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라 이븐 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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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치세
2.1. 세 무함마드의 득세
2.2. 1차 우마르 토벌과 내분
2.3. 톨레도의 반란과 최대의 위기
2.4. 바누 카시의 쇠퇴
2.5. 2차 우마르 토벌과 죽음


1. 개요[편집]


عبد الله بن محمد الأموي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 알 우마위


재위 888년 ~ 912년 10월 15일
생몰 844년 1월 11일 ~ 912년 10월 15일

후우마이야 왕조의 7번째 아미르. 남북면 모두의 반란이 일어나던 풍전 등화의 상황에서 아미르에 오른 그는 사냥과 신앙에만 관심을 두는 소극적인 군주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891년 후우마이야 조는 남부의 반란자 우마르에 대규모 공세를 가하였으나 진압에 실패하였고,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북방의 기독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며 상황은 악화되었다. 그나마 북방의 바누 카시와 우마르 간의 합류가 실패한 것이 후우마이야 조가 계속 이어지는 행운이었다. 그러던 911년 압둘라는 우마르와 강화를 체결하였고, 이듬해 그가 휴전을 파기하자 반격을 개시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만 사망하였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손자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를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었다.

2. 치세[편집]


무함마드 1세의 장남이자 형인 알 문디르가 888년 요절하자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가 후자의 죽음의 배후에 있다는 설이 당대에 제기되었으나 즉위 이후 압둘라는 정치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신앙 생활과 사냥 등의 취미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며 현대에는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압둘라의 25년에 이르는 치세는 북부 바누 카시와 남부 우마르의 반란 등의 내란으로 점철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한번도 친정에 나서지 않았다. 따라서 912년 72세의 나이로 그가 사망했을 당시에 후우마이야 왕조는 존립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한편 862년경 왕자 시절의 압둘라는 팜플로나 왕자 오르티 가르세이츠의 딸인 오네카(두르)와 결혼하였고, 세 아들을 얻은 후 880년경 이혼하였다. 이후 그녀는 사촌인 아즈나르와 결혼해 딸 토다를 얻는데, 토다는 후에 팜플로나의 세메로 왕조를 세우게 되는 안초 1세와 결혼하였다. 따라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와 팜플로나의 가르시아 1세는 둘다 오네카의 손자이다.

2.1. 세 무함마드의 득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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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말엽 이베리아 반도

선대인 알 문디르의 치세 때부터 바누 카시 연맹은 재차 독립을 꾀하려는 태세를 보였다. 이에 알 문디르는 사라고사에 바누 투지브, 우에스카에 바누 앗 타윌을 배치하여 각각 바누 카시의 동부와 서부를 견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압둘라가 즉위한 이듬해인 889년, 바누 카시 연맹의 동부 레리다를 다스리는 이스마일 이븐 무사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들 무사와 무타리프에게 군대를 주어 걸림돌인 우에스카를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바누 앗 타윌의 무함마드의 매복에 걸려 3백이 전사하고 무사는 전사, 무타리프는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상심한 이스마일은 같은해 10월 10일 사망하며 반란은 종식되었다. 이후 그의 동부 영토에 대해 서부의 무함마드 이븐 룹과 무함마드 앗 타윌은 각각 압둘라에게 귀속 여부를 문의하였는데 전자의 소유로 결정되었다. 신흥 세력의 지나친 강성함 대신 월경지로써 제대로 관리가 힘든 무함마드 이븐 룹에게 넘겨준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즉위 후 압둘라는 기존 재상이던 사라고사 총독 아흐마드 알 바라의 부친과 불화를 빚었다. 따라서 아미르는 칼라타유드의 바누 투지브에게 사라고사 공격을 장려하였다. 이에 바누 투지브의 압둘 라흐만과 아들 무함마드는 음모를 꾸며 부자 간의 분쟁이 일어난 것으로 위장하여 후자가 휘하 병력과 사라고사에 망명하고 아흐마드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 측근 중 일원이 된 무함마드는 기회를 보아 890년 1월 아흐마드를 살해하고 도시를 장악하였다. 이에 부친 압둘 라흐만이 사라고사로 향하였는데, 무함마드는 그의 입성을 거부하고 아미르 압둘라로부터 총독위를 승인받았다. 연극이 현실로 상심한 압둘 라흐만은 곧 사망하였고 칼라타유드는 다른 아들 알 문디르가 계승하였다. 이후 무함마드는 코르도바에 충성하고 사라고사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는데, 바누 카시의 무함마드 이븐 룹이 도시를 노리며 17년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2.2. 1차 우마르 토벌과 내분[편집]


한편 남부에선 반란자 우마르 이븐 하프순이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그라나다하엔 등의 도시를 점령하고 바에자, 우베다, 아르키도나 등의 도시들과 동맹하며 코르도바를 동쪽과 남쪽에서 압박하였다. 더욱이 수도 코르도바에서 도보로 하루 거리인 폴레이가 우마르의 새 거점이 된 것은 후우마이야 조의 존립을 위협하였다. 마침내 891년, 우마이야 대군이 코르도바에서 남하하였고 폴레이 성채 부근에서 우마르를 격파하였다. 이에 몇개 도시들이 그의 수중에서 벗어나며 일시적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우마르는 요새화된 옛 거점인 보바스트로로 피신하여 수성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아미르 압둘라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우마이야 군은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였고, 우마르는 이듬해까지 세력을 재정비하여 실지를 모두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다만 그는 이후로도 보바스트로를 계속 본거지로 삼아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44세에 제위에 오른 압둘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중 장성한 아들로 장남 무함마드와 차남 알 무탈립이 있었는데, 압둘라는 전자를 총애하였다. 이에 알 무탈립은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891년 1월 초엽 압둘라와 기독교도 부인 무즈나 사이에서 아들 아브드 알 라흐만이 태어나며 무함마드의 왕가가 세워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1월 28일, 알 무탈립은 무함마드가 반란자 우마르와 내통하고 있다고 모함한 후 그를 살해하였다. 다행히 생후 3주에 불과했던 아브드 알 라흐만은 해를 당하진 않았다. 촉망받던 아들의 죽음에 압둘라는 분노하였고 알 무탈립을 체포해 구금한 후 891년 혹은 895년 처형하였다. 그리고 다른 아들이 있었음에도 적손인 아브드 알 라흐만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그의 양육을 각별히 신경썼다. 내분을 규합하기 위해 연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알 문디르의 딸 파티마를 아브드 알 라흐만과 결혼시킨 것도 압둘라의 결정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3. 톨레도의 반란과 최대의 위기[편집]


코르도바 정부가 여념이 없는 틈에 북방의 무함마드 이븐 룹은 우에스카와 평화 및 협력을 이어가며 사라고사 포위를 이어갔다. 그러던 896년 그는 아들 룹을 시켜 동부 영토의 몬존 성채를 재차 요새화하려 했는데 바누 카시의 동부와 서부 영토 사이의 우에스카를 포위하려는 것으로 여긴 무함마드 앗 타윌은 반발, 저지를 위해 동생 푸르툰 휘하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룹은 더 적고 미숙한 병력을 지녔음에도 몬존을 지켜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장 푸르툰을 사로잡는 쾌거를 올렸다. 그러던 897년 1월, 톨레도 시민들은 20여년 만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함마드 이븐 룹에게 지도자 자리를 제안하였다. 당시 사라고사를 포위 중이던 그는 대신 아들 룹을 파견했는데, 공교롭게도 30여년 전의 톨레도 총독이던 조부 룹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해 8월 룹은 바르셀로나 원정에 나서 백작 윌프레드를 전사시켰다. 이제 사라고사만 점령한다면 바누 카시의 위세는 무사 때에 버금갈 터였다.

그리고 재차 반란에 나선 바누 카시에 대해 남부의 반란자 우마르가 동맹을 제의하였다. 이에 898년 룹은 그와 함께 코르도바로 진격하기 위해 하엔으로 남하하였다. 하지만 우마르가 당도하기 전에 급보가 당도하였다. 바로 그해 10월 8일에 사라고사의 포위망을 순찰하던 무함마드 이븐 룹이 한 수비대가 던진 창에 맞아 사망한 것이었다. 성내의 바누 투지브는 혼란을 틈타 그의 수급을 취하여 코르도바에 보내었고, 우마이야 궁전 앞에 8일간 전시되었다. 이후 아미르 압둘라는 용맹한 적에 대한 존중으로 수급을 예를 갖춰 매장하게 하였다. 무함마드 이븐 룹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안달루스의 판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 룹은 권력 승계를 위해 연합을 포기하고 하엔을 떠나 투델라로 회군하였다. 그곳에 도착한 룹은 우선 안정을 위해 투델라와 타라조나의 지배자로의 정식 책봉을 대가로 아미르 압둘라의 종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반란을 끝냈다. 코르도바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복귀한 룹은 권력 공백을 틈타 준동한 우에스카의 무함마드 앗 타윌에 맞섰다. 10월 말엽 룹은 기습을 통해 그를 사로잡았다. 무함마드 앗 타윌은 바르바스트로와 몬존 ~ 우에스카 사이의 영토를 할양하고 우에스카 소유를 대가로 금화 10만 디나르를 약속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즉석에서 5만 디나르를 납부한 그는 남은 절반을 상환하겠다는 증표로 아들 압둘 말리크와 딸 사이다를 인질로 두었는데, 룹은 후자와 결혼하고 남은 금액의 탕감 및 남은 인질을 석방해 주었다. 한편 간발의 차이로 룹과 합류하지 못해 기회를 놓친 남부의 우마르는 이듬해인 899년 갑자기 배교를 선언하고 조상의 신앙인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사무엘이었고, 이후 보바스트로에는 이글레시아 모자라베 (모자라브 교회)가 세워졌다. 이는 아스투리아스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아내고 모자라브들을 집결시키려는 의도였고,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써 무왈라드 등 무슬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2.4. 바누 카시의 쇠퇴[편집]


한편 룹은 부친의 사라고사 포위를 이어갔다. 그러던 900년 경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3세가 팜플로나와 연합해 타라조나를 습격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903년에는 톨레도가 재차 반란을 일으키고 룹에게 지휘를 청하였다. 이에 룹은 동생 무타리프를 파견하였고, 그는 아미르를 칭하였다. 다만 바누 카시의 톨레도 지배는 불안정했는데, 내분을 거쳐 이스마일의 아들 무함마드가 집권하는듯 했지만 906년 암살되었다. 이러한 혼선에도 룹은 그곳에 개입하지 못했는데, 북쪽의 알폰소 3세가 재차 바누 카시의 영토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라뇽을 포위하자 룹은 역으로 아스투리아스의 알라바를 공격했고, 이에 알폰소 3세는 철수하였다. 이후 룹은 보복으로 아스투리아스의 동맹인 팔라르 백작령을 공격해 초토화시키고 수백명을 죽인 후 백작 레몽의 아들 이스란을 포함한 수천의 포로와 귀환하였다. 이스란은 이후 팜플로나군이 투델라를 함락할 때까지 10여년간 그곳에 감금되었다.

905년, 알폰소 3세는 아라곤-팔라르 백작의 연합군과 팜플로나를 침공해 인기 없는 국왕 포르툰 가르체스를 폐하고 그의 외손녀 사위이자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히메네스 가문의 산초 가르체스 (동시에 팔라프 백작 레몽의 조카였음)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룹은 전통적으로 바누 카시와 동맹이던 이니게즈 가문을 돕긴 커녕 아들 압둘라 휘하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907년, 폐위된 포르툰이 망명해오자 이를 영토 확장의 기회로 여긴 룹은 팜플로나를 침공하였는데 그해 9월 30일 리에데나에서 산초의 매복에 걸려 전사하였다. 이로써 동북면의 패권은 바누 카시에서 팜플로나의 나바라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룹의 사후 바누 카시는 더이상의 중흥 없이 빠른 쇠퇴의 길을 걸었다. 산초는 칼라호라 방면으로 남진에 나섰고, 바누 투지브는 사라고사 포위를 걷어내고 북진해 에헤아를 점령하였다. 무함마드 앗 타윌 역시 바르바스트로, 알케자르, 알바르비타냐 등의 실지를 회복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룹의 아들 푸르툰이 지배하던 동부 영토의 레리다를 점령한 후 그 왈리를 칭하였다. 비록 룹의 동생 유누스가 몬존에서 버텼지만 곧 후자에게 점령되었다. 룹의 다른 동생 압둘라만이 축소된 서부 영토를 유지하였다. 동북면의 새 패권자로 부상한 무함마드 앗 타윌은 그 명성을 과시하듯 908년 10월에 팔라르 백작령을 공격, 연공을 조건으로 한 평화 제안을 거절하고 로다 성을 함락하였다. 그외에도 몬테 페드로소와 올리올라에서 3백의 포로를 취하여 금화 1만 3천닢을 받고서 석방하였다. 이제 그와 팜플로나 국왕 산초와의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한편 바누 카시의 압둘라는 팜플로나와 바누 투지브에 맞서 무함마드 앗 타윌과 친선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911년, 그들은 후자의 처남인 아라곤 백작 갈린도 2세와 팜플로나 원정에 나섰다. 아라곤을 통과한 연합군은 몇개 성채를 파괴했지만 전세가 역전되자 철수하였는데 산초의 기습을 당해 대패하였다.[1]

2.5. 2차 우마르 토벌과 죽음[편집]


파일:إمارة قرطبة.png
우마르 (사무엘)은 북쪽의 바누 카시 및 아스투리아스와 동맹하였다.

900년대 들어서 남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우마르의 개종 후 그 휘하에서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균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909년 이프리키야에서 파티마 왕조가 세워지자 이듬해 우마르는 사절을 파견해 그 칼리파인 압둘라 알 마흐디에게 복속을 청하였다. 이 역시 지원을 얻어내려는 조치였으나 당시에는 파티마 조가 막 세워진 터라 별 효과를 거두진 못하였다. 그럼에도 강력한 함대를 지닌 쉬아 이슬람 세력과의 연대 시도는 코르도바 궁정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는 911년에 아미르 압둘라가 우마르와 휴전을 맺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우마르가 협정을 깨고 공세를 재개하자 우마이야 군이 반격에 나서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그해 10월 압둘라가 사망하며 작전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의 손자 압둘 라흐만이 아미르로 즉위하여 위기에 빠진 안달루스의 구원자로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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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함마드 앗 타윌은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도주하였고 갈린도 2세는 산초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아랍 사가들에 의하면 압둘라의 후위만이 버텨내다가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