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누 샤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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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이슬람 이전
2.2. 초기 이슬람 시대
2.3. vs 우마이야 왕조
2.4. 세습 왕조 건설
2.4.1. 마즈야드 왕조
2.4.2. 앗샤이크 왕조
2.4.2.1. 팔레스타인 & 시리아
2.4.2.2. 자지라 (북부 메소포타미아)


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이슬람 이전[편집]


샤이반 부족은 본래 네지드 사막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오가던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완벽한 아랍어를 구사한다는 평판을 얻었으며 타밈 부족[1] 및 타글립 부족[2]과 대립하였다. 샤이반 부족은 메카의 하심 씨족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로써 그들은 무함마드의 이슬람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2.2. 초기 이슬람 시대[편집]


라쉬둔 칼리파 시대에 샤이반 부족은 기존의 타밈, 타글립 족과 화해하고 이슬람의 기치 하에 이라크의 사산 제국 정복에 나섰다. 바누 샤이반 출신 장군들 중엔 알 무타나 이븐 하리스가 가장 유명했는데, 그는 카디시야 전투의 주요 장수 중 한명이었으며 총사령관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시리아 전선으로 떠난 후 남은 군대를 이끌고 이라크를 평정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사담 후세인 시절 이라크 공화국의 국가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였으며 이라크 서남부는 무타나 주로 명명되었다.[3] 이후 샤이반 부족은 기존에 유목을 위해 왕래하기도 했던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디야르바키르와 아르메니아 고원 일대로 대거 이주하였다. 일부는 시리아, 호라산 쪽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2.3. vs 우마이야 왕조[편집]


7 ~ 9세기 무렵 샤이반 부족은 자지라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강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급진파로 분류되는 카와리지파에 가담하기도 했는데, 우마이야 왕조를 꾸준히 괴롭혔다. 695 ~ 697년에 걸쳐 이라크 중북부를 휘저었던 샤비브 이븐 야지드가 그 선구자였다. 샤비브는 우마이야 군대를 3차례나 격파하고 알 마다인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후 쿠파를 위협하던 그는 수천의 정규군을 이끌고 온 바누 칼브의 수피안에게 패배하였고 도주하다가 운하에 빠져 익사하였다. 다만 737년에 샤비브의 아들 수하리가 모술 인근에서 봉기하기도 하는 등 우마이야 조는 8세기 초를 제외하면 자지라 일대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였다.

745년에는 앗다하크 이븐 카이스가 이라크 총독 압달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와시트에 포위한 후 항복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라크 대부분이 다하크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쿠라이쉬 부족 출신인 총독 압달라의 충성까지 얻어낸 그는 쿠파를 점령한 후 칼리파로 선포되었다. 전리품 분배에 관대했던 다하크의 명성이 퍼지자 그의 12만에 이르렀다고 하며 당시 마르완 2세와 대립하던 왕족 술레이만[4]이 피신해 오기도 하였다. 이후 다하크가 모술을 점령하고 북상하자 당시 홈스를 포위하고 있던 마르완 2세는 하란에 주둔하던 아들 압둘라로 하여금 다하크와 맞서게 하였다.

하지만 다하크는 그를 패배시키고 니시비스에서 포위하였다. 746년 여름, 10개월간의 포위 끝에 마침내 홈스를 함락한 마르완 2세는 정예병을 이끌고 다하크와 맞섰다. 그해 9월, 알 가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하크는 전사하였고 카라와지 군대는 패주하였다. 이후 후계자인 알 카이바리가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하여 우마이야 군대에 승리하였다. 그는 적진을 점령하고 마르완 2세의 카펫에 앉아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약탈물을 두고 내분이 일어났고 이에 우마이야 군대가 반격해오자 패배하였고 카이바리도 전사하였다. 이후 반란군의 지도자가 된 아부 둘라프 알 샤이반은 술레이만과 함께 모술에서 농성하였으나 몇개월 후 전세가 기울자 도주하였다. 샤이반은 바레인으로 갔다가 피살되었고 술레이만은 인도로 피신한 후 더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다.


2.4. 세습 왕조 건설[편집]


앞서 제시된 여러 봉기들과는 달리 대다수의 샤이반 부족은 우마이야 왕조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하크의 반란이 일어나던 시기 샤이반 부족의 유력자였던 마안 이븐 자이다는 바누 카이스 출신의 이라크 총독 우마르 이븐 후바이라의 천거로 마르완 2세에게 등용되었다. 그는 746년, 파르스에서 압둘라 이븐 무아위야[5]가 이끈 쉬아파 반란을 진압하였고 749년에는 압바스 혁명군에 맞서 우마르와 함께 쿠파의 방어를 맡았다가 와시트로 퇴각하여 이듬해 9월까지 농성하였다. 그들은 마르완 2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목숨 보장을 대가로 항복하였다.

우마르는 기존 약속과 달리 처형되었는데, 마안은 샤이반 부족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아부 무슬림의 결정으로 살아남아 쿠파의 아부 압바스에게 항복할 수 있었다. 이후 잠잠히 지내던 그는 압바스 조의 2대 칼리파 알 만수르를 쉬아파인 라완디야로부터 구출해내며 신임을 얻었다. (757년) 그는 예멘 총독으로 임명되어 그곳을 안정시켰고, 768년엔 시스탄 총독이 되어 현지의 카와라지 반란을 진압하였다. 다만 770년 경 마안은 위장한 카와라지 신도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장남 자이다 역시 예멘 총독이 되었고, 차남 샤라힐은 하룬 알 라시드의 동로마 원정에 참가하였다. 다만 샤이반 부족 내에서의 유력자 위치는 마안의 조카인 야지드 이븐 마즈야드가 물려받았다.


2.4.1. 마즈야드 왕조[편집]


야지드는 백부의 시스탄 총독직을 계승하여 유수프 알 바름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칼리파 알 마하디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구르간 총독 알 하디를 극진히 수행하였다. 그 대가로 하디의 치세에 야지드는 아르메니야 총독으로 부임하였고 비밀리에 그의 동생인 하룬을 경계하며 하디의 친아들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786년에 알 하디가 요절하자 결국 하룬이 칼리파로 즉위하였고 야지드는 788년에 해임되었다. 다만 3년밖에 안되는 임기 동안 야지드는 그리스도교도들을 견제하기 위해 시르반 (현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아랍인들을 다수 이주시키는 등 캅카스 지역의 정치 구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한편, 794년에는 샤이반 부족의 알 왈리드 알 타리프가 카와라지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세기 만에 샤이반 - 카와라지 봉기가 자지라 지방을 휩쓴 것이다. 그는 모술 총독을 전사시키며 기세를 올렸고 라카 총독인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살리흐를 라카에서 포위하였다. 이후 그들은 아르메니아 고원을 따라 이동하며 반 호수 연안의 아흐라트로부터 세폐를 받아내었고 아제르바이잔을 약탈한 후 다시 이라크로 남하하였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는 두 차례에 걸친 진압 시도가 모두 실패하자 결국 야지드를 소환하여 최대한 빨리 반란을 토벌하게 하였다.

795년 말, 하디싸에서 카와라지 군대와 마주한 야지드는 대장인 왈리드와의 1대1 대결 일기토를 요구하였고 이어진 싸움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사기가 꺾인 카와라지 군대는 붕괴되었고 반란은 칼리파의 염원대로 조속히 끝났다. 이에 하룬은 야지드를 신임하였다. 799년, 북쪽의 하자르 칸국이 캅카스를 공격해오자 야지드는 재차 아르메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그에 맞섰다. 801년에 야지드는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아사드가 총독위를 계승하며 마즈야드 왕조의 기원이 되었다.

아사드, 무함마드, 칼리드 형제는 부임과 해임을 반복하였고 그중 칼리드는 813 ~ 842년까지 총독을 맡은 후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무함마드가 계승하였으나 849년 경 해임되자 본거지인 디야르바쿠르로 돌아갔다. 이후 아르메니아의 반란 세력이 더욱 강해졌고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튀르크 사령관 부가 알 카비르를 파견하여 강경하게 반란을 억눌렀다. (852 ~ 855년) 이흐 무함마드가 재차 총독이 되어 무슬림 영주들과 아르메니아의 바그라티온 가문과 싸웠으나 패하고 추방되었다. 칼리파의 왕자들인 알 압바스 이븐 알 무스타인, 압달라 이븐 알 무타즈 등이 재위한 후 같은 샤이반 부족의 이사 라는 인물이 아르메니이로 부임하였는데, 그 배경은 이러하다.

861년에 무함마드의 동생 하이샴 이븐 칼리드가 아제르바이잔에 독립하여 세운 마즈야드 왕조 (시르반샤쉬)이다.


2.4.2. 앗샤이크 왕조[편집]



2.4.2.1. 팔레스타인 & 시리아[편집]

한편,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 일대는 베두인 출신의 이사라는 인물의 수중에 있었다. 그는 본래 시리아의 장교였다가 팔레스타인 총독으로 승진하였는데, 5차 피트나 때 끝까지 알 무타즈에 반대하였다가 토벌되어[6] 이집트로 도주한 경력이 있다. 이후 이사는 무타즈에 충성을 서약하고 4만 디나르 금화를 바쳐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알 우르둔 (요르단)의 총독까지 겸하게 되었다. (866년 12월)

그리고 869년, 무타즈가 살해되고 무흐타디가 즉위하디가 즉위하는 와중에 다마스쿠스까지 차지한 이사는 75만 디나르의 세금을 독점하고 사실상 독립하였다. 이에 이집트 총독 아흐마드 이븐 툴룬에게 토벌 명령이 떨어졌으나 그는 명령을 이행하는 시늉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무타미드는 재차 이사에게 세금을 돌려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아마주르 알 투르키를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 토벌을 명하였다.

알 타바리에 의하면 이사는 2만 대군을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다마스쿠스 성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사는 아마주르에게 패하였고 아들 알 만수르까지 전사하는 수모를 겪으며 팔레스타인의 라믈라로 도주하였다. 무타미드는 여전히 큰 세력을 지녔고 유능했던 이사와 전력으로 싸우기보다 타협하기로 하였고, 그에게 시리아를 포기하는 대신 기독교도들의 반란이 이어지던 아르메니아 총독직을 제안하였다. 이사가 수긍하며 시리아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 (871년 5월)


2.4.2.2. 자지라 (북부 메소포타미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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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지라 지도 : 디야르 바크르 ~ 티크리트 일대

이후 아르메니아 총독이 된 이사는 아쇼트 1세 바그라투니를 패배시킨 후 동맹하며 혼란을 진정시켰으나 877년에 터진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 와히드의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후 이듬해 아르메니아를 떠나 총독령의 남쪽 변방인 디야르바크르 지방에만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자지라의 패권을 두고 모술 총독 이샤크 이븐 쿤다지크와 대립하던 그는, 함단 왕조의 창시자인 함단과 연합하여 이샤크를 패배시켰다.

하지만 880년 경, 무타미드는 이샤크를 모술에 더하여 디야르 라비아 (마르딘 ~ 하트라)와 명목상의 아르메니아 총독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었고 이에 이사는 매년 2만 디나르의 연공을 대가로 그와 평화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881년에 이사와 함단은 재차 이샤크와 싸웠고, 이번엔 이샤크가 대승을 거두었다. (881년 봄) 이후 이샤크는 이사를 디야르바크르에서 포위하였는데 압바스 조정이 툴룬 왕조 원정을 위해 이샤크를 소환하며 이사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듬해 이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아흐마드 이븐 이사가 계승하여 디야르바크르를 다스렸다. 비록 명목상의 아르메니아 총독은 이샤크였지만 887년에 알 무타미드는 아르메니아와 인접한 디야르바크르의 아흐마드로 하여금 바그라티온 왕조의 아쇼트 1세에게 왕 (말리크) 칭호를 하사하게 하였다.[7]

이후 아흐마드는 아르메니아에 간섭하기 시작하여 890년경 아르젠의 아미르 아불 무그라[8]를 투옥시키며 그 일대를 수중에 넣었다. 한편 891년에 부친의 라이벌이던 모술 총독 이샤크가 사망하자 아흐마드는 서쪽의 마르딘에 이어 마침내 모술까지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893년, 칼리파 알 무타디드가 친히 나서 모술을 압바스 왕조의 직할령으로 수복하였다. 이에 아흐마드는 (이븐 알 무타즈[9]에 의하면) 동로마 제국에 투항을 고려하였으나 이내 무타디드의 우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이샤크의 보물과 개인적인 선물, 그리고 생포한 카와라지 반란군을 보내는 등 칼리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곤 다시 아르메니아로 관심을 돌려 아쇼트 1세의 후계자인 슴바트 1세가 사즈 왕조와 싸우는 틈레 타론 공국을 노렸다. 895년, 아흐마드의 사주로 공작 구르겐이 암살되었고 이듬해 타론 공국은 그에게 정복되었다. 타론 공작 다비드는 바그라티온 왕가의 일원이었고 슴바트 1세는 아흐마드에게 그를 총독으로 임명하도록 칼리파에게 부탁할테니 공국을 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아흐마드는 당연히 거절하였고, 이에 슴바트는 5만이 넘는 대군을 모아 남하하였다.

하지만 길잡이였던 바스푸라칸 공국의 섭정 가기크는 아흐마드와 결탁하여 원정군을 일부러 멀고 험한 길로 안내하였다. 아르메니아 군대는 지쳐버렸고 가기크가 퍼뜨린 헛소문으로 사기까지 저하되었다. 이어진 전투는 아흐마드의 대승이었고 슴바트 1세 본인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896/7년)

아르메니아 남부에서의 입지를 다진 아흐마드는 898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무함마드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899년에 알 무타디드가 디야르바키르에 입성하고 무함마드를 옥에 가두며 이사에서 시작하여 3대째 이어진 샤이바니 가문의 지배는 종식되었다. 타론 공국은 살해된 공작의 사촌 그리고르에게로 넘어갔다. 이후로도 샤이반 가문은 아랍 시인들에 의해 입에서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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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일파가 아글라브 왕조를 세운다.[2] 그 일파가 함단 왕조를 세운다.[3] 고대 도시 우르크가 위치한다.[4] 히샴의 아들로 마르완 2세의 오촌 조카였다.[5] 744년 쿠파에서 봉기한 후 실패하였으나 이후 이란 대부분을 점거하고 이스파한을 수도로 정하였다. 하지만 747년 토벌되어 압바스 봉기군에 피신했는데, 그의 유명세를 경계한 아부 무슬림에 의해 처형되었다.[6] 당시 전투는 요단강에서 벌어졌다. 이사는 진압군 사령관 알 나우샤리의 아들을 죽였으나 결국 패주하였다.[7] 당시 아르메니아 출신의 바실리오스 1세가 통치하던 동로마 제국의 아르메니아 주장을 일축하기 위한 조치였다. 중세 아르메니아 왕국의 성립했다.[8] 아쇼트 1세와 동맹하였고 비밀리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고 전해진다.[9] 칼리파 알 무타즈의 아들. 무타미드 치세에 연설문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