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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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민중 봉기
3. 인명
3.1. 실존 인물
3.2. 가상 인물


1. 일본의 민중 봉기[편집]


一揆(いっき).

파일:민란.gif

일본 교과서에 수록된 1700년~1870년 사이의 잇키(一揆, 백성들의 봉기)와 우치코와시(打ちこわし, 마을 사람들이 부자집을 때려 부수는 행위) 발생 건수 그래프. 파란색은 잇키, 검은색은 우치코와시이다. 에도 시대의 이런 민중소요의 횟수는 도합 거의 3000회에 이른다고 한다. 위 그래프에서 수치가 급증하는 구간이 3곳이 있는데 각각 텐메이 대기근, 텐포 대기근, 막말 혼란기이다.

어떠한 이유로 하나의 공동체가 뜻을 함께 하여 그 목표를 달성하려 하는 것, 혹은 동맹이나 계약을 통해 형성된 정치적 공동체 자체나 그 공동체를 기반으로 구체제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을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하게는 '목표를 달성하려 하는 일'이라는 뜻이라 한다. 보통 반란 정도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다소의 뉘앙스 차이가 있다. 에도 시대 이전의 잇키는 정치적 성향의 이익집단에 의한 폭력적 혹은 비폭력적 정치운동에 가까웠으며 에도시대 잇키의 대다수인 농민잇키(農民一揆) 역시 일종의 항의 및 의사표현의 수단인 경우가 대다수고 아예 정권을 갈아엎으려 든 경우는 무사들이 중심이 된 에도 시대 초기나 막부 말기를 제외하면 별로 없어 반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리고 잇키를 결성하는 주체는 농민이나 종교 신도뿐만이 아닌 사무라이로닌들도 있었으며, 모리 모토나리로 유명한 센고쿠 다이묘 모리 가문은 아키 지역의 유력 무사(호족)들의 협의체인 아키 코쿠진 잇키의 대표자라는 자리에서부터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한 예다. 히고 코쿠진 잇키, 카사이 오사키 잇키 등도 반란은 반란이지만 농민/종교 잇키가 아닌 코쿠진들이 주도한 반란이다.

중앙권력이 몰락했던 오닌의 난 이후부터 에도 막부 성립 이전까지는 많은 농민/종교 잇키가 있었으며, 개중에는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다이묘를 몰아내고 장원을 차지한 케이스도 있었다. 센고쿠 시대에는 전란이나 흉작으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수두룩했다. 앉아서 굶어 죽으나 민란을 일으키고 잡혀 죽느나 어차피 죽는거 모 아니면 도라고 일본 각지에서 잇키가 빈번했다. 일향종의 잇코잇키(一向一揆)도 유명하다.

한편 평화로운 시기로 여기지곤 하는 에도 막부 통치기에서도 잇키는 굉장히 많이 일어났는데, 다이묘급은 어떻게 버텨서 그렇지 잇키 당해서 작살난 사족들이 그득한게 에도 시대였다. 고산케가 쥐고 있던 히로시마 번도 망할뻔해서 쇼군한테 SOS 치던게 에도시대였던 것이다. 막부 초기의 시마바라의 난은 일본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잇키(민란)이었고, 에도시대 말기인 1837년에 일어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은 덴포 대기근으로 발생한 이재민에 대한 구휼이 늦어지고 거상들이 폭리를 취하자 유학자이자 전직 요리키[1]인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일으킨 난이었다.

1867년에도 대규모 잇키가 일어났는데, 1867년 8월 나고야의 하층민들이 주동이 된 시위대가 '에에자나이카(좋지 아니한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떼지어 몰려다니면서 부잣집으로 몰려가 음식과 향응을 요구하고 자기들끼리 그 부잣집의 재산을 나눠갖기도 했다. 이런 미치광이의 행진은 11월까지 계속되어 도시 기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렇게 대규모 소동이 일어난 원인은 그해 좌막파(막부 보위파)와 도막파(막부 타도파)들이 서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농민들한테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들인 것에 따른 반발심 때문이었다.[2]

이밖에도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징병제가 실시되었는데, 농민들이 징병제에 반대하면서 일으킨 혈세잇키도 있다.


2. 선소프트아케이드 게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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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명[편집]



3.1. 실존 인물[편집]




3.2. 가상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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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견직 무사.[2] 출처: 상식 밖의 동양사/ 박윤명 지음/ 새길/ 145~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