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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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好之長(みよし ゆきなが)[1]
1458 ~ 1520년

1. 소개
2. 산슈(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
3. 후계자의 보좌관이 되다
4. 케이쵸 가문의 후계자 분쟁
5. 사망
6. 기타



1. 소개[편집]


사실상 미요시 정권의 시조. 아들로 미요시 나가히데(三好長秀)[2] 등이 있었고 손자로 미요시 모토나가가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칸레이를 배출하던 호소카와 가문의 분가인 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이었다. 지지 기반이 흔들리던 호소카와 산슈 가문(讃州家)[3] 당주 호소카와 마사유키(細川政之)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이후 호소카와 가문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호소카와 스미모토(細川澄元) 측에 소속해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高国)와 싸우며 키나이에 미요시 일족의 이름을 알린 무장이었다.


2. 산슈(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편집]


본래 미요시 가문은 아와의 통치를 담당하던 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명령에 따라 아와를 관리하던 코쿠진(국인) 세력이었다. 미요시군(三好郡)의 시보 성(芝生城)을 본거지로 삼았다고 추측되며, 미요시 시키부노쇼(三好式部少輔)[4]가 아와 슈고의 명으로 아와 서북부를 통치해나가고 있었다. 또한 오닌•분메이의 난을 겪은 이후에는 아와를 담당하는 미요시와 성격이 조금 다른 미요시씨가 호소카와 시게유키(細川成之)와 아들 호소카와 마사유키(細川政之)에게 등용되어 쿄토를 중심으로 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미요시씨가 바로 유키나가로 보인다.

이 시기 아와 호소카와 가문 내부에선 1478년에 시게유키가 갑자기 당주의 자리를 마사유키에게 물려주며 출가했다. 이에 마사유키는 1479년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세습의 승인을 받았지만 가문 내의 우치슈(内衆)들은 마사유키의 과도한 문화 생활을 고깝게 보며 마사유키가 당주가 된 것에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사유키는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려 슈고의 권력 기반인 우치슈를 중용하는 대신 아와의 코쿠진인 미요시씨의 유키나가를 중용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2년뒤인 1481년, 우치슈 중 한 명인 토죠(東条)씨와 유키나가의 미요시씨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1482년 7월에 드디어 일이 터졌다. 호소카와 마사유키 소속의 토모나리 마고사부로(友成孫三郎)가 쿄토 근방의 절에서 방목 중이던 말을 훔쳤다는 말을 듣고 이를 규명하러 간 쇼시다이[5] 우라카미 노리무네(浦上則宗)를 따르던 한 무장이 토모나리를 죽여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마사유키는 쇼시다이의 저택을 포위했지만 당시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중재로 곧 포위를 풀게 되었다. 마사유키는 계속 쇼시다이의 처벌을 부탁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마사유키는 하향했다. 이런 행동에 대해 아버지 호소카와 시게유키는 아들의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며 쿄토로 돌아왔고 마사유키를 따르던 토죠씨를 비롯한 이치노미야(一宮)씨, 이이오(飯尾)씨들은 하향하지 않고 쿄토에 남게 되었으며 마사유키와 우치슈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버렸다.

1485년 6월 미요시 유키나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일에 미요시 유키나가와 호소카와 마사유키를 따르는 약 50명이 타카쿠라 나가츠구(高倉永継)가 포박한 도적을 탈취하기 위해 그의 저택을 포위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으나 이 소식을 들은 케이쵸 가문의 당주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곧바로 수습에 나섰기에 대치 상황은 유야무야 끝이 났다.

이 사건 이후로 토죠씨와 이이오씨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며 아와로 하향했고, 이에 미요시 유키나가는 쿄토 방변의 잇키 세력과 연합하거나 직접 토쿠세이(徳政, 덕정)를 행하는 등 더욱 더 마사유키를 보좌하는 행동을 보였다. 결국엔 8월 9일 아침, 쇼시다이 타가 타카타다(多賀高忠)가 미요시 유키나가 토벌을 위해 호소카와 마사유키의 본거를 방문하게 되었다. 유키나가가 마사유키의 본거에 숨어 있었기에 쇼시다이는 마사유키를 포위하며 유키나가의 죄를 물으러 왔다고 하며 그를 내보낼 것을 요청했지만, 마사유키는 이 제안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쇼시다이는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토죠 일파는 결국 아와에서 대대적인 모반을 일으켰고, 몇몇 호족들도 이에 호응하여 아와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쿄토에 머물던 호소카와 시게유키, 마사유키 부자는 함께 10월 12일에 하향하며 미요시씨와 카와무라(河村)씨를 내세워 토죠 일파에 대항했고, 다른 호소카와 서류 가문들도 지원을 보내게 되어 이들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마사유키가 요절하고 그의 아들 호소카와 요시하루(細川義春)가 당주가 되자 그를 따랐으며 요시하루가 쿄토에 머무름에도 불구하고 카와치 하타케야마 요시토요(畠山義豊)의 토벌에 출진했으며, 1494년 10월 28일에는 요시하루를 야마시로 슈고로 만들기 위해 우지군으로 입부하는 등 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유력 무장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후 호소카와 요시하루마저 요절하자 그의 아들인 호소카와 유키모치(細川之持)가 산슈 가문을 잇게 되었고 미요시 유키나가도 유키모치를 따르게 되었다.


3. 후계자의 보좌관이 되다[편집]


한편 호소카와 본가인 케이쵸 가문에서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쇼군을 폐립(廃立)하거나 자신이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아 실권이 그의 가신들에게로 넘어가는 등 난리가 나고 있었다. 또한 마사모토는 아들이 없었기에 양자를 들였는데 이조차 가신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꼬이게 되어 칸파쿠(関白) 쿠죠(九条) 가문으로부터 호소카와 스미유키(細川澄之), 산슈 가문의 당주인 호소카와 유키모치의 동생, 호소카와 스미모토(細川澄元), 또 다른 호소카와씨의 분가인 노슈 가문(野州家)으로부터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高国), 이 세 명을 양자로 들이면서 케이쵸 가문은 혼란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1506년 2월이 되자 미요시 유키나가는 스미모토를 옹립하며 선봉으로서 상락하게 되었다. 유키나가는 셋츠 슈고에 임명된 스미모토의 휘하에서 '서반국슈고다이'(摂津西半国守護代)가 되어 슈고의 명령을 전달, 집행하는 등 스미모토를 정치적으로 보좌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명령을 따라 야마토로 진군하는 등 군사, 정치 양면으로 스미모토와 케이쵸 가문을 철저하게 보좌해나갔다.


4. 케이쵸 가문의 후계자 분쟁[편집]


하지만 유키나가를 위시로 한 스미모토파는 곧 코자이 모토나가(香西元長)를 위시로 한 스미유키파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1507년 탄고의 공략에 나섰지만 마사모토가 돌아가자 스미모토와 함께 마사모토를 따라 돌아갔다. 그리고 마사모토는 6월, 코자이 모토나가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모토나가는 기세를 이어 뒤따라 오던 스미모토 일당을 공격했으며 미요시 유키나가는 이에 견디지 못하고 스미모토를 데리고 오미로 도망쳤다. 이후 코자이 모토나가는 스미유키를 당주로 옹립했으나, 8월에 호소카와 타카쿠니파의 공격을 받아 스미유키 세력의 중요 인물들은 전원 몰살당했다.

스미유키가 살해당하자 미요시 유키나가는 타카쿠니의 동의를 얻어 제11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를 옹립하고 스미모토를 당주로 앉혀 중앙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스미모토로부터 정치권을 위임받아 키나이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카쿠니는, 요시즈미의 종형제이자 제10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를 옹립하고 상락중이던, 오우치 요시오키와 협동하여 스미모토의 세력을 노리게 되었다. 스미모토의 세력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여 다시 오미로 물러나게 되었다.

1508년, 아와에서 코쿠소게키(国忩劇)가 일어나자 미요시 유키나가는 산슈 가문의 호소카와 시게유키로부터 아와 코쿠진에 대한 군사 위임권을 2월 23일에 받아 반란을 진압했다. 이처럼 유키나가는 케이쵸와 산슈 가문 어디에서도 중용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6] 1509년 6월이 되자 유키나가는 호소카와 스미모토 세력의 복권을 위해 쿄토 탈환의 계획을 세웠으나 뇨이가타케 전투(如意ヶ嶽の戦い)에서 패배하며 아와로 탈주하게 되었다.[7]

유키나가는 다시 한번 1511년에 스미모토와 함께 호소카와 타카쿠니의 세력을 공격했으나 후나오카야마(船岡山)에서 또 다시 타카쿠니ㆍ오우치 요시오키 연합군에 패배하여 아와로 물러났다. 이후 유키나가는 잠시 아와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1517년에 타카쿠니의 세력에 항복한 아와지 호소카와 가문의 당주 호소카와 히사하루(細川尚春)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1518년 5월에 멸망시켜 아와지의 점거에 성공했다. 11월에는 키나이로 출진했고 1520년 3월이 되어서야 셋츠를 점거해 타카쿠니의 세력을 물리치며 상락에 성공했다. 하지만 상락 중 몸 상태가 악화된 스미모토는 이타미 성(伊丹城)에 있었기에 유키나가가 대리로 일을 진행하게 되었다.


5. 사망[편집]


이번에도 유키나가의 세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미로 물러났던 타카쿠니가 롯카쿠 사다요리(六角定頼)와 연합하여 쳐들어오자 스미모토를 주축으로 움직였던 아와의 코쿠진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모반하거나 타카쿠니에게 항복했고, 세력을 잃은 미요시 유키나가는 결국 타카쿠니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타카쿠니는 곧 유키나가를 치온지(知恩寺)에 몰아넣어 자결을 요구했고, 유키나가는 자결하여 사망했다. 향년 63세.[8]

스미모토는 타카쿠니ㆍ롯가쿠 연합군이 쳐들어 올 당시에 이들과 맞서 싸웠으나, 패퇴하여 아와로 도망쳤으며 결국 동년에 아와에서 사망했다.


6. 기타[편집]


아와 호소카와 가문에게 등용되어 키나이에서 어느 정도의 활동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요기 유키나가의 관직과 실명은 호소카와 케이쵸 가문의 후계자인 스미모토를 옹립하고 상락하는 1506년이 돼서야 확인이 된다. 1506년 이전까지의 기록에서는 요시미(吉見)와 미요시(三吉)의 씨명만이 확인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을 유키나가 본인으로 비정하고 있다.

미요시 가문은 호소카와 가문이 아와에 근거한 뒤에 세력을 본격적으로 넓히게 되었으며 유키나가의 대에 그 영향력이 키나이까지 미치게 되었으므로 미요시 가문의 시조격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본인은 60대의 나이에 죽었으나 그의 뒤를 잇는 아들, 손자 미요시 모토나가, 증손 미요시 나가요시, 또 그의 아들 미요시 요시오키와 양자 미요시 요시츠구는 전부 제 명을 못 살고 요절했다.[9]

[1] '나가테루'(長輝)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당시의 사료에선 이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2] '나가히데'라는 이름을 증명하는 1차 사료는 현재 발견되지 않았다.[3] 아와 호소카와 가문이 아와 슈고(阿波 守護)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보통은 '아와 슈고'로 불렸지만, 칸레이를 배출하던 호소카와 가문을 케이쵸 가문(京兆家)이라고 불렀듯이 아와 호소카와 가문이 사누키노카미(讃岐守)를 대대로 역임했기에 '산슈 가문'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4] 山下知之 씨는 이 시키부노쇼를 미요시 유키나가의 부친에 해당하는 '나가유키'(長之)라고 비정했으나 天野忠幸 씨는 나가유키라는 실명을 1차 사료에서 찾을 수 없다며 이를 부정했다. - 《阿波三好氏》(2012년, 岩田書院) p.12[5] 所司代, 소사대. 사무라이도코로(侍所, 시소)를 관리하는 역직[6] 天野忠幸 씨는 호소카와 가문 문서의 3월 5일부 호소카와 시게유키의 문서를 근거로 시게유키가 미요시 유키나가를 제어하기 어려워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라 했다. - 《阿波三好氏》(2012년, 岩田書院) p.33-34[7] 이 전투에서 장남 미요시 나가히데는 이세시 방면으로 도망갔으나 키타바타케 키치카(北畠材親)의 공격을 받아 자결하여 3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8] 그의 남은 아들인 미요시 나가미츠(三好長光)와 아쿠타가와 나가노리(芥川長則) 또한 타카쿠니에 의해 자결하여 사망했다.[9] 이 중 최연소는 22세의 요시오키, 최장자는 43세의 나가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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