메라는 성씨를 받았으며, 1566년에는 히고 아마쿠사군의 영주의 혼도 성주인 아마쿠사 이즈노카미 밑에서 수행했다.

1558년에는 상경해서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에게 신카게류를 배우고 1564년에 아시카가 요시테루 앞에서 카미이즈미가 검술을 선보일 때 카미이즈미의 상대로 선도를 선보이자 마루메의 선도는 천하의 보물이라는 칭송을 받고 표창장을 받았다.

오오기마치 덴노 앞에서도 검술을 선보였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가라 가문에서 신카게류의 지도를 실시했으며, 1566년에 제자들을 데리고 상경했고 아타고야마, 세이간지, 키요미즈데라에서 병법 천하 제일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여러 사람에게 진검승부를 걸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아 승부를 선보이지 못하고 돌아갔다.

1567년에는 카미이즈미로부터 면허 개전을 받았고 일설에는 1569년에 받았다고 하며, 사가라 가문에서 벼슬을 지냈다. 1570년에 시마즈 이에히사가 오구치 성을 공격해서 싸웠지만 계략으로 오구치 성이 함락당했으며, 출격을 주장했기에 사가라 요시히로부터 금고 처분을 받아 출세할 수 없었다.

검술 수행에 전념해 카미이즈미로부터 서쪽 지방에서 신카케류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으며, 몇 년 후에는 타이샤류를 개창했으며, 1587년에 사가라 요시후사로부터 용서받아 사가라 가문을 섬겨 검술 사범으로 117석이 주어졌다.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요리후사 휘하에서 동군으로 참전했고 에도로 가서 야규 무네노리에게 도전했지만 천하의 둘인 달인을 한 명이라도 잃는 것은 아깝다고 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일본의 천하 제일은 야규, 서일본의 천하 제일은 마루메라면서 서약을 맺도록 해 대결을 단념했다. 다만 이 기록에는 신빙성 논란이 있는데, 이 둘이 만났다는 공식기록이 전무한데다 판본에 따라 등장인물이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야규 무네노리를 찾아간 것은 동일하지만, 천하의 달인 발언이 야규 무네노리 입에서 나왔다던가, 중재한 인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닌 카미이즈미 노부츠나[1]라던가, 둘의 싸움을 중간에서 중매한 것이 미야모토 무사시[2]라던가... 게다가 오노 타다아키를 위시한 일도류 계열은 공기가 되어버렸다. 이런 여러가지 모순을 생각해보면 신빙성은 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 신카게류의 정통성에 얽힌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타이샤류는 큐슈 일대에 퍼졌고 만년에 테츠사이라 했으며, 키리하라노에 은거해 농사를 지으면서 은거했으며, 1629년에 사망했다.

일본도, 야리, 나기나타, 발도술, 수리검 등 21종류의 무술을 잘했다고 하며, 언동은 멧돼지 같은 무사였지만 서예, 와카, 피리를 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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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이미즈미 노부츠나의 몰년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카미이즈미 가문 기록에 따른 가장 인정 받는 설에 따르면 1582년이다. 세키가하라 전투보다 무려 18년이나 일찍 죽은 인물이 중재했다는 것이다 사실 부활을 쓸 수 있어서 최강이라 카더라[2] 야규 무네노리미야모토 무사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