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영(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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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호
문수(文秀) / 신포(新圃)
본관
영해 박씨(寧海 朴氏)[1]
출생
1882년 12월 20일[2]
충청도 대흥현 거변면 송천리
(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죽천리 송천골마을)[3]
사망
1948년 3월 17일[4]
묘소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여래미리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남조선로동당 당수 박헌영은 그의 6촌 재종제(再從弟)이다.

2. 생애[편집]


1882년 12월 20일 충청도 대흥현 거변면 송천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죽천리 송천골마을)에서 아버지 박현국(朴鉉國, 1859. 8. 15 ~ ?. 11. 24)과 어머니 전주 이씨(1859. 9. 1 ~ 1889. 3. 13)[5]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예산군 예산면 읍내 장터에서 20여 명의 시위대열의 선봉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다. 이때 이를 진압하려던 일본군 헌병과 대치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 헌병 소기 아키히데(曾木秋秀)가 시위를 방해하며 박대영을 체포하려 했다. 이에 박대영은 일본군 헌병이 가지고 있던 곤봉을 빼앗아 곤봉의 양 끝을 잡고 헌병의 몸에 깍지를 끼워 꼼짝못하게 하는 등 격렬한 격투를 벌였다.

결국 일본군 헌병들은 무자비하게 시위대 행렬에 발포했고, 박대영은 이때 흉탄 7발을 맞고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수술 끝에 5발은 꺼냈지만 나머지 2발은 끝내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1919년 5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관리직무집행방해, 소요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여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관리직무방해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9월 20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1948년 3월 17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대통령표창,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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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사공파-예산문중 56세 영(永) 항렬.[2] 영해박씨대동보 권3 353쪽에는 1883년 12월 2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영해 박씨(寧海 朴氏) 집성촌이다.[4] 음력 2월 7일.[5] 이홍원(李鴻遠)의 딸이다.